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한국 아파트 부실공사의 대명사, 와우아파트(1970년)
“빨리빨리! 대충대충!”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건축 습성은 1970년 4월 8일 와우 아파트 1개동이 통째로 붕괴되는 엄청난 참사를 불러왔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번지 비탈지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15개동 중 5층짜리 건물 한 개 동이 폭삭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이 사고로 입주자와 보강공사를 하던 인부 70여명 중 33명이 숨지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곧바로 김현옥 시장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사회 곳곳에 만연한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의 흑역사가 시작되는 단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부실공사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
“한 부실업자의 날림공사를 묵인해준 서울시 당국의 과오로 하루 아침에 60여 명의 주민들을 생매장시킨 끔찍한 참사가 발생, 백주의 생지옥을 빚어냈다. 15세대 65명의 입주자 전원이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아파트 철근벽 속에 깔려 아비규환을 이룬 사고현장은 급거 출동한 군.경 및 시 작업인원 등 8백여 구조대원들과 생사를 확인하려고 몰려든 입주자 가족들의 울부짖음으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생지옥을 이루고 말았다.”(매일경제신문. 1970.4.8.)
시민아파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아파트 거주자들은 대부분 부유층이나 고위관료, 외국인들의 독무대였다. 서울시는 높은 인구밀도와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급아파트 대신 하류층이 거주할 수 있는 시민아파트를 대거 짓기 시작했다. 초대 부산직할시장 시절 산복도로와 시민아파트를 많이 지어 ‘불도저’로 불렸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1966년 취임하면서 시민아파트 건설은 가속화됐다. 서울 곳곳의 판잣집을 헐고 3년간 2,000동, 9만 호를 짓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이에 1969년 무질서한 판자촌의 불량함을 제거하고, 또 환경파괴나 불법점거와 같은 저질 주택단지를 없애기 위해 먼저 와우시민아파트 건립을 추진한다. 와우지구에 건설되던 시민아파트는 당시 가파른 산중턱에 위치했는데 ‘왜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짓냐!’는 질문에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한 답변이 유명하다. “야 이 ○○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당시 뇌물을 써서 이 공사를 따냈기 때문에 시공업체가 자금이 부족했다. 기둥 하나에 19mm 철근을 70개씩 박아야 했으나 5개만 박아 넣으면서 꼼수를 부렸다. 여기에 시멘트가 아니라 모래와 자갈 반죽을 이용했다. 소문에 의하면 모래는 바다 모래를 퍼와 섞었다고도 한다. 또 지반공사 없이 암반이 아닌 부토 위에 바로 아파트 기둥을 세웠다. 겨울에는 땅이 얼었기 때문에 겨우 버텼지만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자 내구도가 약해진 건축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면서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인사이트코리아>(2019.3.20.)
지금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당시 기공식부터 완공까지 6개월이라는 공기 단축이 결국 부실공사라는 화근이 되었다. 가파른 산 중턱에 무면허 건설업자가 아파트를 얼렁뚱땅 지은 것이다. 이렇게 무리수를 둔 이유는 당시 김현옥 시장이 자신의 업적을 대통령에게 잘 보이도록 아부하기 위함이었다. 완성 후 입주일 당일 총 16개 동 중 14동과 15동에서 중대 하자가 나타났다.
땅이 솟아올라 문이 열리지 않고, 불량 시멘트를 사용하여 비가 새어 들어오고, 유리 창틀이 맞지 않아 찬바람이 숭숭 들어올 뿐만 아니라 위층 화장실의 오물이 아래층 천정으로 흘러내리고 급기야는 건물이 흔들리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15동을 제외한 모든 주민들을 대피시킨 뒤 즉시 보수에 들어갔으나 그 과정에서 15동 주민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공사를 한 것이 문제였다. 지금도 와우아파트는 우리나라 빨리빨리 문화의 흑역사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