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필사-김훈 <자전거여행>

15.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 빛이 있다(133~151)

김부현(김중순) 2012. 4. 26. 16:33

15.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 빛이 있다

안동 하회 마을(133~151)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물은 그 물을 퍼 올린 사람의 생애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존영과 도산서원(陶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있는 서원이다. 1574년(선조 7)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세웠다. 사적 제170호)은 지금 천 원짜리 지폐에 인쇄되어 퇴계(退溪)의 삶이나 체취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이는 세상 속을 유통하고 있다. 경북 안동(安東)지역을 여행하는 일은 퇴계의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편린(片鱗, 원래 한 조각의 비늘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을 이르는 말)이나마 더듬어내는 일이라야 옳을 터이다.

그 오래되고 자존에 가득 찬 유림(儒林)의 고장은 두텁고도 다양한 문화의 층위를 축적해 왔는데, 거기에는 자연과 인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유(儒)와 무(巫, 무당), 강(江)과 산(山), 학문과 생업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낸 하회(河回)마을과 또 안동 김(金)‧안동 권(權)‧진성(眞城) 이(李)‧의성(義城) 김(金)‧풍산(豊山) 류(柳)‧예천(醴泉) 권‧풍양(豊壤) 조(趙)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유림 영남학파 명문의 오랜 세거지(世居地, 마을)들이 위엄과 자존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퇴계는 그 절정이다.

 

도산서당의 심층 구조를 들여다보는 즐거움

 

해마다 관광객 40~50만 명이 하회 마을에 몰리고 있고, 하회를 한 바퀴 돌아본 이들의 발길은 어김없이 인근 도산서원과 병산서원(屛山書院,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豊川面)에 있는 서원, 조선 시대 1613(광해군 5)년에 선조 때의 명신(名臣) 유성룡(柳成龍)을 위하여 세웠다)으로 이어진다. 퇴계와 도산서원은 그 관광객들에게 도대체 어떤 내용의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일까.

도산서원의 핵심부는 퇴계 재세시(在世時, 생전에)에 건립된 도산서당과 그 옆의 농운정사이다. 경내의 다른 건물들은 퇴계 몰후(歿後, 어떤 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덕을 흠모하는 후학들이 건립했다. 도산서당은 퇴계 자신의 공부와 강학의 공간이었고, 농운정사는 그 가르침을 받드는 후학들의 기숙사였다.

도산서당의 건축 구조적 특징은 그 엄결한 단순성에 있다. 그 단순성의 심층 구조를 들여다보는 일은 안동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이며 공부일 것이다.

도산서당은 맞배지붕(지붕의 완각이 잘려진 가장 간단한 지붕형식으로, 측면 가구(架構)가 노출되므로 측면관(側面觀)이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수덕사 대웅전·무위사 극락보전 등이 대표적이다)에 홑처마(처마 끝의 서까래가 일단(一段)으로 된 처마) 집이다. 그것이 그 건물의 전부이다. 그 서당은 한옥이 건축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만을 가지런히 챙겨서 가장 단순하고도 겸허한 구도를 이룬다.

그 맞배지붕과 홑처마는,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부화(浮華, 실속은 없고 겉만 화려함)를 용납지 않는 자의 정신의 삼엄함으로 긴장되어 있고, 결핍에 의해 남루해지지 않는 자의 넉넉함으로 온화하다. 그 서당 안에서 퇴계의 공부방은 2평을 넘지 않는다. 인간이 지상에 세우는 물리적 구조물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의 절박한 내적 필연성의 산물이라야 한다는 것을 도산서당의 구조는 말해주고 있다.

아마도 도산서당의 구도의 단순성은 퇴계 자신의 마음 빛깔과 그것을 실천하는 삶의 태도를 물리적 공간에 응축해놓은 구도라고 말해도 무방할 터이다. 절제의 극에 닿은 그 구도 안에서 억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작은 공부방과 마루는 서원의 언덕 아래로 커다랗게 굽이치는 낙동강과 그 언저리 인간의 마을을 향해 열려 있다.

