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헐렁한 군주론

인문학큐레이터의 <헐렁한 군주론>-군주론과 마키아벨리의 생애, 정치사상

김부현(김중순) 2013. 3. 5. 08:24

군주론과 마키아벨리

1. 마키아벨리의 삶

 

군주론을 저술하기 전까지의 마키아벨리의 삶을 조망하면,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 시기는 1469년에서 1494년까지이다. 곧 그의 출생에서 프랑스의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 때까지이다. 둘째 시기는 사보나롤라의 집권시기로서 1494년에서 1498년까지이다. 그리고 셋째 시기는 사보나롤라가 몰락한 1498년부터 피렌체 공화정이 몰락한 1512년까지이다.

각 시기마다 피렌체의 국내외 정치상황은 마키아벨리의 사고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각 시기마다의 핵심 인물들과 그들이 마키아벨리의 사고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해제를 서술하고자 한다.

 

첫째 시기는 마키아벨리가 아직 공직에 진출하기 전이었으며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한 시기이다. 마키아벨리의 저작들 속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인물은 국부(국부,Pater Patriae)라고 불린 코시모 데 메디치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하는 데에 결정적 공헌을 하고 그 기반을 닦은 인물들이다. 1434년 반대파의 추방에서 돌아온 코시모는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했고, 마키아벨리는 그의 지혜와 깊은 사려가 정치적으로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파악했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코시모의 사례를 통해서 다양한 권력이 상호 각축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상황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언급한다. 코시모는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구 군주제를 무리하게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과 경쟁하는 귀족들의 권력이 여전히 강했던 것이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코시모 자신이 당시 피렌체 정치상황에는 군주제가 적당하지 않았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가 시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을 지지하는 경거망동하는 자기편의 귀족들을 제어할 줄 아는 “시민적 중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지혜는 잘못된 상황판단에 따른 섣부른 시도는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시기는 친프랑스 정책을 취함으로써 시민들의 원한을 산 메디치 가문이 추방되고 나서 사보나롤라가 집권한 1494년에서 그가 화형에 처해진 1498년에 이르는 시기로서,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정치와 종교의 적절한 관게에 대해서 성찰하도록 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였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타락상을 비판했다. 공화제의 전통이 강한 피렌체를 장악하게 된 코시모 데 메디치 이후의 메디치 가문은 형식적인 공화제를 유지하면서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축제와 향연을 자주 베풀었다. 사치와 오락이 만연하는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고, 나태한 삶을 누리려고 했다. 이러한 피렌체의 타락상을 비판한 사제가 사보나롤라이다. 설교와 예언 등을 통해서 존경과 권위를 얻게 된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가문이 추방된 후 권력의 공백상태가 된 피렌체의 권력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정치가가 아니라 성직자로 남아 있으려고 했다. 피렌체 시내의 산 마르코 수두원에서 설교와 기도를 피렌체를 수렴청청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견제와 피렌체의 반대파의 공격으로 사보나롤라는 1498년 화형장의 재로 사라지게 된다. 이를 두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제6장에서 ‘말뿐인 예언자’와 ‘무기를 든 예언자’의 대비를 통해서 종교와 정치의 논리가 엄연히 다름을 암시하고 있다.

 

셋째 시기는 1498년 마키아벨리의 공직 진출과 더불어 시작된다. 외교와 군사 부문에서 일했던 마키아벨리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공화정의 주요 업무를 맡았다. 특히 1502년에 신설된 종신직 정의의 기수(Gonfaloniere a vita)로 선임된 피에로 소데리니의 신임은 제2서기관 직을 수행중인 마키아벨리의 공직 활동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1498년부터 메디치 가문의 복귀로 공직을 잃게 되는 1512년까지의 이 기간 동안 마키아벨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체사레 보르자와 피에로 소데리니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서 교황국의 군대를 지휘하면서 로마냐 지방을 평정하고 피렌체를 위협했는데, 마키아벨리는 그를 만나 관찰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보르자는 처음에는 프랑스 군대와 용병을 이용하여 정복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그것이 진정한 자기 힘에 기반하고 있지 못함을 깨닫자 여러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자기 군대를 육성하게 된다. 군주론 제 18장에서 ‘여우의 간게와 사자의 용맹’으로 묘사되는 위기타파 능력을 통해서 보르자는 자기 군대를 확보하게 되는데, 마키아벨리에게 인상 깊었던 사건은 시니갈리아(Sinigaglia) 사건과 레미로 데 오르코를 이용한 로마냐 지방의 평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니갈리아 사건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 용병대장들을 속임수로 꾀어낸 다음 미리 매복시켜둔 부하들을 시켜 제거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의 자기 군대 육성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목적을 달성한 방법에 주목하고 있다. 자기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보르자는 용병을 이끄는 군벌세력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 결과 그는 전면전보다는 속임수를 택했던 것이다. 한편 레미로 데 오르코는 보릊아ㅢ 충복으로 잔인하고 비정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보르자는 귀족이 전횡으로 피폐해진 로마냐의 질서회복을 위해서 레미로를 투입한다. 그의 잔인함은 단시간에 귀족들을 제압하고 질서를 회복시켰지만, 문제는 인민들의 두려움과 그로 인해서 터져 나온 불만이었다. 이에 보르자는 레미로를 참수함으로써 인민들의 마음을 단번에 얻게 된다. 음모와 단호함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던 보르자는 힘이 미비하여 원군과 용병을 사용해야만 했던 한계 상황에서 벗어나서 인민의 지지와 자기 군대를 통하여 이탈리아 도시들을 위협하는 인물로 성장하게 되었다.

