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피란민들의 애환과 아픈 역사를 간직한 감만1구역 재개발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거의 마무리 단계에 도착했다.
2020년 6월 27일 관리처분인가를 위한 총회가 예정되어 있고 올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부터는 이주및 철거가 진행될 예정이다.
감만1구역 재개발 투자상담과 중개를 하면서 진작부터 철거되기 전에 감만동의 흔적을 남기려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까지 왔다.
감만1구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재개발의 역사는 대부분 전면철거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일부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이나 문화재를 남겨야 한다는 외침도 있지만 여전히 전면철거방식에 익숙하다.
결국은 사업성 때문이다.
동네는 낙후되고 골목길도 꼬불꼬불 하지만 북항과 영도, 부산항대교가 보이는 명품 바다조망은 일품이다.
좁은 골목길을 곡예하듯 다니는 남구6번 마을버스, 감만시장, 산기슭을 따라 이어진 무질서하지만 정감가는 낡은 집들.....
머지 않아 모두 과거 역사의 한 페이지로 몽땅 사라질 것이다.
감만1구역이 철거되기 전 사진 몇 장을 남겨본다.
약 10년 후쯤이면 이 사진들은 감만동의 추억과 역사로 남을 것이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다. 이만큼 역사를 명쾌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 '끊임없는 대화'를 미래까지 포함시켜 나갈 때 인간의 발자취를 조망하고 창조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그것을 미래와 연결시키는 '대화'는 한마디로 인간 삶의 핵심이자 전부라 할 수 있다.
그 대화의 한 장면으로 부산포해전이 부산대첩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부산포해전을 이순신의 3대 해전으로 꼽히는 한산·명량·노량대첩 이상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능히 그러하다. 1592년 임진년 음력 9월 1일, 우암동~감만동 앞바다에는 500척의 왜군 배와 병사 1만 8000명이 있었다.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에 조선 함대 166척이 뛰어들어 적의 배 100척을 부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전세를 결정적으로 바꾼 대승리였다. 1592년 임진년에 이순신은 4차 출전해 10번의 해전을 치렀는데 이순신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서 "4차의 출전에서 부산 싸움보다 더한 전투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순신은 같은 해 7월의 한산대첩보다 부산대첩을 더 큰 승리로 꼽은 것이다.
부산대첩으로 조선 수군은 남해 해상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는 무서운 것이었다. 평안·함경도로 치고 올라가던 왜군에게 여차하면 본국으로 튀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실제 이후 왜군은 남해안 연안으로 철수했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와서 전쟁을 지휘하려던 계획을 수포로 만들어 저들의 전쟁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의 조선 침략 전략을 전면 수정하게 한 대첩이었던 것이다.
부산대첩은 그간 왜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걸까. 명확히 보지 않아 역사의 주변부에 방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부산 시민의 날 제정은 부산포해전 승전 날을 기념한 것이었으나 좀 미흡했다. 무엇보다 이름은 중요하다. '부산포해전'이 '부산대첩'으로 재명명된 이유다. 지난 27일 부산 각계 인사들이 참가해 부산대첩기념사업회(이사장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도 창립했다. 부산 역사의 재발견, 재명명은 쉼없이 이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정치·사회·문화·경제적으로 부산의 오늘은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부산대첩', '부산 큰 승리'의 진정한 의미일 테다. 문제는 오늘이다. (최학림 논설실장 theos@)
감만동이라는 이름은 ‘무찔러 이긴다’는 ‘감’과 오랑캐를 의미하는 ‘만’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감만동~우암동~신선대 부두로 이어지는 해안가는 그동안 컨테이너 야적장이 자리하고 있어 부산 사람들에게도 주거지로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감만1재개발 구역안에는 최영장군의 사당을 모신 무민사가 자리잡고 있다. 최영장군 사당에는 조선시대부터 최영 장군의 넋을 추모하여 수호신으로 모시는 곳이다. 예로부터 감만동은 경상도 해안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에 한 때 경상좌도의 해안을 방비하는 좌수영이 있어, 낙동강을 기점으로 경상 좌도의 수군들이 모두 이곳의 통제를 받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 초 경상좌수영은 부산포에 설치되었으나 울산 개운포와 동래 해운포로 옮겨 다니다가 1636년(인조14)에 감만포로 이설되었다. 이후 왜관과 너무 가까워서 군사 기밀이 누설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에 다시 현재의 수영으로 옮겨갔다. 이곳이 고려의 최영장군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사당의 이름을 최영 장군의 시호를 따서 무민사(武愍祠)라 부르게 된 것이다. 부산에서는 감만동 외에도 수영성 동문 밖의 무민사와 자성대 공원의 최영장군 사당이 있다. 모두 왜구를 섬멸한 최영장군을 받들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지방을 불문하고 관아에 신을 모시는 제당이 있었다. 이 제당에서는 고려의 최영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아의 아전들이 주관하여 제사를 지냈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그 까닭을 "고려의 시중 최영이 관직에 있을 때 깨끗하고 세금을 포탈하지 않아 이름을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숭배한다."고 하였다.
