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필사-김훈 <풍경과 상처>

서문

김부현(김중순) 2012. 4. 18. 12:18

김훈의 <풍경과 상처> 필사

 

 

-<풍경과 상처>는 김훈이 1994년에 쓴 기행산문집

-저자 소개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서문 -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건너오는 시조새들
AD 632년의 개
겸재의 빛
정다산에 대한 내 요즘 생각
낙원의 치욕
도망칠 수 없는 여름
산유화
돌 속의 사랑
악기의 숲, 무기의 숲
강과 탑
대동여지도에 대한 내 요즘 생각
오줌통 속의 형이상학
염전의 가을
시간과 강물
먹이의 변방
가을의 빛
저 일몰
억새 우거진 보살의 나라
깊은 곳에 대한 성찰
무늬들의 풍경
헬리콥터와 정현종 생각
'천상병'이라는 풍경
천상병의 정치의식

개정판을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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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내 초로初老의 가을에, 상처라는 말은 남세스럽다.

그것을 모르지 않거니와, 내 영세한 필경筆耕은 그 남세스러움을 무릅쓰고 있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언어는 마치 쑥과 마늘의 동굴 속에 들어앉은 짐승의 울음처럼 아득히 우원迂遠하여 세계의 계면界面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이 세계가 그 우원한 언어의 외곽 너머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 내 생애의 불우不遇의 풍경이다.

나는 모든 일출과 모든 일몰 앞에서 외로웠고, 뼈마디가 쑤셨다.

나는 시간 속에 내 자신의 존재를 비벼서 확인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몽롱한 언어들이 세계를 끌여 들여 내 속으로 밀어 넣어 주기를 바랐다.

말들은 좀체로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에 묶어내는 몇 줄의 영세한 문장들은 말을 듣지 않는 말들의 투정의 기록이다.

아마도 나는 풍경과 상처 사이에 언어의 징검다리를 놓으려는 미망迷妄을 벗어던져야 할 터이다.

그리고 그 미망 속에서 나는 한 줄 한 줄의 문장을 쓸 터이다.

 

 

벗들아, 나는 여전히 삼인칭을 주어로 삼는 문장을 만들 수가 없다.

나는 세계의 풍경을 상처로부터 격절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삼인칭의 산맥 속으로, 객관화된 세계 속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일인칭의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아마도 오래오래 그러하리라.

 

 

 

1993년 가을에

 金薰은 겨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