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에는 타인의 무력을 이용하는 경우와 자신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역량(virtu,비르투)에 의한 경우와 운명(fortuna,포르투나)에 의한 경우가 있다. <군주론>1장
군주의 필수과목은 ‘비르투와 포르투나’이다
군주론에서 가장 유명한 두 단어는 ‘비르투virtu(능력)’와 ‘포르투나fortuna(행운)’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두 가지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르투’는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내부적 요소, 이를테면 능력, 재능, 도전정신, 열정 등과 같은 것이다. 반면 ‘포르투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상황 등과 같은 외부적 요소를 말한다. 고스톱을 칠 때, 어떤 패가 들어오는가는 포르투나의 차원이지만, 그 패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비르투에 따라 결정된다. 조직도 개인도 불리한 패를 받은 것을 탓하기보다는 그 패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군주론>에서 말하는 ‘영토’의 개념을 국가가 아닌 기업이나 개인의 범주로 생각해보면자. 기업의 경우 시장점유율이나 경쟁력 등이 될 것이고, 개인의 경우에는 능력이나 리더십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작금에는 시장점유율이나 경쟁력을 다른 사람의 힘을 이용해서 증가시킨다는 발상은 한 물 간 전략이다. 특히 시장점유율이란 용어는 그 자체가 점점 무의미해져가고 있다. 그것은 대량생산체제 하에서 유용한 개념이었다. 시장점유율보다는 수익성이나 가치, 기업철학이 더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다.
네 가지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기업들이 시장점유율이라는 외형위주의 대량생산체제에 집중했다. ‘대량생산 대량판매’라는 시스템 하에서는 고객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건을 만들어 놓기만 하면 사용하는 고객이 생긴다는 초헌법적 발상이다.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고 고객들의 욕구가 다양화되면서 점차 대량생산시스템이 사라지고 소량다품종 생산시스템이 정착되었다. 대량생산시스템이라는 레드오션 시장이 판을 치고 있는 와중에 이를 거부하고 기업의 이미지, 문화, 철학과 같은 무형자산에 접근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이 있다.
애플Apple이다.
애플이 주목받는 기업철학의 중심에는 처음부터 ‘고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당시 많은 기업들은 고객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을 때였다. 오직 시장점유율과 이익이라는 외적성장을 통해 몸집불리기에 충실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애플과 구글Google은 비정형적인 선구자적 기업가정신이 스며들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비슷한 기술과 가격대로 경쟁을 하며 ‘땅 짚고 헤엄치기식’ 경영을 해 나가고 있을 때 애플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물론 혹자는 창작이 아니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독자적’이라는 의미는 특정 제품을 쓴 뒤에 그 제품을 다시 구매하게 하는 충성도를 포함한 의미다. 수많은 기업들이 가격 위주의 경쟁을 하고 있을 때 애플은 가격경쟁에 뛰어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만든 독자적 제품에 대한 경쟁력이 있었기에 굳이 가격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고 경쟁 상대도 딱히 없었다.
제품의 가격은 비쌌지만 고객을 위한 다양한 편리성과 효율성을 무기로 제품을 잇달아 출시했다. 비싸면 수요가 적어지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 메카니즘인데 가격이 비싼데도 고정사용자, 즉 충성도가 높은 얼리어답터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서 다른 기업들과의 큰 차이가 있다. 다른 기업의 고객들은 언제든 타 경쟁사의 더 싸고 좋은 제품으로 바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즉 충성도가 없다는 의미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기업들이 이익을 줄여가며 가격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애플은 충성도가 높은 제품으로 승부를 했다.
충성도가 높은 얼리어답터들은 상대적으로 가격에 무감각하다. 반대급부로 수익은 천문학적인 수준이 되었다. 기업들이 새로운 영토 확장이라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려면 다른 사람의 힘도 필요하지만 결국 자신의 기술과 이미지, 철학으로 승부해야 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힘이 기업의 힘이 되고 국가의 힘이 된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다르다. 기업 역시 개인의 힘이 모인 합체다.
