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산행기/중부지역

한강에 들다

김부현(김중순) 2009. 2. 14. 17:58

2009.2.14(토) 한강에 들다

 

전 국토가 타들어가는 듯한 겨울 가뭄에 허덕였다. 특히 강원 산간지역과 일부 남부지역에는 마실물조차 없어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받고 있던터라 어제 전국적으로 내린 비는 단비 중의 단비였다. 서울도 30mm정도의 비가 내렸다. 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바람 피해도 있었다고 한다.

 

며칠 전 경남 창녕에서 화왕산 억새태우기 도중 4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비가 며칠만 일찍 왔더라면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해 본다. 비가 내리는 풍경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된 하루였다. 그 어떤 것도 넘쳐서도 모자라서도 안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문득 비와 가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세상이 온통 비로 범벅이 되는 동안 과거의 메말랐던 시간들은 금새 흐릿해져만 갔다. 비 내리는 저 빌딩 뒤에서 가슴 저 밑에 묻어둔 그리움들이 깊은 숨을 내쉬며 하늘을 향해 다가선다.

 

누구에게나 허허로운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 추억에 닿으면 삶의 시계가 되돌려진다. 가뭄과 해갈을 이어주는 단비처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빌딩숲을 걷는다. 언젠가 걸어보고 싶은 그 길들을 대신해서... 갑자기 그쳤던 비가 후둑 후둑 내렸다. 신사역을 지나 논현역 근처 영동시장에 도착했다. 간절히 원했던 비였지만 바람과 함께하는 짓거리가 달갑지는 않았다. 발걸음이 바빠졌다. 요란하던 비는 금새 그쳤다. 천천히 걸었다. 바쁜 속도전에 잠시 벗어난 천천히 걷기가 마음까지 여유롭게 해 주지는 못했다. 부족한 마음에도 끊임없이 가지려고만 발버퉁쳐 왔던 시간들... 그 시간들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하늘을 보았다. 대낮부터 어둡던 하늘이 더욱 깊은 어둠에 빠져 있었다. 신호등을 건너 시장어귀에 다다랐다. 자주 찾는 시장은 비가오나 눈이오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떡국으로 저녁을 먹고 주말 산행을 위한 간식거리로 땅콩이랑 사과랑 약밥을 샀다. 어는둠이 내리는 시간은 나에게 마음을 무중력 상태로 만드는 시간이다. 머리를 텅 비우는 시간이다.

 

비우려 하지만 때론 힘겨움과 지쳐감이 온몸을 친친 감아올 때도 있다. 지금이 그때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알멩이를 모두 내주고 난 뒤 텅빈 모습으로 남는 것처럼 알알하다. 그동안 내 마음, 언제 한 번이라도 지금처럼 차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까만 봉지를 양손에 몇 개 들고 왔던 길을 재촉한다. 욕심을 부리면 보이지 않는 게 욕심을 버리면 보인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 욕심을 내려놓음이 쉽지가 않다. 욕심은 평생 짐이요 엄숙한 굴레일 뿐인데도 말이다. 세상사 마음 먹은데로 되지 않는 게 어디 이 뿐이랴.

 

분주한 길 한켠에서 조용함이 내린다.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내 삶의 일부를 되돌릴 수 있을라나. 마음의 문을 지나면 시끄러움과 마주할 수 있을라나. 신사역 사거리다. 언제나 속도전을 대변해 주는 곳이다. 오직 바쁜 사람들만 함께 할 수 있는 성지 같은 곳이다. 그런 곳에서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그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거추장꾼에 불과하다. 억눌린 삶도 파란만장한 시간도 모두 사라져버린 것 같은 곳, 신사역.. 그 바쁜 신사역에 언쯤이면 느림이 자리할 수 있을른지. 실타래 같은 분주함을 엮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가시밭길을 달려왔는가. 쓰기만 하면 누구라도 신화같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펼쳐내는 게 우리의 인생 아닌른지.

