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필사-김훈 <자전거여행>

17. 복된 마을의 매맞는 소(162~171)

김부현(김중순) 2012. 5. 3. 15:42

17. 복된 마을의 매맞는 소

소백산 의풍 마을(162~171쪽)

 

봄은 늘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다만 지금은 겨울일 뿐이다.

 

숯불에 갈비 구워먹는 '가든'과 낮이고 밤이고 러브하는 '파크'가 온 국토의 산자수명한 명승 처처에 창궐하였다. 요즘에는 산봉우리마다, 툭 터진 들판마다, 마을 어귀마다 이동통신회사의 기지국 안테나들이 들어섰다. 패사디나 우주선 발사기지의 축소 모형처럼 생겼다.

이제 가든과 파크와 기지국은 이 국토의 가장 압도적인 풍경이다. 어느 마을, 어느 골짜기, 어느 국도 연변에서나 이 3자는 단연코 우뚝하고 단연코 두드러진다. 먹고, 마시고, 러브하고, 전화통에 대고 수다 떠는 풍경인 것이다. 하기야 전화통이 있어야 불러 모아서 먹을 수도 있고, 불러내서 러브도 할 수 있을 테고, 또 러브 전후에는 잘 먹어두는 것이 좋을 테니까 이 3자는 공존공영 관계다. 석세의 길을 저어가는 자전거는 이 누린내 나는 인간의 풍경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피해갈 뿐이다.

경북 영주군 부석면 부석사 절 마당에서 출발하는 자전거는 마구령(894미터) 옛길을 따라서 소백산을 넘을 작정이다. 소백산을 넘어가면 주막거리 옛 마을이다. 옛길은 여기서 다시 세 갈래로 나뉜다. 산을 내려온 방향으로 계석 가면 강원 영월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경북 봉화이고, 왼쪽으로 가면 충북 영춘이다. 강원‧충북‧경북 3도의 접경은 주막거리에서 만나고, 그래서 주막거리 마을의 앞산 이름은 삼도봉(三道峰)인데, 삼도봉 꼭대기에 소를 매어놓으면 이 소는 3도의 풀을 다 뜯어먹는다.

저전거는 주막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서 의풍으로 간다. 여기는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끼인 이른바 양백지간(兩白之間)으로 <정감록>이나 <남사고(南師考)> 같은 비결서에 이르기를 세상의 환란과 핍박을 피할 수 있는 오목하고 포근한 땅인데, 노루목‧어은‧용담‧중마‧송내‧텃골‧솔개실‧샛터‧솔밑‧와골‧어둔이 같은 마을이 그곳이다.

여기는 삼무(三無)의 땅이다. 가든이 없고, 파크가 없고, 기지국이 없다. <정감록>은 바로 이 삼무의 축복을 예언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정감록>에 따르면 환란은 세상으로부터 온다. 자연과 인간의 직접성을 훼손하는 모든 인위적 장치와 제도가 재앙이며 환란인데, 인간은 이 사나운 세상이 쫓아올 수 없는 오목한 땅에 터를 잡고 깊이 숨어서 생명의 위엄과 생명의 자연성을 보존해야 하며, 이 은둔과 보존이야말로 저 사나운 세상을 향하여 최후의 총반격을 감행할 후방 기지인 것이다. <정감록>에 따르면 그러하다. 배운 사람들아, <정감록>을 웃지 마라. <자본론>이 무너지고 레닌의 목이 잘려서 세기의 땅바닥에 나뒹군다고 해서 평등의 열망이 소멸된 것이 아니고, 정진인(鄭眞人)이 끝끝내 인간의 세상에 강림하지 않는다 해도 생명을 온전히 간직하려는 인간의 열망은 오히려 새롭다.

부석사를 떠나서 마구령 어귀에 들어섰을 때 소백산맥에는 눈발이 날렸다. 눈발 속에 풀린 겨울 산맥은 신기루처럼 몽롱했고 무서웠다. 자전거는 여기서부터 인기척 없는 기나긴 오르막으로 산맥을 넘어야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우체국 집배원이 하루에 두 번씩 이 고개를 넘는다.

흐린 날의 겨울 산맥은 멀어서 존엄해 보였다. 거기에 비는 심정으로 기어를 풀어내렸다. 1단으로 겨우겨우 저어서 나아갈 대, 이윽고 몸에 길이 붙기 시작했다. 몸은 비록 겨우겨우 나아갔으나, 길에 붙은 몸은 겨울 산맥이 무섭지 않았다. 몸을 길에 갈아서 산을 오를 때, 겨울 산맥은 낮고 또 낮게 파고드는 인간의 몸을 허락해주었다.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산맥은 크고 포근하였다. 산봉우리에서 더 먼 산봉우리를 바라보면 거기에 이미 봄이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잎 진 숲과 마른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신생의 희뿌연 기운은 서려 있다. 봄은 이 산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이 산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봄은 늘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다만 지금은 겨울일 뿐이다.

