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경영/꿈과 비전

10000분의 9999는 공동묘지로 간다

김부현(김중순) 2012. 1. 16. 22:06

"0을 발견한 인간은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무無를 숫자로 표현한 거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했지."

-오가와 요코,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영화에는 이른바 '5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드라마에는 '첫 회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첫 회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시청률을 담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드라마들은 대부분 스토리의 구성이 비슷비슷 하다.

 

이를테면 주부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직업이나 상황을 재료로 남녀 간의 삼각, 사각 관계를 엮은 멜로를 소재로, 결국에는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조미료로 맛을 내는 드라마들이 대분분인 것 같다. 하지만 2년 전, 이에 반기를 든 드라마가 있었지요. 바로 <달콤한 나의 도시>이다. 주인공 오은수가 친구 남유희와 뮤지컬을 보러 가는 장면이 있다. 원래 유희의 꿈은 뮤지컬 배우였지만, 꿈을 포기한 채 어느 회사의 대리로 일하고 있었고, 그 누구도 그녀의 진짜 꿈을 알아채지 못했다. 유희는 뮤지컬을 보는 내내 울기만 하는데, 공연이 끝난 후 은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그렇게 슬프냐? 난 별로 안 슬픈데."

은수의 질문에 유희가 답하기를,

"그게 사람 미치게 하잖아."

 

이 마지막 구절이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던 필자가 이 드라마를 기억하는 이유가 되었다. 자신의 일에 미칠 수 있다면 분명 행운이다. 한때 다른 누군가의 꿈을 동경하다 이제는 누군가의 꿈이 되어 버린 사람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일에 미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미친다는 것은 평범했던 한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 얼마나 멋지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미친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을 때 가능하다. 어쩌면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뛰어넘은 것이겠지요. 미국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지휘봉을 잡은 이래로 덕 아웃에는 언제나 'No Fear(두려워하지 마라)'글귀가 붙어 있었다.

 

 

 

<마태복음>에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이 있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일수록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집착하게 된다. 자신의 내재적인 힘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오는데, 이 힘이 약한 사람은 두려움을 안고 살기에 외적인 것을 붙잡고 거기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지니게 되는 두려움이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만을 띠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로 두려움은 우리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속시키는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미묘한 존재여서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상황 앞에 서게 되면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기 방어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세상에 잡초는 없다. 이름을 몰라 잡초라 부를 뿐이다.

 

 

 

"우리가 세상에 처음 왔을 때는 멋졌다.

얼마 후 우리는 타락했다.

이제 우리는 순화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는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 혹자는 발리 섬을 "천국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발리 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발리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처음 150일 간은 발을 땅에 디디지 못하게 한다. 아기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여기고, 되도록 거친 땅과 만나는 데서 오는 충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의 아기들은 태어나 5개월이 되기까지는 계속 들려 있다고 한다. 또한 하와이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을 천국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빛을 담은 그릇"과 같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어디에서 태어났던 태어날 당시에는 모두 천사이자 빛이었다. 이미 우리는 모두 빛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갈 꿈 말이다. 따라서 꿈이란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빛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새의 등에 돌을 묶으면 그 새는 멀리 날아갈 수 없다. 혹시 우리도 무거운 돌을 등에 메고 끙끙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을 메고는 멀리 갈 수 없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마음의 빛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 빛이 당신의 꿈을 춤추게 해 줄 테니까.

 

 

 

1만 시간의 법칙은 양이 아니라 질의 차원이다

 

 

 

평소 주말이나 시간이 날 땐 남산도서관을 자주 찾는다. 서울의 중심 남산에 자리한 남산도서관은 그야말로 공기 좋고 조용할 뿐만 아니라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몇 안 되는 도서관 중 하나다. 해서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서울 시민들이 많이 찾는다.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일요일 조용한 도서관에 난데없이 '띵동!'하고 휴대폰 문자메시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의 장본인은 나의 휴대폰, 그날따라 휴대폰 벨소리를 진동으로 맞춰놓지 않아 순간 당황했다.

 

 

 

"1만 시간을 노력한다고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혁명>중에서,"

 

 

 

어쨌든 메시지를 보낸 주인공은 이틀 전 서울 A대학 특강에서 만난 한 학생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찾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연락처도 주고받았던 터라 또렷이 기억이 났다. 그 흔한 인사 한 마디 없이 달랑 보낸 메시지였다.