반면 피렌체 공화정내의 귀족파와 인민파 간의 대립 속에서 종신직 정의의 기수 자리에 오른 피에로 소데리니는 유약한 성격과 선의에 대한 믿음속에서 공화정을 몰락으로 이끈 인물로 묘사된다. 종신직이라는 강력한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자신에 대한 ‘적대적’ 행위에도 호의와 신의로써 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순진함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던 그의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틈새를 이용하여 힘을 비축한 귀족들은 스페인 군의 비호를 받았던 메디치 가문과 협력하여 공화정을 몰락시킨다. 메디치 가문은 다시 부활했으며,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물러나서 영원한 야인 생활을 보내야 했다.

2. 군주론과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 가 군주론에서 설파한 것은 ‘위기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에서 항상 잠복해 있는 위기는 언제든지 밖으로 나타날 수 있는것이다. 위기가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문제는 위기에 djEJgrp 대처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진행중인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하나는 진행중인 위기를 잘 극복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 두 경우에 공히 필요한 것이 바로 사태에 대한 파악 역량이다. ‘시중’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정치적 지혜를 마키아벨리는 질병(소모성열병)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병은 초기에는 치료하기는 쉬우나 진단하기가 어려운 데에 반해서, 초기에 발견하여 적절히 치료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EK라서 진단하기는 쉬우나 치료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일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문제를 일찍이 인지하면(이는 현명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문제가 신속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하고 사태가 악화되어 모든 사람이 알아차릴 정도가 되면 어떤 해결책도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무조건적인 개입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시의적절한 ‘개입’과 ‘지연’이 필요한 것이다. 마키아벨 리가 속전속결을 단행했던 로마인들이나 행동이 단호했던 체사레 보르자를 칭송하면서도 신중한 정책을 펼친 코시모 데 메디치를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반대로 마키아벨 리가 자신의 상관이었던 소데리니를 비판했던 이유는 필요한 경우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행동해야 할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복잡한 힘의 관계들 속에서 행동을 취해야 할 정확한 시기와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정치적 지혜의 핵심이라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역량이 비르투(virtu)이다. 문제는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상황 속에서 그러한 지혜와 비르투가 거의 부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재를 지속시킨 이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는 귀족들이었다. 이탈리아는 끊임없는 분열상태에 있었다.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교황국 그리고 나폴리 왕국은 그러한 분열의 결과물이자 그것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러한 분열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서 로디(Lodi) 평화조약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1454년에서 1494년까지 이어지는 40년 동안의 평화는 이탈리아 내부의 평화를 유지시켰을지는 몰라도 강력한 통일국가의 출현을 방해함으로써 국경 너머의 강대국들에게 이탈리아가 먹잇감이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1454년에는 최선의 정책이었던 힘의 균형정책이 1494년에는 최악의 결과를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예측 불가능한 상황 변화 속에서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것은 바로 ‘제방’을 튼튼하게 쌓는 것이었다. 국제정치적으로는 이탈리아의 단합과 통일을 달성하여 외세의 침입에 대처하는 것이었으며, 국내정치적으로는 정치세력들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자국군을 만들어 질서와 규율이 서는 강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왜 이탈리아는 여러 국가들로 분열되게 되었고, 그 분열이 극복되지 못했을까? 마키아벨리는 그 이유를 용병 문제에서 찾았다. 당시 이탈리아 국가들은 자국민들의 군대 대신에 용변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용병들은 전쟁을 직업으로 하기 때문에 전쟁을 끝내려고 하지 않았다. 속전속결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려고 했던 고용국과 전쟁으로 먹고 사는 용병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정적 승리 없이 지속되는 전투와 전쟁의 반복은 용병제하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이 모순이 바로 이탈리아 국가들의 통일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용병제는 단순한 군사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제도와 밀접한 관게가 있었다. 