도산서당의 위치는 인간세(人間世)와 차단된 격절(隔絶, 서로 사이가 떨어져서 연락이 끊어짐)의 공간도 아니고 인간세에 매몰된 오탁(汚濁, 더럽고 흐림)의 공간도 아니다. 그 자리는 인간의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한 굽이를 돌아서 있는 위치이며, 인간의 세상과 아름다운 거리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인간의 세상과 쉴 새 없이 통로를 개설하는 위치이다.

도산서원의 입구 매표소에서부터 강을 끼고 걸어 올라가서 도산서당에 닿은 길은 책 읽기와 세상 읽기, 혼자 살기와 더불어 살기, 세상 속에서 살기와 세상 밖에서 살기의 관계, 그리고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인간의 물리적 공간 속에서 어떻게 설정하고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도산서당은 폐쇄된 자아의 밀실이 아니다. 그 서당의 물리적 위치는 인간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거기에 함몰하지 않는 위치이다. 그렇게 해서 책과 세상은, 서로 적당히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역동적인 메시지를 상호 교환할 수 있었다. 도산서당의 심층 구조는 그 건물의 물리적 얼개에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퇴계의 마음 빛깔에 있을 것이다.

퇴계는 자리에 앉을 때 벽에 기대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단정히 않았고, 말마다 <소학>의 글대로 살았다. 짚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며, 세숫대야로는 도기를 썼고, 앉을 때는 부들자리(부들의 줄기나 잎으로 엮어 만든 자리)위에 앉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수저 부딪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반찬은 끼니마다 세 가지를 넘지 않았고 다만 가지와 무와 미역만으로 찬을 삼을 때도 있었다. 손님을 모실 때가 아니면 특별한 반찬을 놓지 않았고, 비록 어린이나 아랫사람에게 식사를 내릴 때도 반찬을 놓지 않았고, 비록 어린이나 아랫사람에게 식사를 내릴 때도 반찬을 차별하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로 보내 제상을 올리게 했다. 언제나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갓을 쓰고 서재로 나가 정좌하였고, 제자들과 마주앉아 이야기할 때는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듯 했다. 그 가르침은 자상하고 다정하였으나 제자들은 감히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나라에 세금을 낼 때는 언제나 평민들보다 먼저 냈으며, 진실로 예와 의가 아니면 남으로부터 조그마한 물건도 받지 않았으며, 예로써 받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이웃이나 친척이나 또는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한 점도 쌓아두지 않았다. 제자들을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반드시 그 부모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방안에서 요강을 쓰지 않고 반드시 밖에 나가서 소변을 보았다. 제사 때는 상을 거둔 후에도 오랫동안 신위(神位, 죽은 사람의 사진이나 지방(紙榜) 따위를 이른다)를 향해 정좌해 있었고, 제삿날에는 술이나 고기를 들지 않았다.

퇴계는 70세에 이르러 병이 깊어지자 머무르던 제자들을 돌려보냈다. 아들을 불러 장례를 검소히 치를 것과, 장례에 대한 국가의 배려와 의전을 사양하라고 엄히 당부하셨다.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가족에게 명하여 염습(殮襲, 시신을 씻긴 뒤 수의를 갈아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에 필요한 물건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눈이 내렸다. 제자들을 시켜 당신이 아끼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게 하고 임종의 자리를 정돈시킨 다음 몸을 일으켜달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한평생을 지켜온 정좌의 자세로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퇴계의 삶의 구체적 모습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여러 제자들이 함께 편찬한 언행록과 연보에서 옮겨온 것이다).

낙동강 상류의 물가에 배움의 공간을 건설하려는 퇴계의 노력은 40대 이후 계속되었다. 퇴계는 46세 때 이 물가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었고, 50세 때 한서암(寒栖庵)을 지었으며,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그는 흐르는 물가에 배움의 터를 마련하고 나서 시를 한 수 지었다.

시냇가에 비로소 살 곳을 마련하니

흐르는 물가에서 날로 새롭게 반성함이 있으리

이 물가의 배움터에서 그는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서를 한양의 임금에게 보내야 했다. 그의 연보는 한 해에도 몇 번씩 거듭되는 임명과 불취(不就, 세상일에 나서지 아니함)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70세로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해까지도 벼슬을 거두어주기를 요구하는 사직서를 임금에게 보냈다. 그의 사직은 거의 필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임금의 명을 거듭 물리치기 민망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의 주막에서조차 그는 사직서를 써서 인편에 보냈다.

