멘토, 필요한가?
멘토: 달콤하지만 위험한 중독
20대가 되자 어린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질문들이 삶의 화두가 되었다. 수강신청을 할 때도 단지 학점 잘 나오는 수업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 삶에 커다란 메시지를 주는 수업을 찾아 듣고 싶었고, 형형색색으로 눈과 귀를 유혹하는 대자보와 플래카드들 속에서 어떤 진실을 찾아야 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때는 멘토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았지만,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바로 눈을 뜨고도 길을 못 찾는 내게 길잡이가 되어줄 멘토였다.
나는 늘 묻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 운명의 방향타는 무엇인지.
어린 시절 나는 선생님이 좋으면 성적이 쑥쑥 올라가고, 선생님이 무서우면 성적이 금세 곤두박질치는 아이였다. 방학만 되면 담임선생님께 가장 열심히 편지를 보내는 아이,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면 날아갈 듯이 행복했던 아이였다. 내게 선생님은 어린 아이의 한 세계를 지배하는 공인된 독재자였다. 그래서 선생님은 무서울 수는 있어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니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의 매트릭스’란 존재하지 않았다. 뭐든지 알아서 척척 해야 하고, 누군가에게 뭘 묻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고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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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담임선생님의 매트릭스’ 안에 속할 수 없는 20대가 되자, 그 정신의 공백을 메워주는 것은 바로 ‘멘토를 향한 갈망’이었다. 선생님이 학교라는 제도 안의 슈퍼에고(superego)였다면, 멘토는 학교 밖에서 성인이 된 이후 마음속의 슈퍼에고가 되었다. 특정한 사람에게서 멘토를 찾을 수 없었기에 나는 끊임없이 책 속에서 멘토를 찾았다. 내가 20대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의 종류가 자서전이나 회고록이었던 이유를 나는 30대가 되어서야 알았다. 나는 책 속에서 정보나 지식을 찾기보다는 책 속에서 ‘사람’의 온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란 성공의 아이콘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쳐야만 알 수 있는 삶, 그 자체의 아이콘이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라는 기준보다는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의 문제에 온몸으로 맞섰는가가 중요했다. 멘토 담론에서 유행하는 ‘성공’이나 ‘자기계발’이라는 키워드는 왠지 불편했다. 성공이나 자기계발을 위한 멘토 찾기는 왠지 주체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아슬아슬한 덫 같았다. 그것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오아시스처럼, 찾으면 찾을수록 갈증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성공’이라는 달콤한 약속에는 현혹되고 싶지 않았다. 자기계발서는 성공하지 못했을 때나, 또는 성공이냐 실패냐가 진짜 문제가 아닐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았다. 20대의 나는 카네기보다 시몬 베유가 좋고, 힐러리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좋았다. 그건 지금도 변함없다. 누군가의 왁자지껄한 성공보다는 누군가의 소리 없는 절실함이 굳게 닫힌 마음을 끝내 움직이기 때문이다.
독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쏟아지는 멘토의 축복
책 읽는 사람만큼 무조건 아름다워 보이는 피사체는 없다. 남녀노소 누구든, 낯선 곳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매력적이고 신비로워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책 읽기가, 제3자는 결코 틈입할 수 없는, ‘일대일의 은밀한 만남’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와 독자 간의 아주 은밀하고도 배타적인 일대일 미팅. 그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피할 수 없는 매혹이다. 사진 속의 그녀는 지금 저 책을 통해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 지금 그녀에게만 쏟아지고 있는 달콤한 축복의 메시지를, 우리는 결코 들을 수 없다. 그 틈입 불가능성이 그녀를 신비롭게 만든다. 책 속에는 언제나 그렇게 다정한 멘토가 있다. 간절히 들으려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온몸을 활짝 열어 오랫동안 갈고 닦은 아름다운 메시지를 토해내는.
멘토를 향한 갈망은 진정한 배움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늘
그분과의 인연은 짧았지만 지독했다. 4년 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지만, 그 후로는 한 번도 뵐 수가 없었다. 멘토를 향한 나의 열정과 제자를 향한 가르침의 열정은 서로를 향한 지나친 집착을 낳았고, 서로 간에 크고 작은 오해들이 쌓이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폭풍이 몰아치게 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나의 진짜 문제점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 삶의 근원적인 결핍을 멘토의 훌륭함을 통해 해소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내 영혼의 궁핍을 멘토의 대단함으로 채우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든 묻고 싶다, 내 운명은 무엇이냐고!
현실 속에서 멘토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찾지 못하면, 우리는 사주나 타로는 물론 점집까지 찾게 된다. 그러나 점집에서 우리는 ‘알고 싶은 사실’보다 ‘듣고 싶은 사실’을 듣는 데 만족하곤 한다. 그리고 듣고 싶은 내용을 듣지 못했을 때는, 듣기 싫은 내용을 있는 힘껏 열심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데 열중해보기도 한다. 나 또한 사주나 별자리점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어서였다. 도대체 내 운명이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돌아서서 나올 때마다 후회하게 된다. 내가 찾는 운명은 그곳에 있지 않기에. 우리가 찾는 운명은 사주단자에도, 타로점에도, 별자리점에도 없다. 지혜는 운명의 여신에게 다음 행선지를 묻는 약삭빠름이 아니다. 운명의 여신은, 운명인지 아닌지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운명으로 만드는 인간의 열정에 마침내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훌륭한 스승을 향한 지나친 갈망이 진정한 배움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스승을 ‘한 사람의 구체적인 인격체’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손쉽게 관계를 경직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오직 그 사람만을 절대적인 멘토로 삼는다면, 그 관계는 지배와 통제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건 가르침을 주는 자만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으려는 자 스스로가 관계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 나는 정말, 한 마디로 눈치가 없었다.
