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큐레이터의 <헐렁한 군주론>-성공하려면 줄을 잘 서라
군주는 미움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피해야 한다. <군주론>19장
역사 속 모든 군주들도 살아남기 위해 ‘줄’을 섰다
역사를 거슬러 보자. 자본가, 군인, 귀족, 양반....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권력을 상징하는 집단들이다. 그 중 자본가의 힘이 정점에 달한 지금은 특히 우리나라 재벌 기업가들의 힘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보이지 않는 권력도 대단하다. 역대 정권들이 재벌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이들의 지원 여부에 따라 권력의 명암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군주는 ‘촛불시위’ 하는 국민들을 무시하다 혼쭐이 나기도 했고, 또 다른 군주는 정치적이고 부패한 군인들에 의지했다. 군주도 지지 세력을 무시하거나 ‘줄’을 잘못 설 경우 치명적인 위기를 맞을 수 있다.
학교교과서를 덮고 사회교과서로 다시 공부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른바 ‘교과서의 단절 현상‘이다. 이 현상이 가장 강한 곳이 우리나라다. 학교와 사회가 단절되어 있어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사회화의 첫 과정은 줄서기부터 배우는 것이다. 썩은 동아줄을 잡지 않으려면 도덕책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때로는 정치교과서도 필요하다. 안면을 몰수하고 냉정해야 할 경우도 있고 기만술을 펴야 할 경우도 있다. 이처럼 줄서기는 어렵고 힘든 공부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당시 이탈리아는 자국군 대신 용병을 고용했다. 용병은 전쟁이 직업인지라 전쟁을 끝내지 않고 질질 끌기 일쑤였다. 이를 틈타 1494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공격하자 이탈리아는 이빨 빠진 호랑이마냥 대응 한번 못해봤다. 당시 로마는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자 그리스-로마의 문화유산을 지닌 학자와 기술자들이 물밀듯이 망명해 들어왔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늘 전쟁이 발발하는 혼돈의 시기였다.
혼란한 시대에서 생존의 법칙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당시 로마 시대로 돌아가 보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로마의 권력 기반을 이루는 3대 집단으로 귀족, 백성, 군인을 꼽았다. 로마 황제는 늘 원로원인 귀족과 군인들의 눈치를 보았다. 따라서 황제는 귀족과 백성, 군인 모두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정치를 펼 수 없었다. 귀족을 만족시키면 백성들과 군인들이 반기를 들었고, 군인이나 백성들에 중점을 두는 정치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군인과 백성들을 동시에 충족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백성들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좋아해 온건한 군주를 원하는 데 반해, 군인은 호전적이고 오만하고 잔인하며 탐욕스러운 황제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탐욕을 충족시키려면 당연히 희생이 뒤따랐는데 그 희생의 당사자는 대부분 백성들이었다. 황제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다룰수록 군인들의 탐욕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로마 황제들은 대부분 군사력을 지닌 군인 편을 들었다. 군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를 쓰면서 백성들의 목숨까지 내팽개치면서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면 황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제는 어느 한편으로부터 미움을 받더라도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부터는 미움을 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군인의 비위를 맞춘 황제는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황제는 비운을 맞았다. 로마 황제들조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줄’을 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세상 어떤 일도 완전히 좋기만 하거나 완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설령 좋은 의도라 해도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손자병법>에서 손자는 장수가 빠지기 쉬운 다섯 가지 실수를 제시했는데 그 중 두 가지는 “청렴결백에 집착하면 쉽사리 모욕을 당한다, 지나치게 군사를 아끼면 번거로움ㄴ에 빠진다.”고 했다. 리더라면 항상 지나친 도덕론을 경계해야 한다. 손자의 역사적 스승이었던 태공왕은 이렇게 말했다.
“유약함에도 가치가 있다. 잔인함도 존재할 가치가 있다. 낙담도 쓸모가 있다. 무용武勇도 장점이 있다.”
태공왕의 말을 되짚어보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생의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인생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게 하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절망적인 순간도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삶의 한 순간도 무의미한 일은 없다. 인생의 어느 것도 낭비가 아니다. 성공은 그러한 사소한 일들과 절망들의 합체이다. 손자의 고향에 있는 손자박물관 앞 큰 돌덩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다.” 우리는 자꾸 적을 알고 나를 알려고 한다. 먼저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도 그랬다. “너 자신을 알라”고.