사직서만이 이미 인의(仁義, 어질고 의로움)를 저버린 정치 현실의 공세로부터 자신의 초야(草野, 풀이난 들)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의 뜻은 자연에 있었으나 그는 자연의 맹목적인 아름다움에 함몰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은 인격의 내면성에 바탕을 둔 것이고, 자연은 탐닉이나 열광, 음풍농월(吟風弄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자아내어 즐겁게 놂)의 대상이기보다는 인간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는 인격적 기능으로써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의 편이었다.

도산서당의 그 엄결하고도 단순한 구도는 퇴계의 삶의 모습과 삶의 태도를 집약하고 있고, 모든 아름다움을 인간과의 관계 위에서만 긍정한 그의 미의식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 구조는 맞배지붕에 홑처마이다.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꿈을 동시 구현하는 집들

 

도산서원을 나선 발길은 하회마을로 향하게 마련이다. 하회에 갈 때는 안동대 임재해 교수가 쓴 <민속마을 하회여행> 또는 <안동 하회마을> 같은 책을 읽어야만 하회의 두터운 문화적 층위를 이해할 수 있다.

임재해 교수는 하회의 아름다움이 '조화'에 있다고 말한다. 적대 관계나 갈등 관계에 놓일 수도 있는 수많은 대립 요소가 하회에서는 조화와 포용에 도달해 있다.

양반과 상민, 유교 문화와 무속, 자연과 인간, 기와집과 초가가 강물에 굽이치는 그곳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무대로 삼아 조화와 공존을 이루며 화해로운 삶의 질감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 하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일 것이라고 임 교수는 말했다. 도산서당을 보고 나서 하회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은 유가적인 삶의 풍요함과 너그러움에 아늑함을 느낄 것이다. 도산서당의 구조가 삼엄한 이념형이라면 하회 마을은 그 이념형이 삶의 현장에서 너그럽게 적용되면서 삶의 다양한 국면을 포용하고 쓰다듬는 생활의 조직 원리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회 마을에 관한 임재해 교수의 글은, 마을의 골목과 길이 뻗어나간 방식과 모습, 그리고 집들의 좌향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엄정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보인다.

 

마을길이 아주 넓고 방사선형 체계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곧지는 않다.

골목길을 따라가 보면 멀지 않은 곳에 담장이 눈앞에 막아서거나, 담장 사이로 길이 휘어지면서 그 꼬리를 감추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길과 집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길이 대문을 찾아 들어가려면 굽이를 틀 수 밖에 없다.

마을의 골목은 그 자체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집의 분포에 따라 집과 집을 이어주는 소통 체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길이 각 집의 방향에 따라 전면부의 출입구까지 이르려니 우회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다.

길의 전체적인 체계는 집의 분포가 결정하지만, 길이 흐르는 선은 집의 방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민속마을 하회마을>).

하회의 집들은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지도 않고 서로 등을 돌리고 있지도 않다. 하회의 집들은 서로 어슷어슷하게 좌향을 양보하면서, 모두 자연 경관을 향하여 집의 전면을 활짝 개방하고 있다. 길은 그 집들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가 각 집의 대문에 닿는다. 담장은 차단이 고, 길은 연결이다. 길은 낮은 흙 담을 따라 굽이친다. 차단과 연결이 함께 길을 따라 흐른다. 길은 대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의 모퉁이를 돌아서 대문에 당도한다. 인간의 삶은 감추어져야 하고 또 드러나야 한다.

하회의 집들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꿈을 동시에 구현한다. 길은 연결과 드러남의 구도이고, 집은 차단과 감춤의 구도이다. 길이 여러 집을 애돌아서 대문에 당도할 때, 그 길은 드러남과 감춤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익명성에 매몰되어 다만 기계의 신호에 따라 작동하는 고속도로가 아니다.

하회의 집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이웃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사이를 지나서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함께 뻗어 있는 길이다. 다시 대도시로 돌아가는 고속도로는 체증에 막혀 있었고, 교통 방송의 내용은 막힘뿐이었다.