배우는 건 다 좋은 건 줄로만 알았다.
나에게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이 결핍되어 있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배웠을 때,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옷을 걸친 어린 아이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내가 누군가를 따르고 배우고 본받으려 하는 순수한 의지가 왜 나쁜 것인지.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 가장 끔찍한 만남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도.
누군가의 훌륭한 멘티가 되고자 하는 내 마음 속에는 그 분께 잘 보이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보다 돋보이고 싶어 하는 열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예스24 채널예스, 정여울, <정여울의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칼럼, "멘토,달콤하지만 위험한 중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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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 반복되듯이 삶도 성공도 반복된다. 우선은 멘토의 삶을 따라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천재는 모방하고 둔재는 쥐어짠다. 잘 베끼면 창조이고 어설프게 베끼면 표절이 된다.
성경에서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다.
멘토를 찾고 멘토를 모방하라. 그것이 먼저다.
신간 <청춘멘토>의 에필로그가 멘토의 필요성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화엄경華嚴經의 가르침이 울타리에 안주하려는 청춘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아름다운 꽃과 안전한 강을 버리고 끊임없이 거친 바다로 향하는 멘토 4인-안철수, 박경철, 김제동, 김난도-과의 아름다운 여행을 마쳤다. 그 여행길에 함께 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무척 행복했다. 일부의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감과 소통이라는 새로운 멘토상을 정립하고 있다. 영웅담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모두 자신의 삶을 좀 더 사랑하게 되기를, 그래서 더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살게 되기를, 빙빙 둘러 가지 말고 진정한 짝꿍 멘토를 하루 빨리 찾았으면 한다.
누구나 원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즐거운 상상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집도 절도 죽도 밥도 없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불안한 미래 때문에 단두대가 아닌 왕관을 쓰려고 한다. 그러나 젊다는 이유만으로 ‘허허벌판으로 가라, 단두대가 있는 곳으로 가라, 가장자리로 가라'고 등을 떠밀고 싶지는 않다. 단두대가 있는 길이든, 왕관이 있는 길이든 초심과 열정으로 멘토와 함께 했으면 한다.
'안전함'이라는 단어는 정적이다.
머무름이다.
편안함이다.
익숙함이다.
특히 청춘들에게는 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세상 그 어떤 작품이나 결과물도 방공호에서 안전하게 만들어진 것은 없다. 부디 찰나의 온기에 몸을 맡기지 않기를. 찰나의 유혹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를. 꿈이나 일에 대한 성취는 어떤 멘토와 함께하는가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당신의 멘토를 모방하라. 모방은 창조의 아버지다. 모든 창조는 서툰 모방에서 시작됐다. 천재는 모방하고 둔재는 쥐어짠다. 자꾸 따라하다 보면 어느 순간 통렬한 결정타가 나온다. <명상록>의 글처럼, 창조의 한 방은 당신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곳에서 나온다. 당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와 소통할 수 있는 멘토를 찾아라.
네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을 존중하라.
그것은 우주 안의 가장 강력한 것과 동족이다.
네 안에서도 그것은 다른 것들을 모두 이용하고,
네 삶은 그것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지금 이 땅에 힘들지 않는 청춘 어디 있겠는가?
소설가 이외수는 하나의 이름은 하나의 아픔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우리는 기는 법부터 배우지 않았던가? 그 어떤 일이든 처음에는 모르는 것도 많고 시행착오도 겪고 실패도 하기 마련이다. 입사한지 1년차인 나와 10년차 베테랑을 비교하지 마라. 돈 많은 부잣집 자식과 아르바이트 하는 나를 단순 비교하지 마라. 나아감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비교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나아감이란 남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고 어제의 나보다 앞서가는 것이니까. 모르면 묻고, 울고 싶으면 울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자.
미완성, 그게 젊음이니까.
가능성, 그게 청춘이니까.
끝까지 충실하게 크는 나무는 느리게 자라는 법이다. 성장위주의 속도경쟁사회에서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기초를 다지는 일은 당장은 어설퍼 보일지 모른다. 결과에 집착하고 과정에 무관심한 회색사회에서 차분히 본질을 가다듬는 일은 소심해 보일런지 모른다.
하지만 속도나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방향성이다. 청춘들에게 필요한 최고의 역량은 변화에 대한 방향성과 의지력이다. GE의 변화관리자인 조지 에케스George Eckes는 "사람들의 90% 이상이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처음 선택한 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으며,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성공이란 변화의 소용돌이를 뚫고 진득하니 버텨 임계점을 통과하는 마라톤 경주다. 스타강사 유수연은 토익 책을 놓지 않았고, 2NE1은 춤과 노래를 놓지 않았다.
김제동의 <청춘콘서트>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라는 박경철의 대답은 명쾌하다. 성공은 end가 아니라 ing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부디 본서가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와 물음표가 되어 오랫동안 멘토의 역할을 했으면 한다. <자유인의 풍경>에 나오는 글로 필자의 당부를 대신하면서 책장을 덮는다.
부디, 어떤 힘겨운 순간을 만나도 그 영혼의 날개를 접지 말기를.
하늘은 우리가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활짝 펴고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는 멋진 모습을 고대하고 있다.
추락하는 자는 날개를 접었기 때문이다.
그대, 끝까지 날개를 펴라.
하늘은 그대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