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헐렁한 군주론

인문학큐레이터의 <헐렁한 군주론>-고전은 경건한 자세로 대하라

김부현(김중순) 2013. 1. 31. 13:15

가장 훌륭한 군주는 앞서 살았던 이들의 행적을 따르며 그들의 업적을 모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인들의 행적을 그대로 답습하는 일이나 모방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역량에 필적하는 일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항상 탁월한 인물들의 방법을 따르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모방하려고 하는 이유는, 비록 그들의 역량에 필적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업적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6장

 

고전은 경건한 자세로 맞아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을 능멸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다 정권이 바뀌자 감옥에서 출소하게 된다. 공직에서 쫓겨난 그는 시골에 내려가 은둔생활을 하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한 단락이다.

 

“저녁이 되면 나는 선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돌아와 서재로 들어간다네. 문 앞에서 진흙과 먼지투성이의 옷을 벗고 내가 궁정에서 입었던 정장으로 갈아입지. 이렇게 정장을 하고 나는 옛 조상들의 오래된 궁정으로 향한다네. 그곳에서 나는 옛 선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묻는다네.”

 

마키아벨리는 열두 살 무렵에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으며, 그 후 피렌체 대학에서 인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이런 유능함 때문에 채 서른 살도 안 된 1948년 피렌체의 제2서기관에 임명되어 14년간 고위공직자로 활동하며 외교, 내무, 병무 등의 일을 두루 맡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성벽관리위원회라는 곳에서 미관말직을 맡아 하급공무원으로 보냈다. 그래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는 비법이 있었다. 낮에는 수수한 차림으로 관청에 나가 그렇고 그런 일을 처리했지만 퇴근 후 어둠이 내리면 그는 옷장에서 가장 좋은 정장을 꺼내 입고 그리스-로마 고전을 읽었다. 정장을 차려 입는 이유는 “옛 대가들을 경건한 마음으로 만나 뵙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풀벌레 우는 고요한 어둠속에서 정장을 차려입고 바른 자세로 앞서간 선현들과 글로 만나는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 구절을 대하는 순간 필자는 머리가 서늘해지고 가슴이 뭉클 했다. 책으로 옛 선현들을 만나기 위해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그의 모습에 감명 받았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대가를 만나고 대작을 대할 때에는 경건하고 진실된 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고전을 읽는 것은 가장 위대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처음 읽을 때는 새 친구와 같고 다시 읽을 때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다. 고전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고, 고전에서 배우지 못하는 나라 역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대학시절 꿈의 크기였다

 

“젊을 때는 아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신중해지기 어렵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무모하게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그리고 때로 그것을 달성한다. 수 세대에 걸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미국의 소설가 펄벅Pearl S. Buck의 말이다.

꿈을 이루는 모티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멘토를 만나는 일이다. 멘토를 직접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많은 성공자들은 멘토를 고전에서 만났다고 한다.

고전을 만나는 것도 결국 그들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이 오히려 더 진정성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능한 일들은 꿈이 아니라 계획이다. 꿈이란 원래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구석이 있다. 남들이 뭐라던 꿈을 크게 갖자. 당신의 꿈이 큰 지 작은지 알아보고 싶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보라. 당신이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꿈을 털어놓았을 때 콧방귀를 뀐다거나, 불가능하다고 펄쩍펄쩍 뛰거나, 주제 파악을 하라고 몰아 부친다면 그것은 큰 꿈인 동시에 진정한 꿈이다. 반면 주위 사람들이 대부분 가능하다고 응원을 해 준다면 그것은 작은 꿈이다. 꿈이 아니라 목표에 가깝다.

여자대학교에서 특강을 할 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두 가지 형태로 반응한다. 우선 매너가 있는 절반 정도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나머지 절반은 뜬금없이 ‘네가 뭔데 내 꿈을 물어보느냐!’는 반응이다.