위대한 군주는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
‘병법의 경전‘으로 불리는 <손자병법>의 가장 큰 가르침은 역설적이게도 싸우지 마라는 것이다. 전쟁에 관한 전술과 전략을 총망라했지만 오히려 될 수 있으면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의 저자 강상구는 손자병법을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싸움을 피하는 비겁의 철학이자 공존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승리를 가장 값진 승리라는 것이다. 싸움의 목적은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땅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역시 가급적 무력 사용을 자제하라고 했지만 일단 싸움을 시작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끝장을 내라는 것이다. 전쟁은 연습이 아니다. 스포츠도 아니다. 패자부활전도 없다. 패하면 끝장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 손자는 ‘전쟁은 속임수’라고 했다. 승리가 참이고 패하면 거짓이다.
게다가 손자는 이기는 싸움만 하라고 조언한다. 전쟁의 대부분은 싸우기 전에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군대를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면 백성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살았기 때문에 굳이 무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이를 일컬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군주는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순왕(舜王)은 형법을 수정하고 고도에게 교도소 책임을 맡겼지만, 백성들이 법을 어기지 않아 형법이 필요 없었다. 이를 두고 `용병술이 뛰어난 군주는 군대를 포진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왕(禑王)이 묘족을 토벌할 때 순은 무용용 창과 방패, 그리고 깃털부채만으로도 묘족을 귀순시켰다. 이를 일컬어 `군대를 포진하는데 뛰어난 군주는 작전을 펼치지 않았다`고 한다. "실패의 교훈을 받아들이는데 뛰어난 군주는 패배해도 멸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를 자주하고 승리를 거듭하는 군주는 망할 우려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손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쟁이 거듭되면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 진다"
잦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면 군주는 교만해 지기 쉽다. 교만한 군주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백성을 통치한 것, 이것이 바로 오나라가 멸망한 원인이다. "전쟁에서 다섯 번 승리한 나라는 화를 당하고, 네 번 승리한 나라는 폐해를 겪으며, 세 번 승리한 나라는 패권을 다투고, 두 번 승리한 나라는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며, 한번 승리한 나라는 제왕의 자리를 차지 할 수 있다. 승리한 횟수가 많아 천하를 얻은 나라는 드물지만, 망한 나라는 부지기수다."
이것이 바로 중국 고서에서 강조하는 부분이다. `잦은 전투는 병사들을 지치게 해 망하는 경우가 많다` 는 것이다. 잦은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면 당연히 국운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많이 이길수록 오히려 더 위험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전쟁은 이겨도 피를 흘리고 막대한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중국 순임금의 ‘사목사총 리더십’
동양 고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은 <서경(書經)>이다. 서경은 요순시대의 요임금과 순임금에서 시작해 진나라 목공에 이르기까지의 제왕들이 행한 정치적 행적과 발언에 관한 기록이다.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이 한 기업의 경영자가 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순임금이 왕으로 즉위하고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경영자가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일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서경에 따르면 순임금은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벽사문 명사목 달사총闢四門 明四目 達四聰, 사방의 문을 열어놓고, 사방의 눈을 밝히고, 사방의 귀를 통하게 하셨다.”
순임금은 사목사총(四目四聰)의 리더십을 가장 먼저 행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순임금은 우선 백성을 생각했고, 백성을 잘 살피기 위해서 사방의 문을 열어 사방을 잘 살피고자 노력했다. 그는 모든 방향으로 눈과 귀를 활짝 열어 정치의 비전을 세우고자 했다. 이러한 리더십은 현대 경영 환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순임금의 사목사총 리더십은 요순시대가 평온한 시기였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약육강식이 난무하는 혼란기에는 마키아벨리즘적인 강력한 힘의 통치가 필요하다. 중국의 역사에서 대부분 도덕보다는 칼이 더 난무했다. 그리고 결과도 도덕보다는 칼이 좋았다.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훈장 선생이 아니라면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시대가 급변하는 상황하에서는 순임금의 덕치는 악의 논리에 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즐기는 장기는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가 천하제패를 두고 경쟁을 벌였던 각축전을 모방한 게임이다. '역발산기개세'란 칭송을 받았던 항우는 파죽지세로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장악했다. 24살에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고 거병하여 고작 3년 만에 거록전투에서 승리하고 18명의 제후를 왕으로 봉했다. 당시 유방의 한漢나라도 흥하는 시기였지만 중국의 운명을 거머쥔 이는 초패왕 항우였다. 그의 나이 불과 항우의 목표는 천하를 제패하고 권력을 잡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유방의 아첨에 당해 기회를 놓친다. 유방이 수하 100명을 대동하고 홍문에 도착하여 항우를 만나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항우의 자존심과 허영심을 최대한 만족시켰다.
