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다시 읽고 깊이 읽기-제로니머스의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 먹는가>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개인의 건강을 무너뜨린다...
평소처럼 <부산일보>를 보다가 눈을 사로잡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 먹는가>라는 책 제목보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개인의 건강을 무너뜨린다"는 기자의 카피 문구가 더 강렬하게 와닿았다.
우리는 오늘도 건강관리에 진심이다. 좋은 공기를 마시고,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고, 먼 길을 마다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다. 그러나 책은 말한다. "우리의 건강은 단지 개인의 몸에 좋은 음식, 생활 습관, 유전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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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
차별·편견의 신체에 대한 악영향 설명
소외 집단일수록 노화·질병에 더 취약
성공한 흑인도 사망률 백인보다 높아
저속 노화’ ‘가속 노화’라는 전에 없던 말이 화제다. 혈당을 급격히 높이지 않는 식단, 근육량을 늘리는 규칙적인 운동이 노화를 늦추는 이른바 저속 노화의 비법으로 자주 거론된다. 반면 초가공식품이나 정제 탄수화물을 즐겨 먹고,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등 활동량이 적은 생활 방식은 노화를 가속화하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의 ‘건강 격차’는 단순히 이런 생활 습관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의 저자 알린 T. 제로니머스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는 이 책에서 불공정한 사회가 주는 스트레스가 노화를 촉진해 건강과 수명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생활 습관이나 운동 여부, 유전 등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인식돼 온 건강 문제에 차별, 불평등, 편견, 배제와 소외라는 새로운 변수를 제시한다.
그가 고안한 ‘웨더링’(weathering)은 사회의 구조적 억압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마모, 침식, 풍화 작용을 뜻하는 웨더링은 인종, 민족, 종교, 계급, 성별, 성 정체성 등에 따른 차별, 편견에 의한 반복적인 스트레스가 건강에 끼치는 악영향을 의미한다. 40년 가까이 공공보건학자로 일한 저자는 부정의한 사회가 개인의 건강을 서서히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입증한다. 불평등에 의한 은밀하고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건강을 서서히 갉아먹는 과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예컨대 만성 염증은 소외 집단의 구성원들에게서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고, 조기 사망의 이유가 되는 여러 질병의 발병에 관여한다. 당뇨, 자가면역질환, 암, 고혈압 등이 스트레스와 만성 염증의 결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외 계층이 단순히 피자를 더 많이 먹고, TV를 더 보고, 몸을 덜 움직인 결과로 건강이 나빠진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특권 집단과 비교했을 때 소외 집단은 가속 노화, 만성 노인성 질환의 조기 발병, 면역체계 약화, 기대수명 단축에 더 취약하다.
대표적 빈민가로 꼽히는 미국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 이곳의 35세 흑인 남성의 장애(건강 이상이 적어도 6개월 동안 지속돼 노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체 기능이 제약된 상태) 비율(26%)은 그보다 20세 많은 55세 미국 백인 남성의 평균적 장애 비율(24%)과 비슷하다. 이 지역에 사는 흑인 청년이 50세가 될 무렵까지 살아있거나 신체가 멀쩡할 거라고 기대할 확률은 약 5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 사회적으로 성공한 흑인 가운데 만성질환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같은 조건의 백인에 비해 많다는 저자의 보고도 눈길을 끈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건강과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소가 아니란 걸 시사하기 때문이다. 장기간 관찰과 연구 결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 성공을 위해 자신을 갈아 넣을 때 그 스트레스가 신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 역시 웨더링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멕시코 이민자와 그들의 자녀는 교육을 더 많이 받고 소득이 더 증가해도 건강에 대한 부정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히려 더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해, 학력과 소득이 높은 사람들의 집단으로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스트레스가 생리적, 심리적 타격을 주는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이처럼 웨더링은 성공한 사람도 피해갈 수 없는데, 저자가 그 대표적 사례로 꼽은 사람이 스포츠 스타 세리나 윌리엄스다. 당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였던 그 역시 출산 직후 혈전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적 대우 탓에 흑인 산모는 백인 산모보다 출산 중 사망률이 3배나 높은 것으로 보고되는데, 세리나 윌리엄스도 이런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는 혈전이 생겼던 병력이 있었기에 의료진에게 CT 스캔을 요구했지만, 의사는 다리 초음파 검사를 하는 데 그친다. 그가 끈질기게 CT 검사 필요성을 주장한 끝에 마침내 폐에 박힌 혈전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만약 그보다 덜 유명하고 덜 부유하고 덜 끈질긴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까. 저자는 죽음에 이르렀을 가능성마저 제기한다.
다만, 저자는 은밀한 불평등이 유발하는 건강 격차에 대한 대책까지는 속시원하게 내놓지 못한다. 공공보건 과학과 정책 개편 필요성 등을 제기하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앞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 나가야 할 과제다. -<부산일보>, 2025.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