당연히 이틀 전 특강이 떠올랐다. 강의 중에 꿈과 비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꿈을 찾았다 하더라도 꿈을 이루는 데는 '1만 시간을 투자해야 가능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1만 시간의 법칙'은 자기계발 분야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문율처럼 여긴다는 그 자체가 거짓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 '1만 시간을 투자한다고 모두 성공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확답할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꿈을 이루는데,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데 있어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학생이 보낸 메시지의 의미도 그럴 것이다. 1만 시간을 투자해도 될지 안 될지 결과가 불확실한데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그때 가서 결과가 나지 않으면 어떡하나!”하는 우려와 걱정스러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 100%의 확률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확률은 수학시간 외에는 그다지 쓰임새가 없다. 특히 자기계발에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45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루를 산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변수가 많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자신의 꿈이라는 그 가볍지 않은 명제를 두고 확률을 따진다는 것은 너무 편협된 생각이다.

 

 

 

만약 시작하기도 전에 주판을 튕겨본다거나 결과를 미리 판단해보거나 또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떡하지와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면 그 일은 당신의 천직이 아니다. 업도 아니다. 나아가 꿈도 아니다. 목적지를 향해 빨리 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도로 사정이나 기상 상황을 고려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장작을 패러 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산 위에 도착해서 도끼날을 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다시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무딘 도끼로 장작을 팼어.

또 한 사람은 급하게 산에 올라가지 않았다. 집에서 먼저 도끼날을 날카롭게 간 다음에 장작을 패러 갔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많은 장작을 팼을까?

 

 

 

물론 이리 저리 기웃거리다, 이것저것 하다 어느 날 '심봤다!'를 외치며 자신의 꿈을 찾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지만 요즘은 꿈을 찾을 수 있는 책이나 CD 등 다양한 도구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 도구들을 학교에서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 항간에 우리의 교육 현실을 빗대어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선생님들이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교육현실이 마치 여불위가 쓴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각주구검刻舟求劍'에 관한 고사를 생각나게 한다.

 

 

 

전국시대 초나라의 한 젊은이가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로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물속에 빠트렸다.

"아뿔싸! 이를 어쩌지."

그 젊은이는 허둥지둥 단검을 빼서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해두었다. 그리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마자 그는 표시를 해 둔 그 뱃전 밑의 강물로 뛰어들어 칼을 찾았다. 그러나 칼이 그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여씨춘추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때는 이미 지나갔으나 법은 바뀌지 않았으니 이런 방식으로 정치를 한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우리들 역시 각주구검 속 젊은이를 어리섞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미래로의 여행보다는 지나왔던 익숙한 과거로의 여행에 더 길들여져 있으니까 말이다. 장 피아제(Jean Piaget)는 "교육의 근본 목표는 다른 세대가 해놓은 것을 단지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은 물음표와 함께 학교에 입학해서 마침표와 함께 졸업한다."는 닐 포스트먼(Nel Postman)의 글은 단연 압권이다.

 

 

 

즐기는 사람도 꿈을 가진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꿈을 찾는 가장 간단한 방법 세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을 것을 찾아라.

내가 좋아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흔한 경우가 아니다. 따라서 ‘잘 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잘 할 수 있는 일을 택하라는 사람들도 많지만 즐거움이 능력을 이긴다. 즐거우면 놀이처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란 의무감이 없는 본성에 가장 가까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즐기면서 놀이처럼 하는 놈을 당할 수가 없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 21세기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를 시켜 본다면 즐기는 사람은 노는 사람만 못하고 노는 사람은 꿈 가진 사람만 못하다. 세계적인 역사학자로 명성을 얻었던 아놀드 토인비( )도 "왜 당신은 평생 역사를 연구했는가?"라는 질문에 "재미있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

 

 