 

살아 있는 건축 역사관, 봉정사

 

봉정사(鳳亭寺)는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 기슭에 있다. 하회 마을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걸린다. 봉정사는 전국의 사찰 중에서 가장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을 보존하고 있다. 고려 중기에서부터 조선 초기‧중기‧후기에 이르는 각 시대의 건축물들이 저마다 그 시대 양식의 전형을 보이며 이 사찰의 경내에 모여 있다. 봉정사는 살아 있는 건축 역사관이라고 할 만하다.

봉정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고려 중기의 목조 건물인 극락전(국보 15호)이다. 이 극락전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인데, 건축 양식으로는 무량수전보다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봉정사 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장엄하고도 숨 막히는 산하의 경치를 눈 아래 깔고 있지는 않다.

그 건축의 질감은 무량수전과 흡사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규모는 무량수전보다 작다. 봉정사 극락전은 고전적인 단순성의 위엄과 힘의 안정감으로 당당하다. 1363년에 이 건물을 중수(重修, 낡은 건축물 따위를 다시 손질하여 고침)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건립 연대는 그보다 앞선 고려 중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봉정사 대웅전(보물 55호)은 고려 말‧조선 초의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건물의 구조로써 힘을 드러내 보이는 방식은 훨씬 더 표현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들이 스며들게 된다. 추녀(醜女, 전통 목조 건축에서 처마의 네 귀의 기둥 위에 끝이 위로 들린 크고 긴 서까래)는 지상과 일정한 각도를 이루며 치켜 올려 진다. 경내의 고금당은 조선 중기의 목조 건물이고화엄 강당은 조선 후기의 목조 건물이다.

봉정사는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사찰이다. 신라 후기에 이르러 화엄 종단은 지리산 화엄사를 본산으로 삼는 남악파와 태백산 부석사를 본산으로 삼는 북악파로 양분되었는데, 의상은 북악파의 지도자였다. 의상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해서 화엄의 교학을 크게 일으켰고, 그의 수려한 제자들과 함께 많은 사찰을 세웠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이 종이로 봉을 만들어 날리고 이 봉이 앉은 곳에 다시 절을 세워 그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 한다. 봉정사의 창건 설화로 미루어 봉정사는 부석사와 불가분의 관계인 듯하다.

 

옛집과 아파트

 

일상생활 속에서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논의는 늘 무성하다. 개항 이래 이 나라에 건설된 주택과 빌딩과 마을과 도시들은 모두 자연과 인간을 배반했고, 전통적 가치의 고귀함을 굴착기로 퍼다 버렸으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에 강제 수용되어 있다는 탄식이 그 무성한 논의의 요점인 듯하다.

비바람 피할 아파트 한 칸을 겨우 마련하고 나서, 한평생의 월급을 쪼개서 은행 빚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찬바람이 분다. 마소(말과 소)처럼, 톱니처럼 일해서 겨우 살아가는 앙상한 생애가 이토록 밋밋하고 볼품없는 공간 속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에 갇힌 사람의 마음도 결국 빛깔과 습기를 잃어버려서 얇고 납작해지는 것이리라.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산이나 구릉 따위의 지세地勢가 높았다 낮았다 함)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한 이 밋밋한 평면 위에 누워서 안동 하회 마을이나 예안면 낮은 산자락 아래의 오래된 살림집들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또 서글프다.

추사(秋史)는 대청마루 위에 '신안구가(新安舊家)'라는 편액(扁額, 종이나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걸어 놓는 틀)을 걸었다. '늙음'이 스며들어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집은 새것을 민망하게 여기고, 새로워서 번쩍거리는 것들을 부끄럽게 여긴다. 추사의 '구가' 속에는 그가 누렸던 삶의 두께와 깊이가 녹아들어 있다. 오래된 살림집은 깊은 공간을 갖는다. 우물과 아궁이는 깊고 어둡고 서늘하다. 불을 때지 않을 때 아궁이 앞에 앉으면 굴뚝과 고래가 공기를 빨아들여서 늘 서늘한 바람기가 있다.

물과 불은 삶의 영속성을 지탱해주는 두 원소이다. 이 두 원소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태어난다.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물은 그 물을 퍼 올린 사람의 생애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가 깊은 곳에 줄을 내려서 거기에 고여 있는, 갓 태어난 원소를 지상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 물은 아파트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익명성의 물과는 수질이 다르다. 아궁이는 땅속과 하늘을 연결하는 바람의 통로이다. 그 통로의 입구이다. 불길은 고래를 따라서 흐르다가 연기가 되어 굴뚝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오른다.

