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헐렁한 군주론

인문학큐레이터의 <헐렁한 군주론>-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김부현(김중순) 2013. 2. 1. 18:04

군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 그 하나는 법에 의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짐승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종종 후자에 의지해야 한다. 현명한 군주라면 모름지기 짐승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을 모두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군주론>18장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군주의 가장 큰 두 가지 무기는 법과 힘이다. 법은 인간에게, 힘은 짐승에게 적합한 것이다. 고대 저술가들은 군주들에게 이 두 가지를 비유적으로 가르쳤다. 많은 군주들이 반인반수의 케이론에게 맡겨져 양육되었고, 그의 훈련하에서 교육받았다. 케이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 켄타우로스를 일컫는다. 허리를 중심으로 위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아래로는 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현자라고 일컬어져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영웅들을 배출해 냈다. 그러므로 군주는 이러한 양면적인 인간의 본성을 잘 이용해야 한다. 어느 한 쪽이라도 결여되면 그 지위를 오래 보존하기 어렵다.

고대 저술가들에 따르면 실제로 아킬레스나 헤라클레스, 테세우스와 같은 군주들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케이론(인터넷검색)에게 맡겨져 양육되었고, 그의 훈련하에서 교육받았다. 반인반수를 스승으로 섬겼다는 것은 군주가 이러한 양면적인 본성의 사용법을 알 필요가 있다는 점을, 동시에 둘 중 한 쪽이 부족하면 군주의 지위를 오래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 최초의 신화이자 서사시 ‘길가메시’의 주인공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키가 3m에 이르고 엄청난 힘을 지닌 길가메시는 하늘아래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주인공이 있으면 라이벌도 있는 법. 횡포를 일삼는 길가메시를 보다 못한 신들은 백성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라이벌 엔키두를 만든다. 그 역시 올곧이 사람은 아니라서 반은 인간, 반은 짐승인 반인반수(半人半獸)라고 전해진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희랍신화에도 이러한 ‘반인’들이 등장한다. 반인반마(半人半馬)인 켄타우로스 케이론은 영웅 헤라클레스의 스승이었으며, 역시 황소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에서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인간과 동물은 신화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인간이 동물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은 심연 위에 걸쳐 놓은 밧줄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위험하며 그 위를 걷는 것도 위험하다. 뒤를 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벌벌 떨며 제자리에 서 있는 것 또한 위험하다.”

실존주의의 대부 칼 야스퍼스가 독일이 낳은 최고의 철학자라고 극찬했던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언급된 내용이다. 니체는 인간을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라 칭하며, 인간은 비록 몰락해버리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밧줄은 건너가라고 놓인 것이다. 밧줄 위에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밧줄 위에 집을 짓고 살려고 한다. 건너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최후의 인간의 속성이다. 두려워서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다. 바람을 막을 담벼락을 쌓고 밑에 도사린 위험을 보지 않기 위해 방구들을 만들고, 그리고선 안보이니까 안전하다고 믿는다. 스쳐지나가는 비바람, 아니 갈대를 움직일 정도의 바람만 불어도 추락할 그 가는 밧줄 위에서 말이다.

게다가 니체는 ‘최후의 인간’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돈이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 인류를 파괴시키는 전쟁이 무엇인지, 지위가 무엇인지 안다. 허나 사랑이 무엇이고 창조가 무엇이고 열망이 무엇이고 별이 무엇인지 모른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권위에 굴욕하고, 힘센 자에게 양보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계산에는 무엇보다 앞서고, 그리고는 이를 현명한 처신이라고 자랑하는 게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이다.

‘최후의 인간’은 마키아벨리의 ‘부도덕한 인간’과 일맥상통한다. 니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군주나 권력층, 리더들은 하나같이 ‘최후의 인간’들이다. 역사는 이들에 의해 씌어지고 있으니 니체가 보면 통탄할 일이다. 혹시 인간은 초인과 동물 사이의 빗줄위에서 필요에 따라 동물쪽으로 갔다가 때로는 초인쪽으로 왔다갔다하는 어정쩡한 미완성 중간자는 아닌지. 이 부분은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짐승과 인간의 성품을 동시에 가져라.’는 말과 정확이 일치한다. 니체는 “최후의 인간들의 삶은 단지 생존하는 것이지, 결코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저 살기 위해 숨 쉬는 것이 ‘최후의 인간‘들의 삶의 정체성이라는 의미다. 그런 삶은 외소하고 비루한 삶이다.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정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안정된 삶도 없고 그에 따른 만족도 없다. 삶의 실상은 불안정하다. 삶이 불안정 한 것은 삶이라는 단어 속에 돈과 권력, 생존이라는 찰거머리 같은 짐승의 가면이 숨겨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는 불만족을 기본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 안정과 만족을 버리라고 니체는 고대의 신비주의자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거듭해서 촉구했다. 짜라투스트라가 외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위험하게 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족이란 없다’는 것이다.