 

아지터로 돌아와 거추장스런 거죽들을 벗겨내고 세수를 했다. 거울을 보니 마음만큼이나 얼굴도 가난해져 보였다. 길지 않은 인생 그림자처럼 살아온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눈물 흘리지 않아도 충분히 슬픈만큼, 살아온 삶들은 모두 엇비슷하다. 대충 채비를 하여 한강을 찾았다. 신사동 가로수 길엔 주말이라 그런지 인파로 넘쳐났다. 활기참을 뒤로하고 한강 잠원지구에 도착했다.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변하는 건 오직 사람이요, 사람의 마음뿐인 것을...  

 

-사진 : 한강잠원지구 River City 전경(2009.2.14. 18:30)

 

어둠이 쫓아올 무렵, 한강의 야경을 카메라에 담아 봤다. 힘겨움과 편안함의 경계지점이 곧 강이다. 밝음과 어둠의 중간지점이 곧 강이다. 강은 굴곡 많은 물길을 지나 바다와 만난다. 언제쯤이면 강은 그의 참모습을 알려줄까. 서러운 이들이 찾아와 토해 놓은 설움들이 모여 강도 저리 슬프게 보이는 걸까. 강물이 흘러간 자리가 아무리 허전해도 우리 인간이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고개를 들기로 다짐해 본다. 땅을 보지 말자고... 하늘을 보자고... 어제를 보지말고 내일을 보자고.... 다짐해 본다.

 

내일부터라도 하늘을 보자. 그리고 웃자. 아니 지금 당장, 하하하.... 잿빛 도시에서의 삶들은 각자 다른듯 하지만 따져보면 비슷비슷한 삶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제 아무리 비슷비슷한 삶을 강물에서 건져 올려도 그 무게는 모두 다를 것이다. 아무 의심없이 몸과 마음이 따로 있지 않아 흘러가는 대로 그저 흐르게 내버려 두는 삶, 빈곤하면 빈곤한대로 풍성하면 풍성한 대로 결과를 나누는 삶, 얼마를 더 가야 그런 삶이 가능할까.

 

특별한 이유 없이도 자주 한강나들이를 하는 이유는 마음이 그립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말을 나눌 벗도 없다. 강둑에 앉았다. 큰 강줄기는 소리없이, 불평없이 흐른다. 조그마한 일로 시끄럽게 했던 자신이 작게만 느껴졌다. 상상은 벌써 고향으로 가 있다. 어쩌다보니 나고 자란 곳이 첩첩산중 가야산 자락 산골 마을, 마을도 산을 닮은 것일까. 한결같이 정겹고 소박한 곳이다. 지금도 삼십여 호가 둥지를 틀고 있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아무도 만나지 못할 때도 있다. 인기척이 뜸하다보니 조그만 인기척도 반갑기만 한 그런 마을이다. 산골을 떠난 지 30여년, 산골보다 갑절이상 오래 도시에서 살았지만 산골의 향수가 더욱 짙게 다가온다. 산과 강은 자석처럼 뗄레야 뗄수가 없을 것만 같다. 서로를 보듬으며, 쓰다듬으며 긴 여행을 함께하는 친구 같다.

 

동호대교를 지나 여의도 방향으로 강 길을 따라 걸었다. 자동차로 스치며 보았던 풍경과 발로 꾹꾹 찍으며 보는 풍경은 적잖이 달랐다. 소담스런 갈대밭이 눈에 들어온다.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은 갈대지만 늘 그 자리에서 강을 지키고 있다. 저절로 마음속으로 기원하게 되는 강가에 서면 정작 가르침을 준 것은 사람이 아닌 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둠이 짙어지면 아침이 되듯 그리움도 짙어지면 공기처럼 가벼워질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모난 마음이 둥그렇게 무뎌질 수 있을까. 자식에게 평생을 바치며 모든 것을 내어준 부모처럼 강도 모든 것을 묵묵히 내어 놓는다.

 

강 밖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것들로 넘쳐나는 한강...

이 강에서의 시간은 외롭지만 풍요롭다.

겨울이지만 비 그친 저녁은 오히려 선선하게 느껴진다.

도시의 찌든 때를 일거에 씻어내는 그 마력이 신기할 뿐이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추워진다고 한다.

 

오늘 밤엔 추위를 안아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