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도덕이 기독교를 벗어날 수 있겠소?" 기독교의 가치나 목적, 아니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의지를 벗어날 수 있겠소?" "그럴 수는 없겠지요. 물론 기독교를 벗어나서도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없진 않겠지만, 대부분 기독교 안에 있을 겁니다. 그건 기독교의 도덕을 과학에 적용해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생물학자가 단순한 믿음에 근거해 창조론을 주장한다면, 그는 훌륭한 기독교도일망정 생물학자로선 비난받을 게 틀림없지요."
"그렇소.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질 거요. 확실하지 않은 것을 의심하는 버릇이 있는 철학자들의 태도 또한 기독교로선 용납할 수 없지요. 자신이 관찰하는 대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과학자의 미덕도, 모든 것을 신의 의지 속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는 기독교에선 결코 미덕이 될 수 없지. 이처럼 기독교의 도덕은 기독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과학의 도덕은 과학을 벗어나지 못한다오. 동양에 선교하러 들어간 천주교 신부들이 잡혀 죽거나 도망 다녀야 했던 것도,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을 받고 죽을 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오. 과학을 떠나서 과학의 도덕을 이해하는 건 기독교를 떠나서 기독교의 도덕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지. 문제는 좀더 근본적이오.
기독교의 도덕이란 신을 섬기는 사람들 전체가 따라야 할 도덕이라오. 그건 곧 모든 사람을 신의 의지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한 도덕에 지나지 않소. 종이 되기 위한 도덕, 노예가 되기 위한 도덕이란 말이오. 이 도덕 덕분에 성직자들은 신의 의지를 대변한다는 주장만 가지고도 신도들을 다스리고 복종시킬 수 있었던 거지요. 과학자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헌신이나, 과학적 방법은 엄밀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그렇소. 그것은 학자들의 욕망의 격정, 상대방에 대한 질시, 끊임없는 토론과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같은 것들에서 생겨난 것이오. 자유라는 개념도 인간 본성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성질이 아니라 지배 계급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고안품이지." "선생님께서 주장하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비판' 이 바로 그건가요?"
"그렇소. 이제껏 사람들은 여러 가지 도덕이나 가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소. 그게 마치 인간의 본질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이제 모든 도덕적 가치를 의심하고 비판해야 하오. 그러려면 도덕적 가치들이 만들어지고 발전해 온 조건과 환경에 대해 연구해야 하지. 그 도덕적 가치가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든, 진리를 추구하자는 것이든, 아니면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것이든 간에 말이오. 아니, 여기서 멈춰선 안 되오. 우리는 '좋다/나쁘다' , '선하다/악하다' 는 가치 판단을 하지. 이런 가치 판단까지도 무엇이 선하고 무엇은 악하다는 하나의 가치에 따른 것이란 말이오.
이건 과학에서 말하는 선/악이란 판단이 기독교에 와선 달라지는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그렇다면 무엇을 선이라고 하고 무엇을 악이라고 하는 가치 판단 체계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조건에서 발전해 온 것인지 탐색해야 하지 않겠소? 또 그런 가치 판단이 인간의 번영을 가로막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촉진해 준 것이었는지도 말이오. 이처럼 어떤 도덕이나 가치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화되었나,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를 연구하는 것을 가르켜 <계보학>이라 한다오.
개념이나 가치가 발생하여 발전해 온 계보를 찾아내는 작업이란 뜻이지. 이것은 이전엔 어느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것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이나 가치 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라오.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추구하면서 모든 걸 의심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확실성을 추구하는 이유(확실성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소. 칸트도 이성 자체에 대해 비판의 칼을 들이댔지만, 정작 이성이 갖는 개념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를 비판하진 못했소. 당신이 만났던 후설도 마찬가지요. 그는 절대 진리와 순수의식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그의 의식은 결코 절대적인게 아니지.
오히려 그는 그런 주장을 통해서 자기 견해를 절대 진리로 승격시키려 한 셈이지. 절대 진리에 대해 말하는 건 당연히 절대 진리여야 한다고 말이야. 바로 이게 후설 철학의 목적이요. 그 밑에 깔려 있는 '가치'지. 이런 점에서 <가치>란 개념을 철학의 가장 밑바탕으로 삼은 건 바로 내 업적이고 계보학의 업적이라오. 가치란 개념을 가지고 철학을 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여겨 온 모든 개념과 가치를 망치고 두들겨 부수는 작업이오. 한마디로 망치로 철학하는 셈이지."