둘째, 하나의 목적지에 집중하지 마라.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분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목적지에 대한 해석을 조금 넓게 하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프로 골프 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하다 보니 프로 골프 해설자가 될 수 도 있고, 축구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축구 해설자가 될 수도 있고 감독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처음의 꿈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썼지만 등단은 하지 못하고 경험을 살려 출판사를 운영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모두 자신의 꿈이 제대로 작동한 것이다. 궤도를 이탈한 것은 아니다. 즉 지리산을 목표로 가다 설악산을 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차선책으로 내가 그 일을 좋아하도록 의식을 개조해야 한다. 그것도 능력이다. '나는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핑계를 대는 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무엇을 잘하는지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관심분야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것이다. <지식의 단련법>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없는 돈을 탈탈 털어서 책을 사라”고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책읽기에 대한 효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소홀히 하려 한다. 책 읽을 시간을 낭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읽기는 모죽(毛竹)이란 대나무가 성장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중국에서 자라는 모죽이란 대나무는 심은 지 4년 동안은 아무리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도 큰 변화가 없다. 그러다가 4년이 지나면 하루 70cm씩, 쉬지않고 성장해서 나중에는 27m까지 자라는 대나무이다. 4년 내내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뿌리를 뻗어 기초를 다졌던 것이다. 책을 읽을 때도 당장 결과를 바라기보다는 멀리 보고 임계점을 넘는 것이 중요하다. 임계점을 넘는 순간 지식이 지혜로 폭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건성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읽어야 한다. 눈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득해야 한다. 고스톱에서 쓰리고를 하는 순간처럼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시간이 나면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어야 한다. 인생을 마라톤으로 보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책을 읽을 때 '시간을 내서 읽는 것'과 '시간이 나서 읽는 것'의 차이에서 기인된다. 강의를 듣더라도 퇴근 후 피곤한 정신으로 강의를 들을 것이 아니라 그 강의에 오롯이 젖어들어야 한다. 일하다 지쳐 졸거나 휴식하는 마음으로 받는 교육은 그야말로 교육을 위한 교육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의 생각에는 가급적 무료교육은 받지 않는 것이 좋다. 무료교육이라고 해서 강사의 자질이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 때문이다.

 

1천만 원, 5천만 원, 심지어 1억 원하는 강의를 듣기 위해 해외까지 오가는 사람들, 특급호텔에서 매일 아침 수십만 원하는 조찬을 겸한 인문학 강의를 듣는 사람들, 그들은 설렁설렁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다. 수천만 원이나 하는 질 높은 독서 강의를 듣는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돈으로는 불가능하다. 집중과 끈기뿐이다. 같은 책을 읽어도 더 집중해야 하고, 그들이 하루 1권을 읽으면 하루 2권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독서의 절대량을 늘여야 한다.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큰 안식처는 '시간이 없어서'이다. 이것은 인류가 만들어 낸 최고의 만병통치역이다. 안 쓰이는 곳이 없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카르마 경영>이란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더라도 어쨌든 우선 열심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파고들라. 좋아하기 때문에 일에 몰두할 수 있고, 몰두하는 가운데 좋아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 싫지만 어느 정도 몰입하다 보면 관심이 가게 되고 관심이 가면 즐길 수 있고 즐기다 보면 결과가 나오는 법이다.

 

 

 

인간의 뇌를 통해 본 우리의 독서량을 예측해 볼 수 있는 연구가 있다. 미국의 과학자 '칼 세이건 )'은 수년 동안 두뇌의 능력에 대해 연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인간의 뇌는 2,000만 권의 책을 가득 채울만한 정보를 수용할 수 있다. 즉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의 장서와 맞먹는 수의 책을 한 사람의 두뇌는 충분히 이해하고 저장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량 상위에 해당하는 한 달에 3권 읽는 것으로 대입해 보자. 1년이면 36권이다. 60년 동안 충실하게 읽는다 해도 그렇게 읽어서는 평생 2,160권 정도의 책을 읽는 것이 된다.

우리의 능력이 20,000,000권이라면 2,160권은 10000분의 1에 불과하다. 10000분의 9,999는 공동묘지로 가져간다는 이야기다. 독서량이 엄청났던 소크라테스도 제자들에게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한탄했다. 철학자들의 깨달음을 인간사에 적용한 것이 수학이라면 독서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이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이제 막 탈고를 마친 루이제 린저( )에게 작가 지망생인 한스 제임스( )가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은 작품의 소재를 어디에서 얻으세요? 글의 재료를 찾으려니 막막하고 어렵게만 느껴져요." 루이제 린저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나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도대체 내가 깨달은 것들, 내 안에서 여물어가는 생각들은 전부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하고요. 하지만 넓게 본다면, 내가 잃어버린 생각이란 없어요. 그 생각을 누군가의 어딘가에서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어쩌면 나의 생각들 도한 어딘가에서 버려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우리는 무엇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을 찾아내는 것일 뿐이거든요. 따라서 소재는 이미 한스 제임스 당신 안에 있어요. 새로운 것을 쓰려고 하지 말고,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절실한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해 봐요." 소재들은 이미 그의 내면 속에 가득했지만 외부로만 눈을 돌렸기 때문에 혼란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늘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갖지 못한 것,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 비교하면서 불평불만에 휩싸이는 시간이 많다. 진(晋)의 갈홍(葛洪)이 지은 책 <포박자>를 보면, "玉石混淆(옥석혼효)"라는 말이 있다. "옥과 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라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옥과 돌이 함께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일도 '비교'라는 말이 개입하는 순간 힘들어지게 된다.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더욱 갈고 닦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차선책으로 싫어하는 일이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성공보다 더 큰 재능은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성공자들도 대부분 처음부터 그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엔 마음은 콩 밭에 가 있었지만 그것을 업이라 생각하고 노력한 결과 성공자가 된 것이다. 내가 싫어하던 일도 집중해서 공부하고 노력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신기하게도 그것에 맞춰져 간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재미있다, 즐겁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호아킴 데 포사다가 쓴 책 <바보 빅터>를 보면, “빅터의 IQ가 73이라고요? 푸하하하!” 학교에서 본 IQ 테스트에서 빅터는 IQ 173이 나왔다. 하지만 빅터에 대한 잘못된 편견으로 IQ를 73으로 처리하는 담임선생님으로 인해 그는 17년 동안 바보가 되어버렸다. 한 사람의 실수로 인해 그 오랜 시간 동안 바보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자 버팀목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남들 하는 대로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는 청춘들이 관심 가져 볼만한 책이다. 빅터를 바보로 만들게 된 계기는 큰 사고나 일이 아니었다. 담임선생님의 편견과 사소한 실수 때문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어떤 일에 대한 투입시간이나 노력은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이다.