“신은 장군과 힘을 합쳐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장군께서는 하북河北, 신은 하남河南에서 작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본의 아니게 먼저 입관하여 진나라를 무찌르고 이곳에서 다시 장군을 뵙게 될지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소인배가 참언으로 장군과 신을 이간질시켜 틈이 생기도록 했습니다.”라고 항우에게 아첨을 떨었다.
항우의 롤러스케이터 같은 삶은 크게 흥했다가 크게 몰락했다. 4년을 끌었던 초한전쟁에서 항우는 마지막 전투인 오강烏江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31살의 나이에 그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를 남기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너그러움은 생사를 다투는 전쟁터에서 필요한 단어가 아니다. 항우는 유방의 알랑거림에 선을 베풀어 전쟁의 판세를 상대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도덕군주들의 드라마 시청률은 바닥수준이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세종은 ‘덕德’으로 나라를 통치하여 가장 존경받는 왕이다. 세종을 연구하여 최근 <세종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다>를 쓴 극작가이자 소설가 신봉승씨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종대왕 관련 드라마나 사극은 시청률이 낮다. 왜냐하면 세종대왕은 거짓없이 너무 덕치에 입각한 바른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사극이나 드라마에서 시청률이 높은 것은 상식을 넘어선 비정상적인 이야기가 있을 때 시청률이 높게 나온다. 도덕을 넘어선 부도덕, 출생의 비밀, 재벌 2세의 뒤바뀐 운명, 삼각관계나 치정에 얽힌 사랑이야기가 곁들어져야 시청률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의 이중적 성향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겉으로는 도덕군자이면서 속으로는 비도덕을 서슴지 않는 측면이 있다는 의미다.
많은 사가들이 세종대왕이 가장 잘 한 것으로 한글창제보다는 용인술이었다고 한다. 청백리의 상징이었던 집현전 학자이자, 세종의 측근이었던 최만리는 세종의 가장 큰 치적인 한글 창제를 앞두고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다.’라고 반대 상소를 올렸다. 세종은 최만리의 목을 치지 않았다. 최만리는 세종의 노여움을 사 친국을 당한 후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
반면 태종은 즉위에 성공하였으나 사병 해산을 반대하던 매부 이거이 부자를 처형했다.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도 처단했다. 그 뒤로 개국 공신이었던 이숙번, 이무 등도 숙청했다.
역사는 말한다. “태종의 연이은 숙청은 신생국 조선의 왕권을 확고하게 했으며, 뒤이어 왕권을 물려받은 세종은 500년 조선왕조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500년 역사를 연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의 세계화에는 실패한 것이다. 역사는 그를 독재자라 부르지 않는다. 정치학적으로 보면 조선의 역사는 대부분 세습의 역사였다. 따라서 세습의 역사를 독재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스트적인 역사의 편린들이 조선의 역사에도 투영된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가 말한 ’수단과 방법’에 총칼로 백성들을 죽이는 것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다.
아부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대상이다
아부는 아주 부정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특히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치명타를 주기도 한다. 아부는 부족한 자신의 능력을 아부로 만회하려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른바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는 도덕교과서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부는 겉과 속이 달라야 한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접근하고 다르게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이자 예의다. 친구를 만날 때와 비즈니스로 만날 때는 표정도 말도 행동도 옷차림새도 달라야 한다. 도덕교과서가 사회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착한 생각일 뿐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리면, 부모의 도움을 받아 학교 다닐 때와 스스로 독립하는 사회인이 되었을 때는 180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을 내세우는 도덕교과서와 ‘선+악’을 내세우는 사회교과서를 구분하라는 말이다. 사회교과서의 기본 맥락은 이해관계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라는 것이다. 이해관계의 다른 말은 돈과 권력이다. 돈과 권력의 다른 말은 성공이다. 도덕은 과정이고 결과는 성공이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덮어지는 것이 세상이치다. 불평불만은 패자의 몫이다.
처음 은행에 입사했을 때 입사 동기는 11명이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여전히 증권사, 보험사, 금융컨설팅과 같은 금융 관련업종에 대부분 근무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은 세 명 정도다. 세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직장 용어로 ‘아부阿附’를 잘한다는 것이다. 상사의 비위도 잘 맞추고 상사가 부르면 만사 제쳐 놓고 달려가는 것이다. 술자리든 당구장이든 목욕탕이든 언제 어디서든 애니콜이다.