-착한사람이 지옥에 가야 하는 이유
"당신은 하이드가 한 일을 '악하다'고 판단했소. 그리고 지킬박사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는 '선하다'고 판단하나 또 어떤 행위에 대해선 '악하다'고 판단했소. 당신이 '선하다'고 판단한 것은 어떤 경우 였소?" "예를 들면 친절한 의사로서 사람들을 치료해 줄 때나 어려운 사람을 위해 자선단체에 기부할 때, 애정을 가진 친구로서 다른 친구를 도와 줄 때, 또는 학문 연구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진리를 추구하고 있을 때가 그렇지요." "지킬 박사가 선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건 다른 사람을 위해 일했기 때문이죠.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타적인'일을 한 경우에는 '선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지요." "남을 위해 일하면 선하다고 하는 이유는 뭐겠소?" "그건 그 행위로 이익을 얻은 사람들, 이를테면 친절하게 치료받은 사람이나 자선을 받은 사람들이 그걸 '선하다'고 하기 때문 아닐까요?
이런 식으로 선하다고 찬양받는 행위가 되풀이되면 '이런 행위는 원래 선한 일'이라고 판단하는게 당연시될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이롭기 때문에 선하다고 찬양하는 건 아무래도 치졸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행위를 찬양하던 이유를 잊거나 묻어 버리게 되었을 테고.... 그렇게 해서 그런 행위가 좋은 일인 것처럼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은데요."
"그건 정말 영국 사람다운 설명방식이군. 남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 또 공공에 이익이 되는 것이 '선'이라는 설명처럼 실용주의적인게 또 어디 있겠나. 하지만 자기에게 이로운 일이 '얼마나 선한 일인지' 정말 잊을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람은 자기에게 이로운 일을 볼때마다 '이거야말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좋음이나 선함을 공리적인 행동에서 찾는 것 자체도 문제요. '그건 좋다'는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을 하는 '좋은 사람들' 자신이 하는 거니까. 고귀한 자들은 비천하고 저급한 자들과 비교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좋음'이나 '선함'이라고 불렀던 것이오. 자신들이 천한 사람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나를 보여주고, 그 거리가 얼마나 좋은 것이지 과시하는 단어가 바로 '좋음'이었지. 결국 '좋음'이란 자기를 긍정해서 붙인 이름인 셈이오. 따라서 같은 'good'이란 말을 쓰지만 여기에는 선함보다는 우수함이나 좋음이 더 어울이지. 나쁘고 열등한 것인 'Bad'와 견주어서 말이야.
반면에 천한 자들은 다르다오. 그들이 말하는 선/악은 노예들이 귀족에 대해, 약한자가 강한자에 대해 갖는 원한에서 비롯되지. 어린양을 생각해 보시오. 그들은 자신을 위혐하는 맹수를 몹시 싫어하지. 실제로는 그에 맞서 싸우려 하지는 않은 채 그저 원한만 품을 뿐이오. 어린 양들은 자기들끼리 '맹수는 나쁘다, 악하다(Evil)'고 말하겠지. 그리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 곧 어린 양이야말로 선하다고 하겠지. 강한자들과 반대로 이들은 강한 자의 특징에 반발하고 그것을 부정해서 자기들의 '선'이란 가치를 만들지. 결국 강한 자는 자기에 대한 긍정에서 도덕(좋음)을 만들어낸 데 반해, 약한 자는 강한 자에 반발하여 부정적으로 자신의 도덕(선함)을 만든다는 점에서 서로 반대되지. 억압한 자, 짓밟힌 자, 압박받은 자는 무력감에서 생긴 복수심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오.
'우리는 악인과 다른 것이 되자. 즉 선인이 되자. 선인이란 모름지기 억압하지 않은 자, 보복하지 않은자, 복수는 신에게 맡기자, 우리처럼 자신을 숨기며 사는 자 , 악을 피하고 인생에 대해 욕심이 적은 자, 그리고 우리처럼 인내심 강하고 겸손하며 공정한 자다.' 이게 바로 <선악의 계보>요 <도덕의 계보>인 셈이지.
이제 우리는 세상을 휘젓고 있는 많은 이상과 미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소. 보복하지 않은 무력함은 '선함'이 되고, 겁 많은 비열함은 '겸허'가, 증오하는 상대에 대한 복종은 '순종'이 되는 거요. 문 앞에서 서성대며 기다리는 비겁은 '인내'로 되고, 복수할 수 없기에 복수하려 하지 않음이 '관용'이 된다오. 노예들은 자신의 비참함이 신에 의해 선택받은 증거로서, 훈련이며 중비라고 하지. 언젠가는 이자까지 붙여 행복으로 돌려 받을 시련이라고 하는 거요.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게 보복이 아니라 '정의의 승리'라고 하며,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축복은 '최후의 심판'이라고 한다오. 그 날이 오기까지 그들은 '믿음', '소망', '사랑' 속에서 사는 거요.
-<선악의 계보학, 미덕의 계보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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