주막거리에서 의풍에 이르는 물가 마을은 <정감록> 속의 예언의 땅이다. 세상의 환란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이 물가로 몰려들었다. 6‧25 전쟁 때까지도 그랬다. 더러는 떠났고 더러는 남아 있다. 이 예언의 땅에는 소를 몰아 밭을 가는 전통적 농업 방식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신석기 초기에 정착된 농업 방식이다. 산비탈 고추밭이나 콩밭에 경운기나 트랙터를 들이댈 수 없으므로 소가 아니면 될 일이 아니다. 지금 의풍 마을의 어린 소들은 겨우내 매를 맞아가면서 밭갈이 일을 공부하고 있다. 금년 가을에 늙고 경험 많은 소를 팔아치운 농민들은 아직 고생이 뭔지 모르는 두 살, 세 살짜리 어린 소들을 추수가 끝난 빈 밭에 끌고 나와 일 공부를 가르치는데 쉽지가 않다.

이 마을 노병만 씨네 세 살짜리 소는 도통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 직진인지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U턴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천둥벌거숭이다. 고랑을 따라 똑바로 걸을 줄도 모르고, 쟁기를 끌고 오는 주인의 보폭에 걸음을 맞출 줄도 모르고 옆 고랑을 밟아 뭉개지 않고 사뿐히 U턴할 줄도 모른다. '와와' '이랴이랴'도 못 알아듣는다.

일 배우다 말고 자꾸만 군입질을 하려고 한눈을 팔아서 주둥이에 멍을 씌웠다. 때리면 대가리를 내두르며 반항하고, 더 때려주면 아예 팽개치고 집 쪽으로 걸어간다. 일 공부를 하면서도 시선은 늘 집쪽을 향해 있다. 노씨는 이놈을 겨우내 가르쳐서 말귀를 뚫어놓아야 내년 농사를 할 수 있다. 두 살 때 가르쳐야 했는데 그때 새끼를 배서 1년을 봐주었더니 이제 대가리가 커버려서 말을 더 안 듣는다는 것이다. 소도 머리 좋고 성질 좋은 놈이 따로 있는데, 이놈은 워낙 돌대가리여서 어제 배워준 것도 하루 지나면 다 까먹는다고 노씨는 제 집 소를 흉본다.

의풍 마을의 소들은 대개 25년을 일한다. 어린 소들은 이 기나긴 필생의 숙업을 예비수업 받고 있었다. 노씨는 이 한심한 놈을 데리고 내년 봄에 2천 평을 갈아야 한다. 매맞는 소가 불쌍한지 때리는 인간이 더 가엾은지, 의풍에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때리고 맞는 것이 다 한가지로 보였다.

어느 쪽이 때리고 어느 쪽이 맞는 것이 아니다. 양쪽 모두 자신의 운명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것이 <정감록>의 축복이었을까. 그러니 세상에 복지(福地)란 없는 모양이다. 밭두렁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오랫동안 소를 들여다보았다. "이놈이 좀 더 맞아야 안 맞고도 일할 수 있게 된다"라고 노씨는 말했다.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노루목 김삿갓 옛집

의풍리(충북 단양군 영춘면)에서 노루목까지는 산길을 자전거로 천천히 저어서 40분 거리다. 여기는 강원도 영월 땅이다. 이 깊은 산속에 김삿갓(金炳淵, 1807~1863)의 옛집이 있다. 이 집은 1972년까지 무너진 안채가 남아 있었고 바깥채는 온전해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20세 무렵에 방랑길에 올랐다. 산천의 아름다움이 그를 떠돌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더러움이 그를 떠돌게 했다.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선천부사였는데 홍경래에게 투항했다.

그는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하늘에 사무치게 통탄하는 글'로 장원급제했다. 어렸을 때 멸족을 피해서 노루목에 숨어서 자란 그는 조부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의 운명은 충과 효를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김삿갓은 충도 아니고 효도 아닌 길을 찾아서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버린 시대의 벌판을 떠돌았다. 그리고 그는 그 길을 찾지 못한다. <입금강(入金剛)>은 그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쓴 시다. 이 시는 무섭고도 단호한 세상 버림의 노래다.

 

글 읽어 백발이요, 칼 갈아 사양인데(書爲白髮劍斜陽)

하늘 땅 그지없는 한 가닥 한은 길어(天地無窮一恨長)

장안의 붉은 열 말 기를 써 다 마시곤(痛飮長安紅十斗)

갈바람에 삿갓 쓰고 금강으로 드노라(秋風簑笠入金剛)

 

충‧효가 인간에게 무의미하듯이, 글과 칼도 다 필요없는 것이다.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천지에 사무치는 한만이 깊다. '금강으로 드노라'의 '들 입(入)' 자 한 개로 그 무궁한 원한과 단호한 작별을 통합하고 있다.

소백산 너머 부석사 안양루에도 그의 시 한 편이 결려 있다. 그는 백발이 다되어서 고향 가까운 부석사까지 왔지만 마구령 너머 고향 집에는 가지 않았다. 그는 전라도 동복(同福) 땅에서 한 행려병자의 모습으로 죽었다. 한평생 길로 떠돌던 그는 길바닥에서 죽음으로써 길없는 세상에서의 생애를 완성했다. 그의 시신은 아들의 등에 업혀 마구령을 넘어서 살던 터로 돌아와 묻혔다. 여기도 그의 고향은 아니다. 그의 생애를 떠올릴 때 노루목에 이르는 자전거 길은 한없이 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