그런데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부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들려고 비위를 맞추면서 알랑거리다”이지만, 아부는 비속어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남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상대와의 교감의 폭을 확대해 간다는 의미다. 상대의 마음을 잘 간파해서 헤아려 준다는 의미다. 도덕교과서에는 아부는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교과서에는 아부가 성공의 중요한 밑천이다. 아부는 기술이다. 아부는 능력이다. 아부는 배움의 대상이지 결코 지탄의 대상이 아니다. 아부의 다른 표현은 배려인 동시에 이해고 공감이다. 서로 자신의 주장만 한다면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 상사가 ‘바담 풍‘이라고 해도 눈치껏 ’바람 풍‘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 상황에서 옳고 그름은 별개의 문제다.
결국 아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튼튼한 동아줄을 잡게 된다. 간혹 썩은 동아줄을 잡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부를 잘했던 친구들이 성공했거나 성공에 가까워지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성공의 기준은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조직 내에서 ‘돈과 권력의 집중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아부를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성공은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 성공한 사람들이 오롯이 도덕교과서로 성공 스토리를 쓸 수 있었겠는가. 과정은 치열했고 고단했을 것이다. 모욕과 아부와 눈물 젖은 빵을 먹은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공하면 과정은 추억이 되지만 실패하면 그 과정은 한이 된다. 아부의 직장용어는 이해이자 배려다.
아부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하며 경멸하는 사람이라면 성공의 사다리를 타는 것은 쉽지 않다. 무릎을 꿇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무릎을 꿀릴 수 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그런 빵이 없다는 것을 안다. 역사를 보면, 꿋꿋한 소신으로 할 말을 다하며 목숨을 내놓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충신들도 있었다. 그런 도덕적 소신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충신은 가난했고 아첨꾼은 부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조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아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정립해야 할 때다. 세상이 변하면 가치관도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면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변했다는 반증이다. 어쩌면 아부는 이상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처세술이자 지혜로운 의사 소통기법이다.
모든 성공은 달콤한 안락주의를 수반한다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경험의 중요성이 점점 축소되고 있다. ‘경험=전문가‘라는 등식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132년 전통의 코닥이 얼마 전 파산했다. 138년 전통의 필름업체인 독일 아그파가 2005년 한발 앞서 파산했는데도 코닥은 왜 비슷한 길을 걸었을까. 아그파는 1889년 흑백필름을 개발했고, 1936년에는 최초로 컬러필름을 판매했다. 1959년 세계 최초로 자동노출 기능을 갖춘 사진기를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다.
코닥도 비슷한 상황과 역사를 갖고 있다. 세계 5대 브랜드 중 하나였고,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까지 개발했다. 특허가 많아서 특허료만 받아도 운영될 것 같았던 코닥이 결국 파산 했다. 필름업계의 삼성전자로 불렸던 최고의 기업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됐을까.
<블루오션 전략>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전략적 이동(strategic move)’으로 설명한다. 이 개념은 블루오션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 중 하나다. 경영 분야의 베스트셀러였던 <초우량 기업의 조건(in search of excellence> 또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에서는 초우량 기업 또는 위대한 기업이 연구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들 책에서 소개된 많은 기업이 10년도 지나지 않아 사라지거나 내리막길을 걸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것은 분석의 단위를 잘못 선정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지속성장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는 기업이나 산업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전략적으로 이동할 것인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아그파나 코닥은 공통적으로 미래의 변화를 애써 외면한 채 달콤한 성공에 취해 샴페인을 빨리 터트린 결과다.