앞서 문자를 보낸 대학생 역시 양의 기준, 즉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1만 시간을 생각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죽기 살기로 했는데 안 되면 어쩌나 하는 그런 막연한 두려움 말이다. 그러다 결국은 두려움 때문에 시작도 못하는 것이다. 평소 산을 오르고 들판을 걷는 것이 취미인 필자에게 단번에 눈에 띈 책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 )의 <나는 걷는다>라는 책이다.

 

 

 

부러울 것 없던 삶을 살았지만 그는 은퇴 후 남들처럼 편안한 삶을 원치 않았다. 벽난로 앞에서 책을 읽거나 TV를 보면서 노년을 보내는 것은 체념한 인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은 새로운 꿈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일하고 공부하고 직위에 맞게 처신하느라 정작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하지 못했다. 항상 곧은 자세를 유지해야 했고 군중의 물결 속으로 떠밀려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고 점점 더 빨리 뛰어야 했다. 마음에서는 늘 ‘천천히’와 ‘쉬어 가’를 외쳤지만 앞만 보고 달렸다. 규격화된 문명과 온실 속 문화에 싫증이 난 그는 걷도 또 걸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4년여에 걸친 도보여행을 끝내고 ‘비행청소년 재활 협회’를 설립하여 죄를 지은 청소년들을 소년원에 보내는 대신 걸어서 여행하게 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거기서 청소년들은 자그마치 2,500km를 걸어야 했다.

걸으면서 그들은 분명 자신이 왜 순간적인 기분에 휘둘려 잘못을 저질렀는지 묻고 또 답을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고 '아, 그렇구나', '대단하네' 하고 책장을 덮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저자처럼 직접 치열하게 걸어봐야 책의 내용을 오롯이 체득할 수 있다. 그 시작은 배낭을 메고 나서는 일이다. 그 막연함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갔던 이들에게 세상은 길을 내준다. 1만 시간이란 어떤 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준 내지는 필요조건인 셈이다. 앞으로는 2만 시간의 법칙, 3만 시간의 법칙이 필요할 것이다. 몇 년 뒤 우리는 이렇게 한탄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만 시간이면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하는 그런 탄식말이다. 앞으로 2만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양의 문제에서 질의 문제로, 먹고 사는 것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는 변화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다. 과거 외형 위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하루 일하면 그 성과를 예측할 수 있었지만 내면을 중시하는 앞으로는 시간 대비 결과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어렵다. 과거에는 어제 배운 지식을 내일도 써먹을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지식이나 정보의 유통기한이 그 날 하루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99:1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제 80:20의 법칙 역시 장롱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앞으로는 90:10, 나아가 99:1의 극단적인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 나아가 한 우물이 아닌 두 우물, 세 우물을 파야 하는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 소만 키울 것이 아니라 소도 키우고 돼지도 닭도 함께 키워야 한다. 그리고 과거 물적자본에서 이제는 사회적자본이나 정신자본과 같은 수치화가 쉽지 않은 자본들이 국가와 개인의 성장동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치열한 혁명의 시대를 주도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과거에는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 할 수도 있었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는 속담이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이제는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은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사리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계단씩 변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변해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