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을 지닌 채 현재를 살아라.
그러면 나도 모르게 먼 훗날,
대답을 지닌 채 살아갈 날이 올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한일월드컵으로 촉발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은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買死馬骨(매사마골)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죽은 말의 뼈다귀를 사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죽은 말 벼다구를 사고 기다리니 천리마를 사게 되었다”는 뜻인데, 더 자세하게 뜻을 풀어 보면, “기다리면 때가 오고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齊)가 연나라(燕)에게 영토를 절반이나 빼앗겼다. 소왕은 재상 곽외와 어떻게 하면 잃은 영토를 되 물릴까를 상의했다.
그때 곽외가 임금에게 말하기를,“옛날에 어떤 임금이 천금을 내걸고 천리마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3년 동안을 기다렸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천리마라고 생각하고 사오는 말들은 도착하기 전에 모두 죽어버렸다. 그래서 죽은 말뼈를 5백금에 사서 임금에게 바쳤다. 그러자 임금이 화를 내었다." 그러자 신하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면 천리마를 끌고 나타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물었다.
‘어째서 그러냐?’
‘임금님께서 죽은 천리마의 뼈도 사주시는데 어찌 산 천리마를 끌고 오는 자가 없겠습니까? 임금이시여, 기다리고 계시면 꿈을 이루게 되실 것입니다.’ 임금은 신하의 말이 지혜로우므로 신하의 말대로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신하의 말처럼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천리마를 끌고 오는 자가 세 사람이나 있었다.'
지금 임금님께서 현명한 인재를 구하시려면 이 곽외를 먼저 쓰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곽외와 같은 자가 제나라에서 후대를 받는데, 어찌 내가 가서 후대를 받지 않겠느냐' 하고 또 몰려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매사마골(買死馬骨)은 이러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속담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낙락장송(落落長松)도 근본은 종자(種子)”라는 말도 있다. 따라서 "오래 참고 견디며 간절히 원하면 꿈을 이루게 된다"는 뜻의 속담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몸짱, 성형열풍에 이어 이른바 '스펙열풍'이 거세다. '스펙'(spec)은 영어단어 Specification의 준말이다. 이 단어는 2004년에 국립국어원 신조어로 등록되었다.
흔히 "구직자들 사이에서 학력과 학점, 토익 점수 외 영어 자격증, 그 외 관련 자격증들을 총칭한다." 스펙을 쌓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그러나 스펙 쌓기의 결과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보다 기존의 길을 빨리 가는데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르네상스 창조경영>을 쓴 연세대 최선미, 김상근 교수는 그들의 저서에서,
"입사 면접 시 대학 성적표를 면밀히 검토하여 줄곧 A만 받았거나 전교 1등을 유지했던 지원자는 떨어뜨리는 것이 좋다. 언제나 모든 과목에 우수했던 모범생은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생이나 교수가 정해 놓은, 기존의 가치 틀에 순종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이들은 기존의 가치 틀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형을 대표한다. 대한민국 교육은 기존의 고정관념에 충실하면 좋은 점수를 받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스펙은 또 다른 스펙을 양산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스펙은 공통적으로 구직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 스펙들을 바탕으로 구직자를 평가한다. 특히 이 스펙은 우리나라 대학생들 사이에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고 취업재수를 하게 만드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스펙이 중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왜 모두들 비슷한 스펙을 쌓으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의미 있게, 그리고 가치있게 살고 싶은 기대심리에서 비롯될 것이다.
하지만 하기 싫은 스펙 쌓기가 자신의 삶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봐야 한다.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좋아 하는 일을 하겠다는 목표가 스펙이 대신해 줄 수 있을까? 그동안 우리 사회가 스펙이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가장 큰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여전히 스펙은 구직자들 사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얼마 전, 이 스펙 쌓기에 지친 고려대 재학생이었던 김예슬 양이 결국 대학을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녀는 대자보를 통해 '국가,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라면서 스펙 위주의 대한민국 사회을 비판하였다. 자신은 스펙사회 속에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대학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김예슬 양의 대자보 일부이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그녀가 말하는 '인간의 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정표가 없다는 점이다. 즉 자신만의 꿈이나 목표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스펙도 결국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보조수단일 뿐이다.