불길은 흩어져서 없어지고 방바닥에는 온도가 남는다. 그 온도 위에서 사람들은 자식을 낳고 기른다. 사람이 눕는 방바닥 밑으로 하늘과 땅이 소통하고, 그 통로를 따라 불길이 흐른다. 우물 속의 물과 아궁이 속의 불은 언제나 새롭게 빚어지는 원소들이다. 이 새로움은 우물과 아궁이라는 늙음의 형식 속에서 빚어진다. 새로움의 내용은 늙음의 형식 안에 편안하게 담긴다. 이것은 몽상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누워 있는 방바닥 밑 땅속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과학 현상이다.

안방은 물, 불, 밥, 생명 같은 원형질의 공간이다. 안방은 땅속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밑으로는 하늘과 통한다. 마루는 어떤가. 마루는 고래의 불길이 닿지 않고, 땅으로부터 일정한 높이로 떨어져 있다. 그래서 마루는 서늘하고, 불길이 닿지 않아도 습기가 없다. 마루는 안방보다 훨씬 더 사회화한 공간이고, 사회적으로 진화한 공간이다. 마루는 움집의 추억이나 땅속의 원형질로부터 먼 거리를 진화해 왔다.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내용은 그 서늘함에 깃들이는 공적 개방성이다. 그리고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정도는 마루와 땅 사이의 거리, 그 빈 공간의 높이다. 사람이 신발을 벗지 않고도 편하게 걸터앉을 수 있는 높이에서 마루의 진화는 완성된다. 그러므로 개들은 마루 밑에 들어가서 땅에 배를 깔고 자는 것이 마땅하다.

마루 위를 지나는 대들보와 마루 천장에 드러난 서까래는 이 공적 개방성의 공간 위에 논리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마루는 세상을 맞이하는 공간이며, 더 넓은 공간과 소통되는 공간이다. 비록 작은 평수의 마루라 하더라도, 마루는 그 열려짐의 크기로 세상 전체를 향한다. 그렇게 해서, 안방에서 문지방을 넘어서 마루로 나올 때 우리는 더 크고 더 넓은 삶의 새로운 질감 속으로 들어선다.

오래된 살림집의 문짝들은 공간을 구획하고 차별화하지만, 격절시키지는 않는다. 미닫이문을 열고 드나들 때 사람들의 공간 감각 속에서는 이쪽과 저쪽이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충돌하지 않는다. 미닫이문을 닫을 때, 문 밖의 공간은 제거되거나 격절되지 않는다. 문 밖의 공간은 당분간 저쪽으로 밀쳐질 뿐이다. 미닫이문은, 열려 있을 때나 닫혀 있을 때나 언제나 문이 갖는 소통의 기능을 수행한다. 미닫이문은 옆으로 포개지면서 열리고 닫힌다. 미닫이문은 벽을 헐어내고 만든 통로가 아니다. 미닫이문은 애초부터 통로로 태어난 문이다. 이 문이 소통과 구획을 동시에 수행한다.

호텔이나 아파트의 여닫이문은 벽을 헐러내고 뚫은 문이다. 이 여닫이 문짝은 문 밖의 공간을 완벽히 차단하고 제거한다. 차단 기능이 클수록 좋은 문짝으로 꼽힌다. 아파트의 도어는 사람이 드나드는 순간에만 문이고 닫혀 있을 때는 벽이다. 그러니 문이라기보다는 벽에 가깝다. 드나들어야겠다는 욕망과 외부를 차단해야 한다는 욕망이 그 문짝 속에 기묘하게도 뒤엉켜 있다. 평생을 이 철벽같은 문짝 안에 갇혀서 살아왔다. 아름다운 것들은 이제 액자에 담긴 그림처럼 생활과 떨어져 있다. 이 그림을 다시 삶 속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는 것인가. 집 살 때 꾼 돈 이잣날은 흥부네 끼니 돌아오듯이 돌아온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안면의 옛집들을 기웃거릴 때, 오늘의 빈곤은 가슴 아프다. 이 아픔 속에 좀 더 좋은 미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