 

21세기 여성시대에 현모양처는 어불성설이다

 

미국 여성 운동의 대모,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의 <여성의 신비Feminine Mystique>에서, “미국 여성들은 중산층 가정이라는 안락한 포로수용소에 '여성의 신비'라는 이데올로기로 속박돼있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표현을 했다. 1960년대 미국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심리학자였던 그녀는 미국 여성들의 삶과 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의 신비>라는 책을 통해 행복한 현모양처란 없으며 여성들은 남편과 육아에서 해방돼 사회적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실질적인 성 평등과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편이 혼자 출근하고 나면 침대를 정리하고, 식사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장을 봐오고, 바느질거리를 걱정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함께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고, 오후에는 미리 만들어 놓은 브라우니(초콜릿케이크)를 손에 들려 아이들을 컵 스카우트에 대려다주고, 밤이 되면 남편 곁에 눕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이게 내 삶의 전부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나아가 “여성을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서 제외되고 오직 가사노동에만 허락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여성의 해방은 오직 그들이 더 넓은 사회에서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되며, 가사 노동 따위는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을 허비하는 행위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21세기는 부드러움과 감성으로 무장한 이른바 ‘여성시대’라고 하는 데는 의견이 없다. 그러나 여성들 스스로 기존 안주형 의식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여성시대는 말 뿐이다.

강의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종종 여성들에게 손자병법이나 군주론, 한비자 같은 고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다. 또 이런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권력’, ‘전쟁’과 같은 단어를 연상한다. 결국 이런 책들은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고전들이 오랫동안 읽혀지고 재해석되는 이유는 역사는 돌고 돈다는 대명제가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일부 모계사회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남성 위주의 역사였다. 동물적 관점에서 보면 승자는 남성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류의 책들이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남성시대를 여성시대로 바꾸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 크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남성들의 배려에 의존해서는 곤란하다. TV를 봐도 여성위주의 프로그램들이 다수다. 드라마 내용도 예전과는 달리 칼자루를 쥔 쪽은 여성인 경우가 많다.

최근 한 언론에서 2030여성들에게 ‘가장 키우고 싶은 남자 연예인’으로 송중기가 뽑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제는 바야흐로 여자가 남자를 관리하고 키우는 시대다. 부정하기 어렵다. 뽀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는 그의 외모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감탄을 자아낸다. <성균관 스캔들>에서 유유자적한 선비를 연기할 때나, <트리플>에서 스케이트 선수복을 입을 때, 심지어 <산부인과>에서 가운을 입은 의사 역을 맡았을 때도 그의 얼굴은 언제나 대중들에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그의 재능이었다.

그리고 <늑대소년>은 그런 송중기의 지향과 그가 타고난 재능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된 영화다. 영화는 늑대의 습성과 초인적인 힘을 가진 소년의 정체를 완벽하게 설명해내지 못하지만, 결국 소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온도만큼은 완전하게 달구어 낸다. 이 과정에서 얼굴에 온통 검댕을 묻히고 손으로 음식을 퍼먹는 송중기의 모습은 흰 우유 같은 그의 판타지에 먹칠을 했지만, 언어와 관습을 초월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의 연기는 이 젊은 배우에게 새로운 환상을 갖게 만들고야 만다.

자세히 보면, 여자의 성공을 저해하는 장본인은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다. 직장 여성들이라면 이제 사내 정치에도 참여하여 권력 게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니콜슨 맥브라이드의 <직장내 정치에 관한 설문 조사>에서, ‘직장 내 정치’의 의미를 묻는 설문조사에 응답한 대부분의 중역들은 직장 내 정치를 “권력을 얻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또 직장 내 정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활용하며, 공개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비공개적인 방법을 활용하며, 그 정치적 노력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 집중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정치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 응답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른 문제를 떠나서 응답자의 80%가 직장 내 정치를 건설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직장이 존재하는 한 사내정치는 없어지지 않는다. 직장 내 인간관계의 다른 말이 곧 직장 내 정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