인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들지 않고 군대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돈 많은 상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과두제하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탈리아를 노예화시키고 수모를 겪게 만든 것’은 용병제이지만, 그 용병제를 낳은 것은 사실상 자국 군대의 육성을 가로막고 있었던 정치체제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군주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귀족과 인민 간의 대립과 긴장관게를 이해할 수 있다. 강력한 ‘제방’ 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을 제어하고 인민들의 지지에 의지해야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귀족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귀족은 지배욕이 충만한 자들로서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하는 인민들과는 달리 인민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모반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 갈등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주모자들은 주로 귀족들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야심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마키아벨리는 귀족들의 전횡을 막고 인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군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귀족들은 인민들이 무기를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 두려워했다. 외세가 아니라 자신들을 향해서 그 무기가 사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용병을 쓰게 되었고, 그 결과로 조국이 외세에 유린당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공동체의 몰락이라는 정치적 비용을 기꺼이 지불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군주는 귀족이 아니라 인민에 의지해야한다. 마키아벨리는 인민들을 귀족들의 억압으로부터 보호하고, 인민들의 환심을 사며 지지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는 인민들로 자국군을 구성하고, 자유에 대한 인민들의 사랑에 의지할 때만이 국가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피렌체 및 이탈리아의 급변하는 정치상황 속에서 정치를 사고하고 삶을 영위했다. 안정된 법이나 규칙이 지배하는 평온한 시기가 아니라 폭력과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시기를 살았던 것이다. 행위자들 간의 혹은 국가들 간의 관게를 정형화시켜주고 제도화시켜주는 격률로서 법이 부재하는(부재한) 상황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정치영역에 내재하는 적나라한 ‘관계’의 중요성을 보았다. 그 속에서 ‘그래야만 한다‘는 윤리와 도덕은 현실 세계를 설명할 수 없었다. 나아가서 윤리와 도덕이라는 안경을 벗고 바라본 세계는 인간들 간의 ’관계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군주론 제16장에서 제17장까지 이어지는 일반적인 도덕관념에 대한 부정은 바로 그러한 세계상을 담고 있다. 관용, 사랑보다 인색함, 두려움, 잔인함이 더 나을 수 있음은 의도의 선함이 결과의 선함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르침을 보여준다. 사적인 세계가 아니라 공적인 정치세계에서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고, 일 대 일 관계가 아닌 다수간의 복잡한 관게에서는 의도보다는 결과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결과는 국가든 정치인이든 행위자들 간의 관계에 대한 면밀한 성찰 속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악명 높은’ 저서 군주론에 등장하는 군주들에게 한번도 폭군 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사익만을 추구하는 군주를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군주론은 폭군을 위한 저서도, 권모술수를 전파하려는 ‘악마’의 저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귀족들의 전횡 속에서 질서가 무너진 취약한 한 국가가 타국의 침략 속에서 나아갈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집필된 것이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그러한 상황을 배태시킨 기존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비판을 드러낸 것이었다. 마키아벨 리가 보기에 이탈리아에는 두터운 성벽도, 함선도, 금은보화도 부족하지 않았다.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관계에 있었다. 귀족들이 자원을 독점하고 인민들이 정치에서 배제된 상황에서 이탈리아는 그 풍부한 물적, 인적 자원을 응집시켜 외세에 대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는 귀족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이 되었고, 인민들은 귀족들이 나누어주는 떡고물에 취해 배가 불러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공은 사라지고 사만 풍미하게 된 것이다. 부패와 무질서의 상황을 극복하고 질서를 세우는 것, 공동체의 영역에서 사의 전횡을 물리치고 공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군주의 임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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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키아벨리

