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헐렁한 군주론

인문학큐레이터의 <헐렁한 군주론>-상식을 따르되 상식을 배반하라

김부현(김중순) 2013. 4. 2. 17:32

상식을 따르되 상식을 배반하라

 

기업경영의 화두로 떠오른 ‘선택과 집중’은 경영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손자병법이나 한비자, 클라우제비츠의 군사전략에서 처음 만들어 낸 말도 아니다. 그 원조는 자연이다. 선택과 집중은 생존과 확장의 본연이다.

동물학자들에 따르면, 늑대들도 사냥을 할 때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편다고 한다. 먹잇감에 대한 늑대들의 전략은 주도면밀하다. 오랜 관찰을 통해 하나의 목표물을 정하면 아주 세세한 정보까지 파악한다. 먹잇감의 습관이나 행동거지 등을 신기할 정도로 자세하게 지켜본다. 늑대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쫓거나 대책 없이 뒤쫓아 가지 않는다. 무리하게 쫓다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지 않는다. 늑대들은 어린새끼나 나이든 녀석들을 쫓다가 무리를 이탈하는 한 놈에게 집중한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경영학자이자 ‘유럽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헤르만 지몬 교수는 20년간 동안 조사하고 연구한 방대한 자료를 <숨은 강자들 Hidden champions>이라는 책으로 내놓았다. 세계 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독일 중소기업의 성공비결을 분석하였다. 이 책에 나오는 강자들은 자신이 속한 산업에서 60~80%라는 경이적인 세계 시장점유율을 갖고 있는 기업들이었다. 그 아래 경쟁사들보다 4~5배 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그야말로 숨은 챔피언들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히든챔피언은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기업들이다. 그가 꼽은 히든 챔피언들의 명부에는 고속 담배제조기 회사 하우니(Hauni), 관상용 물고기 사료업체 테트라(Tetra), 자동차의 개폐식 지붕과 전차·선박 등의 보조 난방장치를 만드는 베바스토 등이 올라있다. 그러나 이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단 이들의 제품이 대부분 제조공정에서 사용되거나 완성품의 부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론 대부분의 학자와 애널리스트, 언론이 대기업이나 초대형 기업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독일의 500개 히든 챔피언들은 1993년 한해에만 333억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고, 20만개의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경기가 나빠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할 때도 이들은 견고한 성장세를 보여줬다.

히든챔피언들은 상식의 길을 따르되, 상식을 배반한다. 그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면서도, 대기업으로 규모를 키우는 데는 소극적이다. 얼핏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런 전략이 먹혀든 것은 시장을 재해석해낸 그들의 능력 때문이다. “우리는 소시장에서 큰 기업이 되고 싶다”는 게 히든 챔피언들의 모토다.

우선 거론되는 것은 경영권의 안정이다. 대부분 가족기업 형태인 히든 챔피언들의 경영자들은 평균 20년 이상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외주를 주지 않고 자체 제작하는 부품의 비율이 평균 57%가 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툭하면 비용절감, 규모의 경제 운운하며 하청, 아웃소싱에 집중하는 우리나라 CEO들에게 전하는 엄중한 경고다.

<숨은 강자들>은 중소기업 경영자를 위한 실전 지침서다. 비록 쇠를 깎고 플라스틱을 뽑아내는 전통제조업 기업들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시장을 해석하고 고객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의 방법론은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관료화된 조직 행태의 한계를 물리치기 위해 고심하는 대기업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예컨대 GE의 항공기 엔진 부문 분사처럼 거대한 조직을 히든챔피언들로 분할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지만 필자는 모든 중소기업은 독일로 통한다고 말하고 싶다.

몇 년 전까지도 세계에서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독일이었다. 국가 브랜드는 물론 경제규모 분야에서도 독보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세계의 경찰’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는 최대강국 미국도, 타국으로부터 ‘경제적 동물’이라는 시기 섞인 조소를 당할 만큼 빠르게 성장해온 경제대국 일본도,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세계 최대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강성대국 중국도, 수출에서는 독일에게 뒤쳐진다.

지몬 교수는 2006년 가을 삼성전자 초정으로 방한한 적이 있었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었다.

“책을 출간한 지 10년이 지났으니 숨은 강자들도, 강자들의 특징도 많이 변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무엇이 그 첫 번째 특징입니까?”

그는 곧바로 ‘NO’라고 답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명확하고 야심찬 목표는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헤매지 않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세계는 평평하다>를 쓴 토마스 L. 프리드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세계는 넓어지고 평평해지고 있다. 평평하고 넓어질수록 지도와 나침반이 더 필요하다. 목적도 중요하지만 방향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몬 교수는 인터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히든 챔피언의 성공비결을 두 마디로 압축하면 집중화(focus)와 세계화(globalization) 전략이다. 히든 챔피언들은 세계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분명하게 내걸고, 시장을 좁게 정의 내린다. 가령 ‘빈터할터 가스트로놈’이라는 식기 세척기 회사는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식기 세척기로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작은 회사일수록 연구개발비도 빠듯하다.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혁신을 통해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할 수 있다. 강력한 선도자가 있으면 경쟁을 피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도 있다. 오토바이 헬멧 분야에서는 한국의 ‘홍진HJC’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한다. 그러자 ‘포크’라는 스웨덴 회사는 ‘홍진HJC’와 경쟁하는 대신 스키 헬멧이라는 틈새시장을 개척, 현재 이 분야 1위를 달리고 있다.”

히든 챔피언 ‘카르고불’의 CEO인 슈미츠도 “1990년대 생존의 위협을 받은 우리는 품목의 90%를 줄이고, 오로지 4가지 기본 모델들만 생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포기를 통한 성장’이 바로 당시 우리 구호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경영자들에게 ‘포기를 통한 성장’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진 것을 버리지 않고 다시 쥘 수는 없다. 버려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