“우주가 어느 한 사람을 영광되게 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은 먼저 반드시 몸과 마음, 영혼의 녹록치 않은 고난을 겼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위대한 일을 수행할 준비가 된다.”는 말이 생각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겉과 속이 다른 인간에 대한 경고다
연예인의 인기도는 당시의 시대상을 얼마만큼 제대로 반영했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현상일 수 있다. 가수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우리나라를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미국 빌보트 차트 0주 연속 2위를 차지했고, 유투브 조회수는 00000건을 넘었다. 2012년 최고의 화제작은 강남스타일이고 최고의 인기를 누린 사람은 싸이였다.
폭발적인 인기의 이면에는 모르긴 해도 거의 모든 나라에 소위 2류 문화로 상징되는 사회현상이 존재하고 있었고, 강남스타일이 이를 들추어내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이다. 강남스타일에 등장하는 싸이의 말춤은 모든 사람들이 어렸을 때 타고 놀았던 흔들 목마의 잠재된 추억과 어린이대공원에서 탔던 아름다운 회전목마의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은 말을 타고 세계를 호령했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의 알프스 정복의 역사를 떠올렸을 수도 있고, 중국인들은 광활한 대륙을 질주하며 세계를 재패하고자 다른 민족을 침탈하며 희열에 들떴을 자신들에게만 자랑스러운 문명의 추억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강남스타일의 노랫말이 현대 사회의 위선적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어 공감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겉으로는 도덕과 선으로 그럴듯하게 포장을 하지만 속으로는 비도덕과 악을 일삼는 인간들의 이중적 위장술을 보면서 필자는 마키아벨리를 떠올리게 된다. <군주론>이 500년 넘도록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읽혀지는 명품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원인은 단 하나다. 진실의 힘이다. ‘진실은 당대에서는 인정받기 어렵다‘는 격언처럼 군주론 역시 처음에는 악의 책으로 분류되어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지만 진실의 힘은 강했다. 군주론은 뛰어난 문체도 없고 난해한 부분도 없고 스토리도 없다. 진실뿐이다. 당시 정치를 도덕의 범주로 보았던 오래된 진실에 용감하게 돌을 던진 사람이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정치를 도덕과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정치가 반드시 도덕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군주라면 리더라면 경영자라면 때로는 악행도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이 아닌 조직의 번영에 한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도 경영학교과서는 윤리(도덕)경영을 우상시하고 있다. 자연인으로서의 도덕과 리더로서의 도덕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도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경영에서 도덕을 분리하라.”고. 윤리경영이라는 말도 있지만 경영은 경영이고 도덕은 도덕이다. 경영과 도덕은 상호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있다. 경영은 늘 도덕적일 수 없고, 도덕은 늘 경영의 전부가 아니다. 물론 도덕에 입각한 경영이 바람직하겠지만 그것이 성공한 사례는 별로 없다. 경영은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선으로 접근해도 상대가 악으로 맞선다면 같이 악으로 싸워야 한다. 악을 행한다고 상대를 비난하는 것은 경영자의 도리가 아니다. 경영은 개인의 보편적 사상을 표현하는 곳이 아니다. 경영은 과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말하는 것이다. 과정이 대우받는 곳은 스포츠경기 뿐이다. 기업이 망하고 나서 합리적인 과정을 이야기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경영은 도덕을 가르치는 서당이 아니다. 경영자는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다.
‘선은 참이고, 악은 거짓이다.’라는 이분법적 논리는 차치하고, 같은 빵을 두고 상대와 치열하게 싸움을 하는 경영전쟁터에서 도덕을 앞세워 승리하기는 어렵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실익이 없다. 상대가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한 마디로 말하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에 대한 결정타”였다. 겉으로는 고상한 척, 점잖은 척 하지만 실제로는 속물적이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의 진면목을 가감 없이 그대로 표출한 노랫말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바로 진실의 힘이다. 이렇게 자신의 위선적 진면목이 그대로 까발려지면 대부분의 사람은 부끄러워하거나 염치없어 하기 때문에 모험을 하지 않는다. 만약 강남스타일의 노랫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했더라면 아마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실패했을 것이다. 차별성도 진실성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가수 싸이는 자신이 2류 문화로 대별되는 체화된 몸짓으로 인간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말춤에 이를 연결시킴으로써, 말을 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안장 위에서 자신의 몸을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던 들썩거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처럼 노래를 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흔들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