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필사-김훈 <풍경과 상처>
염전의 가을-서해/오이도
김부현(김중순)
2013. 4. 3. 12:46
염전의 가을-서해/오이도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거둘 수 없는 자들의 가을은 지난여름의 부자비한 증발작용이 흰 소금의 앙금을 벌판 가득 깔아놓은 서해 남양만의 염전에서 오히려 편안하리라. 소금밭의 가을은 바래고바래서 어 이상은 증발될 것이 없는, 하염없는 말라비틀어짐의 가을이다.
세계가 세계사에 의하여, 또는 문명이나 논리에 의하여 가득 채워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썰물의 서해는 감당할 수 없이 막막한 빈 공간을 안겨다준다. (.....)
염전 벌판에는 지난여름의 졸아 붙이는 단 솥 속의 고난이 소금의 알갱이로 허옇게 말라붙어 있고, 저무는 벌판의 가장자리에 듬성듬성 들어선 검은 소금창고들은 건축물로서의 손톱만한 미학적 허세마저 모두 내버리고 단지 세월에 의하여 바래어져 가고 있다. 염전 너머의 갯벌에는 바다의 질퍽거리는 밑창이 파렴치하게 드러났고 갯벌 위로 실핏줄처럼 패어진 도랑을 따라 양수기 모터를 동력으로 삼는 0.5톤짜리 고깃배는 포구로 돌아온다.
열차 차창 밖으로, 수평선과 지평선이 이루는 협궤철로는 저무는 바다 속으로 함몰되어 있었지만, 지상의 수인선, 막차 안에서는 팔다 남은 생선 몇 마리를 싸가지고 돌아가는 사내들이 막대저울을 옆구리에 낀 채 열차 바닥에 주저앉아 졸고 있었고 역사는 없고 이정표만이 꽂혀 있는 포구마을의 간이역마다 그 사내를 마중 나온 아낙네들이 서해의 황혼에 젖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