니콜로 미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는 1498년 29세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하여 주로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다가 1512년 스페인의 공격에 의해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의 군주정이 복원되자 공직에서 추방되었따. 설상가상으로 1513년에 마키아벨리는 (실패로 끝난) 메디치 정부에 대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같은 해에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 추기경이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하자 특사를 받고 석방되었따. 석방되자마자 마키아벨리는 메디치정부의 공직에 참여하려고 계획을 WK기 시작했고, 그 계획의 일환으로 군주론을 1513년 말경에 집필했으나,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아TEk. 낙심한 그는 결국 피렌체 교외에서 칩거생활을 하게 된다.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는 반메디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다른 지식인들과 어울리게 되었으며, 이들의 지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전술론과 자신의 공화주의적 사상을 담은 로마사 논고를 집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520년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궁정에 소개되어 같은 해 11월 피렌체의 역사에 대해서 저술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피렌체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디치 정부는 1527년 프랑스 군의 로마약탈, 이로 인한 교황의 도주, 인민의 신임 상실 등을 이유로 마침내 붕괴되고 공화정이 복원되었다. 이는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에게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었으리라. 그는 공화정의 복원과 더불어 예전처럼 활동적인 공직에 복귀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공화주의자들에게 마키아벨리는 한낱 늙고 하찮은 메디치 가문의 가신에 불과한 인물로 비쳤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를 예감하고 낙담한 탓인지 마키아벨리는 병을 얻었고, 결국 15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치사상사적 차원에서 볼 때,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사상은 정치권력과 정치사상가의 관계에 관해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정치사상가는 끊임없이 정치권력의 행사에 개입하거나 관여하고자 하며, 때로는 정치권력의 성격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옮긴이가 플라톤의 이해 에서 지적했듯이 많은 정치사상가의 정치참여에 대한 관심은 일관된 자신들의 정치이론에 따라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즉 단순히 정치세계를 보는 방법 ㅡ 세계관 ㅡ 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자체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상가적 충동은 마르크스의 경우 가장 현저한 예이지만 많은 다른 사상가들에게서도 그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세계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충동은 정치철학의 창시자인 플라톤의 행적에서부터 이미 태동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충동에 이끌려 시라쿠사를 방문하고 디오니시우스 2세를 감화시켜 자신의 철학적 원리에 따라서 정치사회를 개조하는 도구로서 교화하고자 했다. 또한 플라톤은 국가 에서도 정치권력과 정치이론을 합일시켜야만 사회에 영구적인 안녕과 복지를 확보할 수 있는 근본적인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이에 따라서 지식과 권력이 결합된 철인왕(또는 철인귀족)의 이상을 제시했다. 플라톤이 서구 최초의 대학으로 세운 ‘아카데미’도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에 적합한 정치적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마키아벨리 역시 이러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군주론의 “헌정사”에서 자신의 의도가 ‘군주의 통치를 논하고 그것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는 것’ 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외교적인 경험과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메디치 군주와 같은 신생 군주의 조언자로서 적합함을 호소하고 있다. 나아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는 더욱 대담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정치체제인 공화정의 비전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제 군주정는 새로운 체제를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함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마키아벨리는 한편으로 군주론에서 총체적인 부패상황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1인의 인물에 의한 통치 군주정치가 필수 불가결함을 역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사 논고에서는 일단 정치 공동체가 건강을 회복한다면 다수 인민에 의한 지배가 인민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위대한 국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군주정이 공화정으로 대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에 나타난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종합해보면, 그는 군주론을 통해서는 사분오열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열망을, 그리고 로마사 논고를 통해서는 이탈리아가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