1953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인생의 목표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명확한 목표와 그 목표달성을 위한 계획서를 작성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학생 중 3%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87%는 목표설정을 아예 하지 않았고, 10%는 대략적이나마 목표를 세우려는 노력을 약간 했으며, 나머지 3%는 행동계획과 목표설정 기준을 직접 종이에 그려가며 생각해 보았다고 답했다. 이 연구는 20년 후 1973년에 마침내 결과를 발표했다.
20년이 흐른 뒤, 관련 조사원들이 당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다시 조사하였더니 결과는 직업이나 재정상태 등 모든 면에서 앞서 목표를 설정한 3%의 학생들이 다른 97%의 학생들을 다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단지 대학시절에 자신의 목표와 꿈을 적었다는 사실이 삶 전체를 좌우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여기에 우리는 희망이 있다. 소위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학력이 높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고 부자가 되지 않은 것은,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마찬가지다. 37년 전의 조사이지만 이러한 결과는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여전히 지금까지도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개인적으로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결과는 100명 중 3~5명 정도만이 자신의 목표와 꿈을 종이에 적어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그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학가에서는 꿈과 비전보다는 스펙 쌓기가 대세인 것 같다. 인터넷에서 본 스펙 7종 세트다.
* 스펙 6종 세트 = ①학벌 ②학점 ③영어(토익) ④인턴십 ⑤자격증 ⑥봉사활동
* 스펙 7종 셋트 = 6종 + 성형
"거울을 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혐오감이 밀려 왔다.
혐오감이 나를 둘러싸면 나는 견딜 수 없어졌다.
난 왜 이렇게 못생긴 것일까?
우아한 분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특히 이 작고 탁한 눈은."
톨스토이(Tolstoi, Lev Nikolaevich)가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누구나 콤플렉스는 있다. 아무튼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스펙 10종 세트를 채우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실 스펙에 만족이란 없다. 한계도 없고 끝도 없다. 누가 다른 하나의 스펙을 추가하면 또 다른 사람이 다른 스펙을 추가하는 이른바 '과잉스펙'의 연속이다.
얼마 전, 취업전문사이트 <파워잡>에서 기업 인사담당자 30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결과다. 전체 응답자의 88%가 '이력서만으로는 지원자의 실무능력을 파악하는데 부족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개인적으로 100%가 아닌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력서에 나와 있는 스펙만으로는 지원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스펙 위주의 채용시스템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기업들의 채용시스템이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스펙 위주의 채용시스템을 추구하면서도 스펙이 채용에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찌 좀 궁색한 변명으로 보인다. 그럴 바엔 차라리 우리 회사의 채용시스템은 스펙에만 의존한다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바뀌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 이력서와 채용서류에는 꿈과 비전을 적는 공간 자체가 없다. 있는 것은 학력과 스펙을 적는 공간뿐이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여행이다
스펙을 중시하는 사람이 가장 등한시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책읽기다. 토익 점수는 중시하지만 책읽기는 등한시한다. 토익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만 책읽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책 몇 권 읽는다고 금방 표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책읽기는 스펙으로 치자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스펙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린위탕은 "10년을 독서에 바치고 10년을 여행에 바치고 10년을 그 보존과 정리에 바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마지막 10년을 보존과 정리보다는 더 많은 독서와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설령 정리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꿈, 책, 여행' 이 세 단어가 곧 저의 삶입니다. 언제 불러도 달려오는 참 착한 녀석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셋의 삼각관계는 이렇게 표현된다. 독서는 마음으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발로 하는 독서다. 독서는 머리로 하는 여행이고, 꿈은 마음으로 하는 독서다.
