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전군가도/사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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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관능의 등불이 자전하고 공전함에 따라 이 세계 위에는 새로운 낮과 밤의 계절이 드나드는 듯했다. 꽃잎들은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들의 삶은 시간에 의하여 구획되지 않았다. 그것들의 시간 속에서는 태어남과 절정과 죽음과 죽어서 떨어져 내리는 시간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절정을 이루고, 절정에서 죽고, 절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어서 그것들의 시간은 삶이나 혹은 죽음 또는 추락 따위의 진부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절대의 시간이었다.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문명사는 엄숙할리 없었다.
문명사는 개똥이었으며, 한바탕의 지루하고 시시껍적한 농담이었으며, 하찮은 실수였다. 잘못 쓰여진 연필 글자 한 자를 지우개로 뭉개듯, 저 지루한 농담의 기록 전체를 한 번에, 힘 안 들이고 쓱 지워버리고 싶은 내 갈급한 욕망을, 천지간에 멸렬하는 꽃잎들이 대신 이행해주고 있었다.
흩어져 멸렬하는 꽃잎과 더불어 문명이 농담처럼 지워버린 새 황무지 위에 관능은 불멸의 추억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신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으며 여자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었으나, 그 그리움의 대상이 인간의 여자였다 하더라도 무방했으며, 들개나 염소의 수컷이라 해도 역시 무방했다. 무방하였다. 내 벗은 몸을 던져 이 난해한 세계와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면 나는 수캐라도 좋았고 염소라도, 수탉이라도 좋았다.
만유의 혼음으로 세계와 들러붙으려는 욕망이, 어떻게 인간이라는 종과 속 안으로 수렴되어 마침내 보편적인 여자, 그리고 더욱 마침내, 살아 있는 한 구체적인 여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리되어 오는 것이지에 관하여 나는 아직도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 만유혼음의 그리움이 인간의 종과 속을 거쳐서 한 여자에게로 와 닿은 여정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계통 발생의 여정만큼이나 장구하고도 외로운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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