꿈을 이야기하는 학생 역시도 교사, 의사, 전문직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몇 년 후의 목표다. 심지어 ‘백마 탄 왕자를 만나는 것’이 꿈이라고 답하는 학생도 있다. 이 정도까지는 참을만하다.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라는 여학생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솔직히 나는 속이 터진다. 현모양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꿈 치고는 너무 소박?한 것 같아서다. 입으로 아무리 21세기는 여성시대라고 외쳐본들 무슨 소용인가. 이렇게 해서는 여성시대라는 호기를 제대로 써먹을 수가 없다. 면전에 대놓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왜 대학에 다녔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그냥 입을 닫는다. 가능성 여부를 떠나 꿈이 작은 사람은 미래가 작고, 꿈이 큰 사람은 미래도 크다. 어릴수록 꿈은 크다. 대부분 나이가 들수록 사회에 적응한다는 명목으로 꿈의 크기를 확 줄여 버린다. 하지만 큰 꿈이 성공을 가져온 사례는 수없이 많다.

<하버드의 여자들>이란 책을 쓴 갤리즈는 미국의 기업경영자 후보군단 중 최고의 여성후보들이었던 하버드 경영대학원(HBS)을 1975년에 졸업한 여학생들의 10년 후를 추적 조사했다. 1975년은 HBS를 졸업한 여학생 수가 처음으로 10퍼센트를 넘었던 기념비적인 해였다. HBS에 여학생이 입학한 해가 1963년이니까 12년 만에 두 자릿수 여자 졸업생을 배출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탄탄대로의 미래를 개척하고 있지는 못했다. 제아무리 하버드대학이라 해도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지는 못했다. 아무리 명문대라고 해도 학교는 학교일 뿐 비즈니스 현장이 아니다. 학교는 온실이고 실험실이기에 약육강식의 사회와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월스트리트>기자 출신인 저자는 이 중 여섯 명을 골라 집중 추적했다. 결론적으로 성공자와 실패자의 기준은 단 하나, 대학시절의 ‘꿈의 크기’였다.

능력이나 성격을 압도할 정도로 중요한 성공요인은 CEO가 되겠다는 야심찬 꿈이었다. 그냥 막연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CEO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CEO 자리에 가장 근접해 있더라는 것이다.

 

도전에는 응전뿐이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보면 잘 되겠지’라는 허무맹랑한 태도보다는, 어디까지 올라가고야 말겠다는 강철같은 신념으로 일할 때 더 효과적으로 목표나 꿈에 이를 수 있다는 반증이다. 나는 ‘산업화적 근면성’을 싫어한다. 그냥 열심히 오래 일하는 것이 바로 산업화적 근면성을 대표하는 경우다. 50년 전 국민소득 80달러 일 때, 밥을 굶지 않게 해 준 것은 산업화적 근면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첨단정보화 시대에는 산업적 근면성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단지 밥을 먹느냐, 밥을 굶느냐의 새마을운동식 잣대로 미래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꿈과 목표의 출발점은 도전이다. 도전에는 응전뿐이다. 멈칫하는 동안 기회는 사라진다. 힘들고 귀찮아서 피한 한 번의 기회는 다음, 그 다음의 기회까지 사라지게 만든다.

 

"역사는 C&R이다. 역사는 도전(Challenge)에 대해여 응전(Response)이다. 도전이 약하면 응전도 약해진다. 적절한 도전으로 문명이 탄생할 수 있다. 역사는 도전하는 자의 몫이다"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지 않은 일에도 후한 점수를 준다. 핑계를 만들고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 후한 점수를 주는 이유는 한결같다. “내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고 도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라는 기상천외한 이유를 들이댄다. 하지만 세상은 당신이 도전한 것들로 평가한다.

도전과 응전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사람이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부장관이다. 지구위의 여성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여성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힐러리, 그녀의 인생은 기적이었고 그 기적을 만든 건 도전의 연속성 때문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남편이 무기력해 보일 정도로 똑똑했던 힐러리였지만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 Living History>를 보면, 어린 시절 힐러리의 꿈은 교사나 핵물리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학과 지질학이 낙제점이라 일찌감치 꿈을 접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웰슬리 대학,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이 대학에 다닐 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하소연하자, 아버지는 당장 때려치우고 돌아오라고 했고 어머니는 말렸다. 어머니는 딸이 중도하차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엄했다. 힐러리가 네 살 무렵 옆집 친구에게 맞고 들어오자 “가서 때리고 와”라고 다그쳤던 어머니였다. “겁쟁이는 내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마”라고 엄포를 놓았다.

힐러리는 그 때를 떠올리며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신념으로 어머니의 뜻을 따라 대학을 졸업했다. 누구나 정말 힘들 땐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야 편한 법이다. 그것이 집이던, 과거든, 친구든....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순간 도전은 멈추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