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필사-김훈 <풍경과 상처>

겸재의 빛-울진 월송정·망양정

김부현(김중순) 2013. 4. 3. 11:38

겸재의 빛-울진 월송정·망양정

 

 

일몰의 빛은 바다에 닿아 죽는다.

바다를 가득 채우는 빛의 죽음은 가볍다.

빛들은 죽어서, 부재로부터 부재로 건너가는데, 그 건너가는 여정 속에서만 빛들의 삶은 빛난다. 그러나 그것들의 소멸을 죽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리라. 빛들은 피와 살의 자식이 아닌 때문이다. 일몰의 동해에서 수면에 갈린 빛들은 소멸해가는 시간의 가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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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동해에서 빛들은 산맥 너머로 빠지는 해의 고삐에서 풀려나 아비 없고 호적 없는 부랑의 무리로 떠돈다. 빛들은 개념으로부터 멀리 비켜서서 흔들린다. 빛의 가루들은 빛의 원형으로부터 바래어져 있다. 산맥을 넘어가는 시간의 바람에 그 빛들은 불려 가는데, 빛들의 표정은 바람에 쓸리워 지쳐 있다. 빛의 계면에 부딪쳐 색을 이루되, 색은 빛에 실리지 않는다. 세계의 계면에 숨은 색들은 빛에 닿아 색으로 살아나지만 저물어가는 빛들이 아주 떠나버린 후에도 색들은 죽지 않는다.

세계는 고정되지 않는다. 인간이 세계를 고정시킬 때, 그 고정의 결과물은 개념적 언어이거나 또는 카메라 뷰파인더 속의 사각형이다. 대상은 개념적 언어나 뷰파인더의 사각형을 신속히도 벗어난다. 대상은 시간 속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