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산행기/중부지역

북한산, 길을 묻다

김부현(김중순) 2009. 2. 16. 21:11

 

2009.2.15(일) 북한산 나들이

 

시계를 봤다. 12시 30분, 어느새 북한산 비봉이다. 능선에는 어젯밤 내린 눈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봉우리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는 북한산에서는 보이는 것은 하늘이요, 서울 그 자체였다. 세계적으로도 흔하지 않은 대도심에 위치한 산, 북한산을 빼고 서울을 말하기는 어렵다. 한없이 이어진 길 위, 산객들의 발자국엔 그리움이 가득 묻어난다. 삶의 힘든 고비마다 많은 이들이 서러움과 힘겨움을 모두 토해 놓고 가도 모두 받아들이는 산이다. 바람처럼 떠돌던 마음이 누군가를 만나 화려한 들꽃처럼 피어나는 곳이 바로 산이다.

 

산에서는 모두들 저마다의 추억을 배낭에 담기에 바쁘다. 서울에 온 이후로 줄곧 사무실에서 가까운 청계산을 다녔다. 2년여간 틈틈이 청계산은 48번 정도를 오르내렸다. 청계산은 "옛골-이수봉-망경대-매봉-진달래능선-원터골"코스를 주로 다녔다. 그러던 중 지난 11월경부터 북한산을 찾기 시작했다. 오늘이 13번째 나들이다. "지하철 불광역-족두리봉-비봉-문수봉-대남문-구기터널" 코스를 주로 다녔다. 오늘은 비봉에서 구기터널로 내려갈 참이다. 북한산은 주말이면 날씨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날씨가 쌀쌀하고 바람이 불어도 산행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특히 능선에는 바람살이 세찼다. 봉우리 곳곳에는 간밤에 흩뿌린 눈의 흔적들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비봉에서 본 서울과 일산은 망원경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세월 따라 도시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변한 것은 도시만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변했으리라. 하지만 바람부는 산정에서 본 서울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흐르고 머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진대 무엇이 남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산이란 현재에 충실한 것이다. 산을 대하는 순간만큼은 일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친다. 하지만 말없이 지나쳐도 스쳐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산 능선에서 지나온 추억을 더듬으며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아직 나에게 놓여있는 삶의 무게가 힘겹기만하다. 남은 생애 동안 나는 또 어떤 추억들을 저 도시에서 만들어 갈 것인가. 비봉에서 잠시 쉬고 있으려니 추위와 바람이 그냥 쉬게 가만두질 않았다. 서둘러 승가사로 향했다. 승가사는 신라 경덕왕 15년에 지어진 사찰이다. 웅장한 12층 석탑이 의미를 더해주는 사찰이다. 비구승들만 수도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승가사를 둘러본 후, 승가사 앞 약수터로 향했다. 약수터는 오가는 산객들에게 늘 인기 만점이다. 약숫물이 온몸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바쁜 게 없는 난 또 햇살 좋은 약수터 옆에 진을 치고 앉았다.

 

겨울산에 부는 바람은 마치 나만 모르는 비밀을 승가사로 전해주듯 속닥거렸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 벅차게 다가왔다. 모두들 나만큼의 삶의 무게들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위안을 해 보지만, 삶의 희망을 비추는 등대불은 여전히 희미하다. 어찌 보면 삶은 끝내 손에 쥘 수 없는 바람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상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무작정 오르는 산, 얼마를 더 오르내려야 산은 내게 답을 줄까? 모든 것이 변하고 그만큼 변덕스런 사람들이 산을 찾는 동안 산은 또 얼마나 말없이 아픔을 겪어 왔을까?

 

고개 들어 천천히 하늘을 본다. 구름과 바람과 햇살이 나를 아우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머뭇거리는 것이다. 머뭇거림은 망설인다는 것이다. 망설인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망설이면서 시간을 소비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승가사에서 내려오는 계곡은 여름 장마철처럼 계곡물이 흘러 내렸다. 물속의 피라미들도 모처럼 사람을 반긴다. 그들도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엊그제 내린 비가 바짝 말랐던 계곡을 적셨다. 간만에 들어보는 계곡물 소리가 참으로 정겹게 느껴졌다.

 

산은 나에게는 삶의 터전 같은 곳이다. 산에 들면 슬픔도 거친 마음도 산속에 묻혀 버린다. 일상을 마치 전사처럼 살아온 나에게 내려놓음을 가르쳐 준다. 대체 산의 품속은 얼마나 넓고 따뜻하기에 나의 노여움을 가득 품어 전부 안아주는 것일까? 사람은 한 평생 엉킨 그물의 실타래와 같은 삶을 풀어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세상을 넉넉함으로 바라볼 줄 아는 때가 되면 산은 내게 그만오라고 얘기해 줄까? 잿빛 도시에서 그 어떤 말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도 산이라는 품속으로 흘러 들어가면 금새 치유가 된다. 이 모든 것이 오직 비상하는 것만을 꿈꾸어 온 탓인가?

 

내가 즐겨 찾는 순두부집에 도착했다. 점심으로는 조금 늦은 시각인 14시인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다시 불광역을 거쳐 아지터로돌아온 시간은 15:30분 이었다. 흐린 하늘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때 아닌 찬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일기예보처럼 아마 내일은 기온이 뚝 떨어져 추울 것 같다.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또 어둠이 찾아든다. 밤은 어김없이 또 나를 힘겹게 한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현실의 무게들이 점점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어둠들이 나에게 머물다 갔는가! 삶의 어디쯤이면 휘둘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말없는 물음표만 무수히 찍으며 또 어둠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다. 도시인 모두, 어둠이 와야 기진맥진한 몸을 잠시나마 뉘일 수 있다. 그러나 조용한 밤이 지나 새벽이 오면 텅빈 거리는 또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

 

봄도 머지 않았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봄도 연한 초록빛을 가지고 다가올 것이다.

봄소식에 공연히 가슴이 설렌다.

마음만은 계절을 앞선다.

봄보다 먼저 봄이 시작되는 곳은 나의 마음이다.

 

봄이 오면 마음의 무거운 집착일랑 훌러덩 벗어버리고 가볍게 짐을 꾸려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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