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헐렁한 군주론

인문학큐레이터의 <헐렁한 군주론>-얼굴에 철판을 깔고 흑심을 품어라

김부현(김중순) 2013. 2. 1. 17:58

세습군주국은 신생국가보다 훨씬 더 용이하게 보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습군주국의 경우에는 선조의 기존 질서를 바꾸지 않으면서 불의의 사태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습 군주는 어지간히 근면하기만 하면, 어떤 의외의 아주 강력한 세력이 출현하여 그에게서 나라를 빼앗지 않는 한, 그의 통치는 항상 안정될 것이다. <군주론>2장

 

물려받은 권력은 위태롭다

 

세습군주는 신생국가와는 달리 자식이 아버지에게 나라의 통치권을 넘겨받은 경우다. 본인의 노력이나 능력보다는 운에 의해 권력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런 경우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변화나 개혁보다는 아버지가 시행했던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백성들도 기존의 제도를 편안하게 답습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생국가의 경우에는 이와 반대다. 기업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창업자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2세 사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중국 최후의 황제가 된 푸이는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를 차지할 명분이 필요했던 일본군의 계략에 속아 만주국의 황제가 된다. 하지만 자금성에서와 마찬가지로 각료에 대한 임명권조차 없는 허울뿐인 황제였다. 만주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을 뿐이고 황제조차 일본의 신민이라 여길 정도로 일본은 오만했으며 만주국은 일본과 동등한 나라로 대우받지 못했다. 결국 푸이는 일본의 만주국 지배를 위해 전략적 황제였을 뿐이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일본군 장교 앞에서 ‘일본과 만주의 대등한 관계’에 대해 연설을 하자 장교들이 분개하여 모두 자리를 뜨고 마지막에는 자신만 남게 된다. 자신의 힘이 아닌 타인의 힘으로 얻은 권력의 실상이다. 비즈니스에서도 이런 일은 흔하다. 가업을 물려받은 2세, 대기업 눈치만 보는 중소기업들은 사상누각과 같다.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지금은 ‘한 번 부자는 대대손손 간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예전처럼 오직 자연환경에 의지해 땅의 크기로 ‘부자다, 아니다‘를 판별하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모의 경제력과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 비례한다는 통계가 있다. 쥐구멍에 볕들 날은 점점 사라지고 개천에서 용 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조선 말기에 3대가 아니라 무려 12대 300년 동안 존경받는 부자로 명성을 누렸던 가문이 있다. 경주 최부잣집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부자로 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최씨 가문의 독특한 6가지 자녀교육법 때문이었다.

 

첫째, 찾아온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둘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 없게 하라.

셋째, 재산은 만석 이상 갖지 마라.

넷째, 흉년에 땅 사지 마라.

다섯째,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은 하지 마라.

여섯째, 새댁며느리는 3년 간 무명옷을 입혀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세습 기업은 신생 기업보다 더 적은 노력으로 더 큰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대부분 이런 형태다. 경주 최부잣집의 6가지 교육철학을 실천하는 대기업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힘없고 기반이 약한 신생 기업이나 중소기업들을 배려하기는커녕 오히려 군림한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배려는 못해줄 망정 그나마 공정한 경쟁을 하면 다행이다.

특권과 반칙이 난무하여 기업질서를 흐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찌 보면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마키아벨리즘적 경영방식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틀리다, 맞다’라는 이분법적 논쟁은 무의미하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자연법칙은 기업에도 인간사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도덕군자 논리에 매몰되어 수익을 내지 못해 기업을 망하게 한다면 진정한 리더라 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확장을 통한 생존은 본능이다. 기업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시장점유율과 고객확보라는 확장을 통해 발전해 나간다. 500년 전 죽은 마키아벨리가 무덤에서 나온다면 작금의 대한민국을 위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까? ‘그 어떤 찬사도 이토록 위대한 인물을 찬양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묘비명이 당시 그의 인간됨을 반증해 준다.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기업 역시 수명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영속성(going concern)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이익이라는 결과물이 있을 때 가능하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시대다

 

자연계에서 덩치 큰 공룡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덩치 큰 기업들이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곧 부자라는 의미다. 대차대조표상의 자산이 많다는 의미다. 하지만 용기를 내자. 덩치가 클수록 오래 간다는 기업법칙은 이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대차대조표라는 하드웨어적 자산으로는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외형적인 것에 집중했던 기존의 경영패러다임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이 큰 소리 치는 패러다임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대차대조표라는 하드웨어에 문화, 제도, 시스템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해졌다. 과거에는 대차대조표가 기업생존의 필요조건이었다면 이제 소프트웨어적 자산이 필요조건이 되었다는 말이다.

아무리 설비와 자산 같은 하드웨어가 많아도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면 영속성을 담보하기 어렵게 되었다. 소프트웨어의 함정은 창업자의 2세, 3세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창업자가 자산을 물려줄 수는 있지만 정신을 물려줄 수는 없다. 자주 거론되는 기업이 1990대 우리나라 유통산업의 한 획을 그은 유통업계의 기린아 ‘뉴코아’다. 창업주가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켰지만 1인 지배적 경영으로 규모와 기술 습득을 등한시한 채 확장을 계속하다 파산했다.

창업자로부터 대차대조표상의 설비와 자산 같은 외형만 물려받은 2세들은 이른바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에 도취될 가능성이 높다.

주전 3세기에 헬라에 피로스 왕이 있었다. 피로스는 한니발이 지목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세 명의 장군 중 한 사람이다. 피로스는 2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다. 격렬한 전쟁에서 그는 승리했지만 자신의 코끼리도 다 죽고 군인들도 4분의 3이나 죽었다. 피로스의 승리는 흔히 ‘상처뿐인 영광’으로 비유된다.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르는 승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승리는 최종적으로는 패배와 다름이 없는 승리다.

 

탁상공론적인 도덕적 명분론에 매몰되어 중국이 서구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한 ‘후흑학’(厚黑學)의 창시자 리쭝우(李宗吾)의 말에 일견 공감은 하지만 그렇다고 도덕보다 무력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회풍자가였던 리쭝우가 말하는 후흑학의 백미는 결국 인의(仁義)와 정의(正義)를 내세우는 정치인들의 내면을 꿰뚫었다는 데 있다. 겉으로는 선한 척 하지만 통치자 대부분의 이면에는 ‘두꺼운 낯(厚)과 시커먼 마음(黑)’이 자리 잡았기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한마디로 지고지순하거나 이상적인 목표에만 집착하는 순진무구(純眞無垢) 형으로는 권력을 잡기 어렵다는 것이다. 후흑학은 오늘날의 후안무치(厚顔無恥)란 말과 상통한다. 자신 스스로 잘못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두꺼운 낯과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끝까지 우겨야 권좌에 오르고 부귀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게 리쭝우가 이야기하는 후흑학의 ‘패러독스’다. 후흑학은 결국 <군주론>과 닮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