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게 길을 묻다
러시아의 한 마을에 <파흠>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논밭을 넉넉히 가지고 있었지만 더 가지고 싶은 욕심이 왕성하여서 누가 '땅'이라는 말만 들먹여도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나그네로부터 기가 막힌 정보를 입수했는데 적은 돈으로도 많은 땅을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파흠은 당장 서둘러서 그 곳을 향해 길을 떠났다.
드디어 땅을 마음대로 골라서 살 수 있다는 바슈키르에 당도하였다.
여기 사람들은 멍청하게도 무한히 넓은 땅의 한 귀퉁이에서 작은 오두막을 짓고 조용히 살고 있었다.
땅을 누가 더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일도 없었으며 그저 서로 마음 놓고 소와 양을 키우면서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파흠은 촌장을 찾아가가서 말했다.
"저는 땅을 사기 위해 왔는데 땅값은 얼마인지요?"
"하루에 1천루불 입니다."
파흠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물었다.
"하루라는 것은 몇 평인지요?"
"우리는 그런 셈은 잘 모릅니다. 다만 당신이 하루 동안 걸어 다닌 땅은 모두 당신의 것으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파흠은 신이 났다.
하루 동안 걸어 다닌 땅을 1천루불에 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횡재인가 말이다.
촌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해가 뜰 때 걷기 시작해서 해가 지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물론 당신이 걸어간 곳에 표시를 해 두어야 하고요.
만일 당신이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지 못하면 당신에게는 땅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파흠은 얼씨구나 하고 1천루불을 지불하고는 해가 뜨자마자 부리나케 걸었다.
시간이 아까워서 밥도, 물도 걸으면서 먹었다.
물론 잠시도 쉬지 않았다.
정오가 되었으나 파흠은 더 좋은 땅이 자꾸만 나타났기 때문에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어느 덧 해가 서쪽으로 제법 기울었다.
그제야 파흠은 허겁지겁 삽으로 표시를 한 다음 돌아오기 시작했으나 뛰어도 뛰어도 출발했던 지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야 이 땅이 모두 내 차지가 되는데..."
입에서는 단내가 났고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파흠은 간신히 해가 지평선에 넘어갈 무렵에 출발점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서 영영 다시 일어나지를 못했다.
바슈키르 사람들은 파흠의 시체를 그 곳에 묻어 주었다.
그가 차지한 땅은 겨우 한 평이 조금 넘을까말까 한 넓이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이야기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의 줄거리다.
-<우리나라 최서남단 가거도, 백년등대>
우리 주위에도 한국판 파흠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는 비단 땅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자신의 능력이나 경제적 수준 등을 뛰어넘어 과도하게 과욕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꿈에 대한 욕심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나 물질적인 면보다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능력, 행동, 습관 등을 변화시키는 데 대한 욕심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도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말이 있다.
'과욕이 고통을 부르니 도로써 그것을 멸하라'는 뜻이다.
자신의 과욕을 마음으로 잘 다스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데도 지나치게 눈에 보이는 것들에 과욕을 부리고, 정작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과 정신은 뒷전이었다.
돈은 없다가도 생기지만, 한 번 뒤틀린 마음은 다시 치유하기 어렵다.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죽기 살기로 일한 덕분에, 먹고 사는 것은 훨씬 수월해 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꾹 참고 있던 "정신과 마음"이 이의제기를 하고 나섰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처한 작금의 상황은 경제적인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동안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선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마음을 즐겁게 하는데는 등한시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국민소득 2만불!'
이것은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가늠자다.
2만불은 일을 열심히 하고, 경제적인 측면에만 집중해도 가능하다.
하지만 2만불을 넘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경제적 측면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렵다.
인문, 철학과 같은 기초공부, 즉 각자의 마음공부가 뒤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마음공부는 도를 닦는 도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들 '마음공부' 하면 오히려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되묻곤 한다.
굳이 할 필요도 없고, 또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착각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어느 단계를 뛰어넘으려면 변화가 아닌 변혁이 필요하다.