그렇다고 잦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손자의 가르침처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병사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힘들이지 않고 승리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병법>에서 핵심 문장이다.“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의 전투를 거쳐도 위태롭지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래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이겨야 한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군사력도 중요하나 먼저 정치·경제·외교·기후 등 다양한 측면에서도 우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백전백승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부전승이 더 바람직하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 이기기는 결코 쉽지 않다. 주관적, 객관적 조건이 잘 맞아야한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진일보한 의견을 내 놓았다. 예로부터 나라를 잘 다스리는 군주는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고, 부득이 하게 군대를 움직여야 할 때는 군대를 포진하지 않았으며, 부득이 하게 군대를 포진 할 때는, 작전을 펼치지 않았고, 그렇게 하면서도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실패 하더라도 총명한 리더는 실패의 교훈을 기억했다가, 훗날 본보기로 삼아 멸망하지 않았다. <손자병법>은 강자를 위한 전략이 아니라 약자를 위한 전략이라고 봐야 한다. 자원·능력·실력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약자라 할지라도 부드러움과 지혜와 특화 전략을 활용함으로써 강한 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손자는 전쟁이란 수단에 불과하며, 궁극적인 목적은 화목하게 잘 지내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공자는 부자였고 소통의 달인이었다
<논어>에 “짐궁유죄 무이만방 만방유죄 죄재짐궁(朕躬有罪 無以萬方 萬方有罪 罪在朕躬)”라는 말이 있다. “제 몸의 죄는 결코 세상 사람들 때문이 아니며, 세상 사람들의 죄, 그것은 내 탓이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주 요왕과 순왕과 우왕과 탕왕과 주문왕과 주무왕의 예를 들어 언급하였다. 또 그 당시 성왕들은 물론 사회 현상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제자들과 항상 담론하였다. 공자의 사상은 공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늘 대화하고 토론하는 그의 남다른 소통방식에 있었다. 작금에 우리나라에 최대의 화두 중 하나는 ‘소통’이다. ‘소통부재’ 때문에 많은 국력을 소모하고 있다. 흑과 백의 이데올로기와 보스정치의 뿌리를 찾아보면 결국은 소통으로 귀결된다. 이데올로기도 상대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데서 기인한다. 보스정치 역시 결국은 소통보다는 보스의 지시와 명령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정치형태다. 지금 우리에게 공자의 소통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집안의 재산도 물려받지 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공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가난하지 않았다. 하극상이 판치는 약육강식의 시대였지만 공자는 의연한 풍모를 잃지 않았다. ‘유가(儒家)의 시조’인 공자가 돈이 없어 배를 곯으며 진나라와 제나라를 주유했다는 기존의 통설은 사실이 아니다. 철인(哲人) 공자는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며 열국을 유유자적하게 여행했다.
어느 날 요임금이 길을 가고 있었다.
요임금은 두 사람의 죄인이 묶여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요임금은 ”나의 백성들이 어째서 범죄를 저지를까?”고 생각해 봤다. 요임금은 죄인들이 죄를 저지른 연유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죄인들 앞으로 다가갔다.
요임금은 죄인들이 붙잡혀 가는 이유를 물었다.
죄인들은 ”남의 집 물건을 훔쳤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요임금은 또 ”너희들은 어째서 남의 집 물건을 훔쳤느냐?”고 물었다.
죄인들은 ”날씨가 오랫동안 가물어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집안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들어가 먹을 것을 훔쳐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요임금은 죄인들의 말을 듣고 나서 매우 난감하였다. 요임금은 죄인들을 압송해 가는 사병들에게 ”너희들은 두 명의 죄인을 풀어 주어라. 내가 붙잡아 가겠다.” 고 말했다.
그 당시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던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사람들은 ”어째서 군왕께서 죄인을 붙잡아갈까?” 이상하게 생각했다.
요임금은 ”이 두 사람이 죄를 저지른 것은 나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첫째, 나의 덕행이 부족하여 천상에서 한재를 내린 것이고, 둘째, 내가 백성들에게 교육을 잘못 시켰기 때문에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낸 것이다.”고 말했다. 요임금은 자기반성을 먼저 했고 진심으로 참회했다.
자신의 잘못을 세상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 탓으로 인정하는 행위는 용기 있는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기는커녕 툭하면 나의 잘못마저 다른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기업도 개인도 마찬가지다. 침을 튀기며 세상의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으로는 불편하다. 그 주장이 진정 자신의 삶에서 진심으로 고민한 결과물인지, 세상에 떠도는 신변잡기적 관점을 옮긴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진심인지 신변잡기적인 포퓰리즘인지를 구분해낼 수 있는 최적의 바로미터는 '자신이 그토록 침을 튀기는 세상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내면으로의 물음이다. 만약 그러한 경험들이 농익지 못했다면 그의 주장은 논리적 타당성 여부를 떠나 아직 침을 튀기기에는 이르다는 반증이다.