아무튼 이젠 '스펙지수'(SQ, spec quotient)보다는 '꿈 지수'(DQ, dream quotient, 열정, 도전정신, 자신감, 긍정성)가 더 중요하다. 스펙은 하나의 기법이자 보조수단이지만 꿈은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방향키이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 스펙은 스펙이 아니다.
어느 일간지에서 직장인들에게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란 주제의 설문조사 실시했다. '다시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 '스펙을 철저히 만들겠다'라는 대답보다는 가장 많은 41%가 '적성부터 찾고 싶다'였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내 꿈을 찾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후배들에게 조언해 주고 싶은 말'로 가장 많은 대답은 "적성을 모르면 후회하니 자신이 잘 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찾아라'였다. 바로 직이 아니라 업이다. 직은 Best one的인 사고이고, 업은 only one的인 사고이다. 업이 곧 꿈을 의미한다. 평생을 두고 몰입하는 주제가 곧 업이자 꿈이다. 꿈이 없는 사람들은 '직'(職, occupation)에 몰두한다. 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비슷하다.
가장 먼저 '연봉이 높은 금융기관에 입사해야지'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야지'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적당한 기업에 입사해야지' 이것도 안 되면 취업 재수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사를 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늘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매달 한 치의 오차 없이 국방부 시계 돌아가듯 제 날짜에 나오는 월급의 달콤한 유혹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반면 업(業, vocation) 은 좋은 기업, 연봉이 높은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에 입사하는 것이다. 직의 마인드는 내가 주가 아니라 회사가 주가 된다. 하지만 업의 마인드는 회사가 주가 아니라 내가 주가 된다.
직의 마인드는 '일을 하면 월급을 받는다'는 사고이지만, 업의 마인드는 '회사는 나의 능력을 개발하는 비즈니스 학교다'라는 생각으로 일을 대한다. 결과는 어찌 되겠는가?
스펙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지만, 꿈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한다. 스펙은 최고를 추구하지만, 꿈은 최초를 추구한다. 중요한 것은 설령 지금은 현실의 무게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늘 자신의 삶의 방향성이나 꿈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 비록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육신의 감옥이, 어떤 이에게는 <돈키호테>를 탄생시킨 곳이 되고, 정약용은 억울하게 귀양을 갔지만, 귀양지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와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모든 상황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스펙 쌓기에 올인하는 학생들, 스펙도 중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왜 스펙을 쌓으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해 자신에게 물어보고 답하는 것이 먼저다. 혹시 옆집 철수가 토익 공부하러 가니까 나도 가고, 뒷집 영희가 봉사활동 가니까 나도 간다는 식의 스펙 쌓기는 스펙이 아니라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안 하니까 왠지 뒤처지는 것 같고 불안한 마음에 마지못해 이것저것 스펙을 쌓기보다는 왜 스펙을 쌓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라. 행동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하라. 질문에 답한 후 행동하라. "당신의 꿈은, 목표는 무엇인지" 그 다음에 자신에게 필요한 스펙을 쌓아라. 그것이 순서다. 여기 우리의 상식의 틀을 깨는 이야기가 있다. 경남 거창고등학교 정문에 새겨져 있는 "직업선택의 10계명"이다. 28년 전 필자가 입학할 당시에는 이런 글이 없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은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6.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을 바랄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상식을 거스르는 글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교육을 제1의 가치로 하고 있는 거창고등학교의 정신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글이다. 이것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프런티어 정신, 군중속이 아닌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창의성을 반영하는 학교의 이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누구나 직업을 선택하는 데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물론 충분히 고민하고 적성도 따져봐야 하지만 지나치게 고민만 한 나머지 선택을 뒤로 미룬 채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계속 고민만하다가 결국 '안전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게 된다. 