여기에서는 군주론을 통해 나타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의 일반적 특색을 다음과 같은 주제영역을 설정하여 간략하게 개관하겠다. 곧 현실주의적 정치사상과 이익 정치의 태동, 정치의 독자성과 자율성, 정치와 윤리의 관계, 정치에서의 외양(apperance)과 본질(being)의 문제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정치 형이상학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대표적인 현실주의 사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군주론에서 군주에게 권력의 획득, 유지, 확대에 필요한 조언을 제시하기에 앞서 마키아벨리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과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에 대한 유명한 구분을 하고 있다. 이 구분에는 이전의 도덕철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이 이제껏 전적으로 가상의 공화국이나 군주국에 관해서만 논의했을 뿐이고 군주가 실제로 활동해야 하는 현실의 세계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침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현실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접근의 필요성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역설은 홉스에 이르러 비로소 ‘군주에게서 개인으로’, ‘국가의 본성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국가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이론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 감지했을 것이고, 인간본성에 대한 그의 언급이 예리한 통찰력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체계화되지 못한 채그의 저작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인간본성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통찰은 홉스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은 국가의 통치자에게 적합한 행위를 처방하는 경우에 핵심적 원리나 중추적 개념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16세기 말에 널리 쓰이기 시작하는 ‘이익(interesse, interests)’과 ‘국가의 이성(ragione di stato, raison d'etat, reason of the state)’이라는 개념의 원초적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익의 개념은 두 가지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마키아벨리 이전 시대에 만연되어 있던 도덕적 원리나 규범으로부터 정치행위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원리들이 군주에게 명료하고 건전한 지침을 제시하는 동시에, 정념(passion)이나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는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의지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국가통치술의 창립자로서 전자를 강조했지만, 이익이 합리적으로 군주의 행동을 규제하는 측면도 간과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인 사상은 영광과 권력을 추구하는 군주에게 단순히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규범에 구애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나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정치행위의 원리로서 도덕적인 원리를 추방한 것은 정치행위의 비도덕성(amorality)을 암시하는 것이었지만, 또한 정념에 따른 행위를 배제하고 합리적이며 계산적인 이익의 개념을 도입한 것은 정치행위가 일정한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익지향적 행동원리의 가장 극적인 표현은 심지어 마키아벨리의 폭력이론에도 잘 나타나있다. 폭력(violence)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격정(vehemence)이나 벗어남(위반, violate)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인간의 신체나 재산에 대한 ‘격렬한’ 힘의 사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익의 합리성 및 계산적인 측면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그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려운 안정파괴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에게서 놀라운 점은 통상 격정에서 비롯되는 폭력마저도,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필요한 약을 처방하듯이, 결과를 감안하여 필요한 적절한 양만을 계산적이고 합리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실 계산되고 합리적으로 사용된 힘의 사용은 폭력의‘폭’이 가지는 규범 일탈성, 돌발성, 격렬성이 배제된 힘의 사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폭력마저도 계산적인 이익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익 정치는 정치영역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정치행위의 역동성을 포착할 수 있겠지만, 정치결사 특유의 ‘공동체적’ 성격을 확보할 수 없다는 데에 마키아벨리 특유의 고민이 있어TEk. 따라서 이러한 이익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군주론 마지막 장에서 돌발적으로 ‘민족주의’라는 공동체 지향적인 감정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월린의 지적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깊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인 정치사상은 또한 정치영역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역설했따는 점에서 흔히 근대 정치사상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정치영역의 독자성은 친숙한 관념이었지만, 중세의 정치사상은 교회제도를 그 주요 주제로 삼아 전개되었고, 그 결과 그 개념들도 종교적 비유와 사상에 의해서 채색되었다. 이는 정치질서가 독자성을 인정 받지 못하고 종교적 질서의 하부구조로서 포섭된 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종교의 영향력이 퇴조하자 이탈리아의 정치현상은 종교적 가치와 제도의 영향력을 벗어나서 더욱 순수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정치영역을 독립적인 탐구영역으로 설정하여 자연법 사상과 같은 중세적 사고방식과 결별하고 권력의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을 분석했다. 그는 정치현상을 종교적 가치나 윤리적 고려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권력의 획득, 유지, 팽창의 차원에서 조망했다. 이로 인해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사회경제적 요소나 종교적, 윤리적 요소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등한시했고, 그 결과 정치현실의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을 포섭하지 못한 편협한 사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면 그의 사상은 이데올로기의 다양성, 사회경제적 차이, 종교적, 윤리적, 문화적 편차를 초월하여 권력장치(power politics)가 전개되는 상황이면 어디에서나 적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마키아벨리의 권력정치에 관한 통찰력은 셰익스피어 당시 영국의 궁정정치, 조선의 당파 싸움, 옛 소련의 크렘린의 권력투쟁에도 모두 적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정치현상이 종교나 윤리와 구별된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군주론의 제15장에서 19장에 나오는 군주의 처신에 대한 유명한 논의에서도 자세히 나타나지만, 마키아벨리의 용어 사용, 곧 마키아벨 리가 군주에게 요구하는 덕(virtu)의 개념상의 혁신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대부분의 기독교 사상가들과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문필가들은 군주의 덕으로 기독교적인 의미의 덕 겸손함, 자선, 경건함, 정직함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기독교적인 덕의 개념에 반기를 들고 군주에게 요구되는 덕으로서 고대 로마 공화정 당시의 ‘비르투(virtu)에 해당하는 ’남성다움‘, ’용맹스러움‘, ’단호함‘ 등을 요구했다. 