진짜 행운은 행운(幸運)이 아니라 행운(行運)이다
인생사에 과연 행운은 존재할까? 많은 사람들이 행운을 그저 단순한 운(lucky)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노력하지 않았는데 대한 결과물을 총칭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행운(behavior, 行運)은 행동하는 사람에게 온다. 감나무 쳐다보고 입 벌리고 있어봐야 감은 떨어지지 않는다. 철저한 준비와 철저한 행동이 함께 할 때 가능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유난히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별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쉽게 기회를 잡아 매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일까? 그들이 행운을 창조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행운은 결단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행운은 준비와 행동의 결과물이다. 행운은 그것을 준비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에게 더 친절하다. 복권에 당첨되길 바란다면 우선 복권부터 사야 하는 것처럼, 행운을 원한다면 지금 당장 행운을 부르는 비밀을 실천하라. 그 비밀은 행동하는 것이다.
<행운이 항상 따르는 사람들의 7가지 비밀>에서는 행운을 불러오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열심히 일해서 노력에 대한 대가를 얻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언젠가 행운이 자기 앞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안타깝게도 이 두 가지 방법으로 꿈을 이룰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꿈을 이루는 세 번째 방법이 있다. 행운이 자신을 따르도록 처신하고 행동하는 것, 바로 '행운 습관'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행운 습관'이란 바로 남들이 나를 도와주고 싶게끔 만드는 작은 행동과 습관의 모음을 말한다.”
금세기 최고 경영자 잭 웰치는 제너럴 일렉트릭(GE)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구어 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엄청난 성공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는 어린 시절, 지독한 말더듬이였으며 친구와 대화도 나눌 수 없을 만큼 자신감이 없는 학생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이스하키 선수 생활을 했는데 시합에서 패배한 뒤 좌절감을 견디지 못해 하키 스틱을 던지고 머리를 부딪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웰치에게 희망을 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는 패배에 따른 절망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쳤고 아들이 실패를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의 말이다.
“성공은 미리 설정한, 가치 있는 자신의 목표를 점진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당신이 마음속에 그린 것을 생생하게 상상하고 간절히 바라며 열의를 다해 행동한다면 그것이 무슨 일이든 반드시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 행운은 기적도 우연도 아니다.
돈 많은 부잣집에 태어난 것도 행운이자 경쟁력이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 엄연한 현실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 돈 없으면 오롯이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는 시대다. 중학교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자주 했던 말이 기억난다.
‘배부른 돼지가 될래,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래!’
보릿고개를 넘나들던 그 시절, 나에게 이런 질문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었다. 배부른 돼지가 되겠다고 목구멍까지 말이 나오다가도 막상 내 차례가 되면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소크라테스하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던 시절 ‘밥이냐, 정신이냐’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는지도 모른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존재할 수 있지만 밥 굶는 소크라테스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밥을 얻어 육체를 보전하는 것은 삶의 필요조건이고, 밥을 해결한 후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삶의 충분조건이다.”라는 말은 명쾌하다. 대부분 충분조건보다 필요조건이 더 긴박하고 절실하다. 밥 먹는 소크라테스는 정신을 말할 수 있지만 밥 굶는 소크라테스에게는 정신은 존재할 수 없다.
철종 2년에 동학에 입문하여 최제우에 이어 제 2세 교주가 되었던 최시형 선생도 “밥 한 그릇에 세상만사가 다 들어 있다.”고 했다. 밥 굶는 병사에게는 아무리 훌륭한 전술도 무용지물이다.
밥 굶는 철수에게 도덕은 허무맹랑한 가르침일 뿐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인문학이 주목을 받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이다. 그동안 경제논리에 휩싸여 그 누구도 인문학의 중요성을 함부로 이야기 하지 못했다. 밥이 세상을 좌지우지 하던 산업화 시대에 도덕과 철학,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탄받는 일이었고 '할 일 없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기가 일쑤였다. 세계 제일의 속성산업화를 거치면서 경제가 필요조건이었고 인문은 충분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배가 부르니까 사람을 찾고 정신을 찾고 철학을 이야기하고 인문학을 이야기한다. 먹고 살만 하니까 이제 소크라테스도 눈에 들어오고 마키아벨리도 공부한다. 밥을 못 먹는 데는 백약이 무효다. 밥은 밥 그 자체가 아니다. 목숨이자 생명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그나마 양반 축에 속한다.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을 하는 것도 결국 밥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백성들에게 밥을 굶게 하는 군주는 반드시 파멸한다.”고 했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이익이 나지 않는 기업은 망한다. "천하가 화목한 것은 모두 이익이 찾아오기 때문이고,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이익이 떠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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