어떠한 선택을 할 때에는 늘 달콤한 '결과물'에만 집중하고, 치열한 '과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조금이라도 잃는 것이 적은 안전한 쪽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안전한 삶에서 도전이나 기쁨은 없다. 삶의 진정한 기쁨은 아직 뚜껑을 따지 않은 미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성공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일을 택할 수 있는 열정, 상식을 벗어난 도전정신, 경계선 너머를 볼 수 있는 과감성과 자신의 끼를 발산할 수 있는 창의력을 발휘하라는 것으로 다가온다. 플라타너스 잎을 태운 메케한 연기가 진동하던 대학 캠퍼스 작은 연못가 벤치에서 "어느 한 사람은 그가 읽은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조지 브로드스키( )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가파른 설악산을 오르듯 그 책들을 거침없이 읽어나갔다. 그리고 머리에 부화가 걸리면 짐을 꾸렸던 학창시절의 버릇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필자의 가장 큰 기쁨은 배낭을 꾸리는 시간이다. 이젠 수십 년 착용한 안경처럼 배낭도 내 몸의 일부가 된 것 같다. 익숙해졌지만 배낭을 꾸리는 순간은 늘 새롭다. 희망과 설렘 때문이다. 책과 여행을 통해 "꿈"이라는 녀석이 다가왔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자주 메일을 받는다. 그러면 서론, 본론은 다르지만 마지막 결론은 늘 이렇게 마무리하는 편이다. "단 하루만 밥을 굶고, 하루만 밤을 새워, 그리고 코피가 터져 쓰러질 때까지 치열하게 책을 읽어보라."고 말이다. 책을 읽어서 깨우치는 것이 명 강의를 듣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꿈을 찾는 도구로서의 책은 한방적 접근이다. 하지만 직접 코칭을 받는 것은 양방적 접근입니다. 머리가 아프면 감기약을 주고, 배가 아프면 소화제를 주는 것은 양방적 접근, 즉 단순한 접근법입니다. 하지만 한방적 접근은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플 때 그 아픈 부분보다는 그 사람의 몸 전체를 살피는 것입니다. 몸의 원기를 돋우거나 기를 북돋우는 약을 처방하는 것이지요.
꿈이란 당신의 장단점, 살아온 과거와 현재의 철학과 가치관 등 인생 전부를 살펴봐야 하는 과정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지요. 치열함 그리고 간절함, 이것이 없다면 꿈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치열함 그리고 간절함, 이것이 없다면 꿈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지 말아야 한다. 삶을 뒤흔들고, 갈아엎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전환점에서 며칠 잠 못 자고, 밥 몇 끼 굶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특별한 사람만이 꿈 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꿈을 이룬 사람들은 특별하다.
세 명을 악마가 인간을 상대로 내기를 했다. 각자 인간을 선택한 후 자신들이 선택한 인간에게 한 가지씩 과제를 주어 인간을 이기는 내기였다. 첫 번째 악마는 인간에게 실패를 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실패를 주면 줄수록 그것을 딛고 일어나 더 큰 실패를 계속 이겨내는 것이었다. 결국 첫 번째 악마는 인간에게 손을 들었다.
두 번째 악마는 인간에게 시련을 주었다. 역시 인간은 시련을 주면 줄수록 그것을 극복하고, 더 큰 시련도 능히 이겨냈다. 두 번째 악마도 인간에게 손을 들었다. 마지막 세 번째 악마는 인간에게 미루는 것을 주었다.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하면, 악마는 인간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소곤거렸다.
"아직 시간이 충분해, 잠시만 미루었다가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
"내일도 시간이 있잖아, 지금 하지 않아도 나중에라도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어" 마침내 세 번째 악마는 인간을 이겼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오늘 시작하지 않으면 내일은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내일'이라는 말은 미루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써먹는 18번이다. 내일 거창한 일을 꿈꾸기보다는 작은 일이지만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역사의 전무후무한 중대한 사건,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당시 56명이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 그들은 이 선언문이 미국인에게 자유를 가져올 것을 확신했고, 행동을 미루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인에게 자유를 준 대가로 한 명씩 교수형에 처해졌다. 신속한 결단과 과감한 행동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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