즉 마키아벨리는 초기 로마 공화정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군주에게 남성다움 또는 전사의 덕을 요구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 사상에 나타난 ’덕‘에 대한 이러한 개념상의 혁신은 정치적인 행위자에게 요구되는 정치인인 덕이 일반 사적인 생활에서 요구되는 윤리적인 덕과 구별된다는 점을, 곧 정치영역의 독자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마키아벨 리가 정치와 윤리를 분리했다고 하여 그의 사상에서 정치와 윤리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는 물론 정치사상사 전반에 걸쳐서 정치와 윤리의 적절한 관계설정이 많은 사상가들의 끊임없는 관심거리가 되었다. 마키아벨 리가 도덕적인 덕보다는 권력의 ‘기술’ 문제에 골몰했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한니발의 ‘비인간적인 잔인성’ 또한 덕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를 기화로해서 그의 정치사상을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의 덕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덕의 개념과 절연되어 잇고, 로마 공화정 시대의 덕의 개념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정치와 도덕의 일반적인 문제에 관해서 마키아벨 리가 무관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심지어 그는 정치에서의 도덕의 문제에 관해서 어떤 사상가 못지 않게 민감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통념적인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의 정치와 윤리의 문제에 관한 두 가지 논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마키아벨리는 정치영역에서는 윤리적인 적이 자동적으로 공적인 덕으로 전환되지 않으며, 사적으로는 비윤리적인 행위가 공적인 영역에서는 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남을 잘 신뢰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적인 영역에서는 유덕한 행위이지만, 인간의 이기심과 재화의 희소성으로 인해서 폭력과 기만이 난무하고, 한 개인의 사활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사활이 걸린 정치영역에서는 그러한 행위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공적으로는 유덕한 행위가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마키아벨리는 지적하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사적인 영역에서 남을 속이거나 폭력을 수반하는 잔인한 행위는 유덕한 행위가 아니지만, 공적인 영역에서는 항상 사적인 윤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윤리규범이 적용되지 않는 정치적 상황의 특수성과 한계를 지적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즉 마키아벨리는 “대부분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국가 공통체와 인민은 사적인 개인과는 다른 방법으로 통치된다’” 는 점을 지적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윤리관은 막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Politics as a Vocation)"에서 구분한 ‘확신의 윤리(ethics of conviction)’ 와 ‘책임의 윤리(ethics of responsibility)’ 중 책임의 윤리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베버에 따르면 확신의 윤리는 인간이란 선한 존재라고 전제하고, 동기가 선하면 주어진 행위는 그 결과에 상관없이 선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서 책임의 윤리는 인간의 평균적인 악을 전제하고, 이를 감안하여 행동해야 하며, 따라서 동기의 선함보다는 결과의 선함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베버의 이러한 구분은 일부 문제가 없지 않지만, 기독교적 윤리관은 확신의 윤리에,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윤리관은 책임의 윤리에 상응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그렇다고 하여 마키아벨 리가 정치영역에서 윤리적 문제에 무감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군주론>의 여러 구절에서 나오듯이,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행위가 사적인 행동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에 부합하는 상황을 지적하고자 고심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안정되고 확고한 상황에서 운영된다면 정부는 연민, 신뢰, 정직함, 인륜 그리고 종교와 같은 기존의 덕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따. 곧 마키아벨리는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는 공적인 윤리와 사적인 윤리가 일치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동시에 정치적인 행위에 관한 규범을 사적인 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구별했지만, 이 경우에도 그는 정치적인 상황이 군주를 포함한 정치적 행위자에게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서 비정하고 냉혹한 행위를 강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삶보다는 사인으로서의 삶이 우월하며, 영혼의 구원을 원하는 자는 차라리 정치영역에 들어서지 않는 편이 낫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정치적 행위자가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에 사인으로서는 하고 싶지 않고 또해서는 안 될 반윤리적인 행위를 선택해야 할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선택에는 도덕적으로 많은 고뇌가 수반된다는 점을 마키아벨 리가 익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정치적인 상황이란 선과 악 중에서 일목요연하게 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악(evil)과 보다 적은 악(less evil)중에서 보다 적은 악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마키아벨리 사상의 현실주의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논할 때 외양(apperance)의 문제를 EH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정치의 핵심을 ‘상징’과 ‘외양’으로 파악했다. 정치적 행위자로서 통치자는 능란한 위선자요 가장자여야 하며 성실함, 자비, 인간애 및 신실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서 ‘외양’의 강조는 대체로 네 가지 함의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본질(EH는 실재;what is)’의 영역이 아니라 ‘외양(what appears)’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 사상가나 중세의 정치 사상가들이 정치영역에서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를 구현하고자 하여 정치현상을 이러한 원리에 따라 규율하고자 했다면 가령 플라톤의 경우 정치권력은 선의 이데아를 실현하고자 하며 그 정당성 역시 철학적 지식에서 나온다. 마키아벨리의 경우 정치는 변화무쌍한 생성과 현상의 영역이기 때문에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의 적용을 거부한다. 마키아벨리에게는 군주나 정치적 행위자들이 권력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영혼의 완성이나 진리의 실현이 아니라 영광과 명예였는데, 이 역시 ‘외양’의 속성에 불과하다.