변화는 지금의 상황을 조금씩 업그레이드 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변혁은 변화에 대한 혁명이다. 일거에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이다.
기존의 경험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존의 그림에 덧칠하려는 얕은 수작을 부려서는 안 된다.
산업화 시대의 산물인 '근면, 성실'이라는 화두로 지금의 지식정보화 사회에 당당하게 맞서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 변혁의 가장 밑바닥이자 출발점은 이른바 각자의 '마음공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지금보다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최근 미국의 다국적 여론조사기관(NOP World)이 각국 인쇄매체 접촉시간을 조사, 발표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조사대상 30개 국가 중 우리나라는 당당하게도(?) 꼴찌였다. 30등이었다.
물론 이 조사는, '독서량'이 아닌, '인쇄매체 접촉시간'을 조사한 것이기에 인터넷이나 영상 환경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낮게 나타난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국가별 통계와도 그렇게 큰 편차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규모 세계 11위",
물론 대단한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라고도 할 만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 기적의 유혹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이 기적은 과거에 대한 기적이지 미래의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경제규모 세계 11위"보다 "독서량 세계 11위"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책이 밥 먹여 주냐?"는 옛말은 "책이 밥 먹여 준다."로 바뀌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들을 '경제규모 세계 11위'와 같은 것들로 덮을 수는 없다.
물론 독서량이 절대적인 비교우위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책을 무시(?)하는 나라에서 감히 선진국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거리에 나가면 휘황찬란한 술집이 가장 많이 눈에 뛰는 나라에서 선진국을 말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밤만 되면 흥청망청인 나라에서 선진국을 말하는 것은 선진국에 대한 모독이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또다시 폐기처분한 것으로만 알았던 소위 '이념논쟁'으로 이념의 양극화가 극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른바 양극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화두가 되었다.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부자와 가난한 자, 취업자와 실직자, 명품과 하품.....
일반적으로 '문제'는 응당 그에 대한 답이 있고 해결책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작금의 양극화에 대해서는 해결책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다.
이념논쟁 역시 우리가 그동안 먹고 사는 데 신경을 쓴 나머지 학교나 사회에서 이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가 이념논쟁이다.
이념논쟁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빚어진다.
오직 니 편과 내 편만이 있을 뿐, 다른 편은 없다는 식이다.
그간 민주주의는 지하방에서 숨어서 하는 것으로 알았다.
마음보다는 길거리에서 몸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케케묵은 이념논쟁은 마음공부를 등한시 한 데 대한 우리 사회 전체의 전염병이자 돌림병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율 1위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고, 또 제대로 배우지 못한 데 대한 혹독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따라서 지역이나 종교, 혈연, 학연 등으로 끈을 만들어 분명한 목적의식이나 가치관 없이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린다.
"돈, 학벌 대물림, 카스트 시대 도래"라는 머니투데이의 기사가 하루 종일 인터넷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카스트는 원래 과거 인도의 3계층 신분제도였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돈(경제적 자본), 교육(문화적 자본), 인맥(사회적 자본)'이 대물림되는 3개의 계층구조가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같은 현대판 신데렐라의 사랑은 이제는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결혼도 조건이 맞아야 한다. 어떤 이는 사돈도 골프는 필수라고 한다.
이는 비단 우리 사회에만 있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80:20은 쓰레기통에 들어간지 이미 오래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95:5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더 나아가 99:1의 극단적인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지금 5%에 들지 못했다고 자포자기할 일은 아니다.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아무리 부가 대물림 된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입지전적인 꿈을 이룬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개인적으로 정말 특별한 몇 몇을 제외하고, 부는 절대 대물림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물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설령 대물림된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부모와 사회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보다는 차라리 힘은 들겠지만, 내 자신이 꿈을 펼쳐 5% 범주 속으로 들어가 보겠노라는 결단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출발점은 입이 아니라 행동이다.
가던 길이 막히면 자신의 꿈에게 길을 물어보자.
Go, Ahead! To Your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