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새로운 꿈은 없다
옛날 어느 만석꾼의 이야기다.
이 만석꾼은 자신의 며느리를 시험 을 쳐서 뽑는다는 새로운 광고를 냈다.
지정된 장소에서 쌀 한말을 가지고 노비와 둘이서 한 달을 살면 신분, 미, 지방색을 가리지 않고 며느리로 삼을 거라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예나 이제나 규수들의 꿈인즉 큰 부잣집 며느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보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응모하는 규수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가는 데마다 얘깃거리는 신데렐라 탄생에 대한 기대와 선망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가고 반 년, 일 년이 지나도 만석꾼 며느리가 뽑혔다는 소식이 없고 보니 사람들은 만석꾼을 씹기 시작한다. '
밥 많이 먹는 며느리가 들어올까 봐 그런 시험문제를 낸 게 아니겠느냐며 그의 인색함을 탓한다.
그간의 경위를 보면 그런 소리가 나올 만 했다.
시험에 든 규수들은 하루 두 끼 죽으로 한 달을 연명할 요량으로 쌀 한말을 예순 개의 봉지에 나눠 담아두고, 멀건 죽을 쑤어 노비와 둘이서 끼니를 때운다.
처음 며칠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너나없이 굶주림 참기 시험에 참가했다고 생각하는 터여서, 움직이면 배 꺼질세라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앉아있자니 떠오르는 것은 먹을 것뿐일 터, 그 또한 아귀지옥이 아니겠는가.
규수들은 대개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초주검이 되어 기어 나가거나 업혀 나갔다.
응모한 규수 열이면 열이 모두 비슷한 방법으로 굶고 견디기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보니, 만석꾼이 인색한 자린고비라는 욕을 먹는 게 당연할 터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는가.
시간이 지나자 응모하는 규수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안방마님은 삼대독자 총각귀신 만들게 되었다며 머리를 싸매고 눕지만 만석꾼은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그럭저럭 삼년이 지난 어느 날 이웃마을의 가난한 대장간 집 딸이 며느리 뽑기에 응시한다.
지정된 장소에 든 대장간 집 딸은 쌀 한말을 들고 나타난 노비에게 쌀 반말은 쇠고기로 바꿔오라며 쌀밥에 쇠고기 국으로 배불리 먹어보자 한다.
노비는 덕분에 쌀밥에 쇠고기 국을 포식하면서도 대장간 집 딸의 속셈을 몰라 은근히 궁금해진다.
그때였다.
"나가서 일감 좀 얻어올래? 배 불리 먹었겠다, 놀면 뭐하니. 젊은 것 둘이서 열심히 일하면 설마 배곯겠니."
어느 날 만석꾼은 달려온 청지기로부터 대장간 집 딸이 시험에든지 한 달이 되었다는 기별을 받고 깜짝 놀란다.
그 규수도 벌써 업혀 나갔을 것으로 알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지기를 따라 달려간 만석꾼은 또 한 번 놀란다.
초가삼간에 부티가 흐르고 윤기가 나는데다 부엌을 들여다보니 크고 작은 항아리마다 곡식이 소복하게 담겨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도란도란 얘기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안에 보이는 노비는 뽀얗게 살이 올라 인물이 달덩이 같지 않은가.
그때 만석꾼은 보았다.
노비와 담소를 나누며 열심히 삯바느질을 하고 있는 의젓한 자태의 대장간 집 딸을...
아니 만석꾼 댁의 며느릿감을...
물론 만석꾼이 이런 식으로 며느리를 뽑기로 한 것은 밥통 큰 며느리가 들어올까 봐 겁을 내서가 아니었다.
쌀 한말을 밑천으로 하여 살 길을 열 줄 아는 지혜롭고 사려 깊은 며느리를 원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만석 재물을 밑천으로 할 때 이루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 '발상의 대전환'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이른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비법, 새로운 것을 만드는 비법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농담삼아 그 비법은 책에게 물어보라는 것이 나의 한결같은 답이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꿈은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데 비법이 달리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있는 것에서 시각의 새로움, 해석의 새로움, 발상의 대전환에서 비법이 나타나고, 새로운 꿈도 태어나고 이루어지는 것일테다.
단번에 거창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준비만 하고 있기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지금 주어져 있는 것에서 조금만 생각을 다르게 해보고, 조금만 다르게 행동해 보자. <한강 야경>
그것이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단초가 될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는 지금의 것에서 새롭게 만들어 보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달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