둘째, 마키아벨리는 기만과 폭력이 횡행하는 정치상황에서 정치적인 행위자가 자신을 정치적인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보호색으로서 능숙한 가장과 위선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에서 외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정치적인 상황이 불안정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정치적 행위자가 한결같이 일관되게 기존의 도덕률을 채택하게 되면, 그의 행위는 적에게 쉽게 노출되고 간파되어 정치적으로 파멸을 초래할 위험이 커진다. 그리고 이는 정치 행위자 개인의 파멸에 그치지 않고 정치 공동체의 사활에 관련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통상적인 정치적 상황이다. 따라서 통치자는 외국의 적으로부터 자신의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또는 국내의 적으로부터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절한 위장과 기만을 통해서 ‘외양’을 조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통치자는 통상의 윤리로부터 일탈하여 정치상황의 필연적 논리에 따라서 행동해야 될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에도 권력의 유지에 필수적인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능숙한 가장과 위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물론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정상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통치자는 기존의 도덕과 규범을 준수해야 하고 이 경우에는 위선과 가장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통치자는 필연의 요구에 의해서 독자적인 정치윤리에 따라서 통상 반도덕적으로 간주되는 행위를 취해야 될 경우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이 경우에도 정치와 통상적인 윤리간의 긴장과 갈등 관게를 가급적 외양의 조작을 통해서 해소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정치적 행위가 부득이 통상적인 윤리적 규범에서 일탈해야 하는 경우에도 적절한 외양의 조작을 통해서 그 간극을 메우거나 ‘그럴듯한 핑계나 구실’을 제시하여 그 충격을 축소하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항상 정직하게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정직하게 ‘보이는’ 것, 신의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 관대하게 ‘보이는’ 것 등 통상적인 윤리적 규범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외양의 조작을 통해서 정치적인 행위자는 사적인 윤리에 반하여 행동해야 되는 경우에도 사적인 윤리에 기반한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 인민대중의 환심과 지지를 유지,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비록 외양의 조작을 통한 것이지만 군주에게 대중의 지지가 필수 불가결함을 은연중에 역설함으로써, 군주론에서도 자신의 공화주의적 사상을 드러내고 있으며, 멀리는 근대의 인민주권론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외양의 조작을 통한 대중적 지지의 확보는 정치와 위선의 관계 그리고 정치의 대중조작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마키아벨리는 군주나 정치적 행위자가 인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외양의 조작을 구사해야 된다는 점, 즉 위선의 가면을 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행위자가 항상 위선의 가면을 써야 한다는 사실은 행위자에게 커다란 윤리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가면을 벗고 진면목을 드러낼 경우 치러야 하는 부담과 대가보다는 적겠지만 말이다. 영어로 “위선이란 악덕이 미덕에게 바치는 공물이다(Hypocrisy is a tribute vice pays to virtue)"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위선행위가 그 반도덕성에도 불구하고 미덕이 악덕에 비해서 우월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시인하고 확인하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즉 갖가지 외양의 조작을 통해서 선한 인물처럼 보이고자 하는 악인은 선과 도덕의 우월성을 그 위선자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 한 항상 타인은 물론 자신 앞에서 고백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치 행위자는 정상적인 정치상황에서는 가급적 통상적인 윤리를 좇아서 행동함으로써 그러한 심리적, 윤리적 부담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충동을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정치적인 행위자가 상황에 따라서 통상적인 윤리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적 윤리에 의거해서 행위해야 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면서도 동시에 행위자에게 가급적 이를 통상적인 윤리에 따라서 위장하라고 조언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독자적인 정치적 윤리에 대한 통상적인 윤리의 우월성과 우선성을 긍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함의는 마키아벨리가 독자적인 정치적 윤리의 적용과 이를 은폐하기 위한 외양의 조작을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정치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처방으로서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처방은 마키아벨리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정치일반에 확대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대중의 환심과 지지를 얻기 위해서 외양의 조작을 강조했지만, 이러한 외양의 조작이 그의 의도대로 ‘예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치영역에 ‘일상화’될 때 어떠한 함의를 가지게 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서는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이 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고, 다만 서구에서 민중의 지속적으로 끈질긴 투쟁을 통해서 확보된 현대의 민주주의가 절차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외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에서 인민주권론과 민주주의를 허울에 불과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정치적 선전과 상징조작 곧 외양의 조작에 근거한 대중정치라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넷째, 정치와 윤리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정치상황의 아이러니컬한 속성 때문에 정치영역에서는 빈번하게 외양상 미덕으로 보이는 것이 악덕이 되고, 외양상 악덕으로 보이는 것이 덕이 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정치상황에서 통치자의 관후함(liberalita, liberality)은 국고를 탕진하게 되고 이는 궁극적으로 인민의 세금으로 부담되기 때문에 악덕으로 전환되면 반면, 통치자의 인색함은 사적으로는 악덕이지만, 세금 부담을 줄이고, 그 결과 신민들에게 보다 많은 재산을 남겨놓기 때문에 공적으로는 미덕이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는 자비로움과 잔인함이다. 통치자가 자비로워서 쉽게 죄인을 용서하게 되면 기강이 문란해져서 권력과 질서를 유지하기 힘들어지고, 급기야 엄격하고 잔인한 통치를 해야 되는 상황에 봉착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초기의 자비로움이 악덕이 되는 반면에, 잔인함이라도 절약해서 사용하면, 기강을 바로잡아서 자비스러움보다도 더 관대한 결과를 나중에 가져오기 때문에 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잔인함은 단지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를 가하고 나머지 다수는 두려움에 의해서 그들의 행동이 제지를 받는 반면에, 전자를 무질서를 양산하여 전체 공동체에 해를 입히거나 아니면 나중에 더 많은 사람에게 보다 잔인한 조치를 취해야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키아벨리의 정치 형이상학을 검토함으로써 그의 정치사상에 대한 논의를 마치기로 하자. 무릇 정치사상가가 이론화하는 정치세계란 재화 부, 권력, 명예 등 의 상대적 희소성의 상황하에서 인간의 가치, 야심 및 이기심이 부단히 충돌하고 운동하는 변전무상한 ‘현상의 세계’ 이다. 하지만 서구의 많은 사상가들은 이러한 생성의 세게를 거부하고 불변적이고 확실한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변화로 뒤엉킨 세계에서 확실하고 안정된 정치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사상가들의 노력은 종종 변화가 동결된, 운동이 없는 고정불변의 정치체제에 대한 구상 정당한 권위의 문제에 대한 탐구으로 귀결되었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라는 철학적인 영구불변의 진리에 EK라서 정치체를 구성함으로써 영구적으로 안정된 정치질서를 구축하고자 했고, 아퀴나스와 같은 중세의 사상가들은 종교적신앙이나 진리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정치체를 조망하고 이론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사상가들이 자연법과 인간의 이성, 기하학적인 진리, 뉴턴의 물체의 운동법칙과 같은 물리학적인 진리에 상응하는 정치운동의 법칙, 그리고 절대이성, 유물변증법 및 사적 유물론 등과 같은 확실하고 고정된 이론적인 틀을 통해서 정치체를 조망하고 이론화함으로써 정치질서의 확실성과 안정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키고자 했다. 그들 자신들이 구상한 정치질서가 비교적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원리에 기반한다면, 그 정치질서도 그러한 원리가 담지한 항구성과 불변성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가 바로 그들의 정치 형이상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적이고 과학적인 원리들은 정치질서에 항구성과 안정성을 부여하는 반면 정치세계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간과하는 정치사상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키아벨리에게도 이러한 모색의 최종적 성과는 정치세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활력이 소진된, 동결된 정치세계를 의미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안정된 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 정당한 권위를 추구하는 문제에 골몰하는 대신, 정치세계의 다양성과 역동성의 문제, 곧 운동하는 세력들로 구성된 불안정한 정치체를 통제하기 위한 지배력을 획득하는 능력의 문제로 관심을 전환했다. 그리고 정치세계의 역동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안정된 이론 틀을 제시하는 정치형이상학으로 마키아벨리는 ‘역사’를 선택했다.

역사적 설명이 가지는 장점은 그것이 운동과 변화를 서술하는 한편, 인간사회에 작용하는 일정한 항구적인 요인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나아가서 역사가 사건의 변화무상함을 넘어서 안정된 지식체계를 제공할 수 있다면, 정치상황의 불확실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희망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 철학자들과 기독교 신학자들을 자극했던 동일한 문제의식에 대한 상이한 답변을 의미했다. ‘전인미답의 새로운 방법’은 영원한 이성과 영원한 신앙 대신에 ‘역사 속에 보존된 위대함의 영원한 모델’에서 그 확실성을 발견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이 바람직한 정치제도와 정치행위의 기본이 되는 영구적인 모델을 제시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또한 순환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의 위대함을 재현시키고자 희망했다. 즉 마키아벨리는 당대피렌체를 포함한 이탈리아 정치의 총체적인 부패와 위기를 로마 공화정에 비교함으로써 진단할 수 있고, 로마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난국을 극복하고 고대의 영광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자료출처, 강정인, 군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