또, <고려사>에서는 "최영 장군은 용모가 장대하고 완력도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고 하였다. 고려 말 왜구들이 해안을 끊임없이 위협하자, 그때마다 최영 장군이 선두에 서서 출정을 하다가 적이 쏜 화살이 그의 입술을 맞춘 적이 있었는데, 입에서 피가 낭자하게 흘렀으나 그는 태연자약하게 적을 쏘아 죽인 후에 입술에 박힌 화살을 빼냈다 한다. 그의 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부산 남구청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장군이 부산에 모셔진 연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은 탐라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갔다. 탐라국을 몽골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고려에서 최영 장군을 보내 이들을 섬멸시키려 한 것이다. 제주도에 간 최영 장군은 몽골족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왜구가 부산포에서 약탈을 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최영 장군은 못된 왜구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부산포까지 왔다. 그런데 부산포에는 전함을 정박하기가 쉽지 않아 감만동으로 옮겨야 했다. 감만동의 산 정상에 올라서서 보니까 전함을 세우고 군대를 주둔하기에도 좋은 장소였다. 그리하여 최영 장군이 감만동에 전함과 군대를 둔 뒤에 왜적을 물리쳤다."
영도의 아씨당 전설에서도 최영 장군이 제주도를 거쳐 절영도에 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군마의 책임자였던 부산첨사는 제주도에서 절영도로 온 말이 자꾸 죽어 근심에 빠져 있었다. 하루는 꿈에 탐라국 여왕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최영 장군은 탐라국을 군마의 사육지로 삼기 위해 제주도 정벌에 나섰다오. 우리들이 견고하게 심은 탱자나무가 성처럼 막고 있었으나, 최영 장군은 갈대에 불을 붙여 성을 침입해 들어왔지요. 나는 최영 장군의 화친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연인이 되어 버렸다오. 헌데 최영 장군은 신돈의 음모에 빠져 절영도로 귀양을 가버렸소. 나는 그를 찾기 위해 절영도까지 왔으나 그 말은 거짓이었고 결국 고독한 영신이 돼 버렸지요.”
최영 장군을 찾다가 고독한 신이 된 탐라국 여왕은 그 원한으로 제주도에서 영도로 온 말을 죽였던 것이다. 제주도 정벌에 관한 최영 장군의 이야기는 <고려사>에도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다. 탐라국을 장악하고 있던 몽골족들이 명나라에 바칠 제주도 말 2000필을 보내지 않자 고려는 1374년(공민왕23), 최영 장군을 앞세워 대대적 토벌에 나선다. 몽골인들은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저항했지만 최영 장군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탐라국을 정벌한 후 최영 장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태세였다. 부산의 백성들은 이런 최영 장군을 왜구를 무찌르거나 탐라국 여왕을 굴복시키는 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용맹스러운 최영 장군이 부산에 와서 적극 활약해주기를 바랬던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최영 장군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감만동의 무민사, 부산시 스토리텔링 참조)
감만동이 포함되어 있는 부산시 남동부에 있는 남구는 1995년 기존 5개동이 수영구로 분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우암동과 감만동 일대에는 주로 철강회사들과 컨테이너 야적장이 입지해 있으며, 관광명소로 유명한 이기대와 신선대 그리고 부산의 상징 오륙도가 있는 지역이다. 대표적인 상권은 부경대학교와 경성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대학가상권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해운대, 서면, 북항 등 주변 도심 진입이 용이하고 부산국제금융센터 배후 주거지인 대연혁신 재개발 , 대연3, 8구역, 우암1,2구역, 감만1구역 등으로 신규 분양의 최대 수혜지역이다. 또한 교육, 교통, 상권, UN공원 등으로 인해 양호한 정주환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게다가 최근 부산시는 ‘대중교통 혁신정책’ 에 부경대·경성대역~오륙도SK뷰아파트 구간의 오륙도선과 부산교통방송국~우암·감만~범일역을 연결하는 우암·감만선 트램(노면전차) 확정 발표로 남구의 교통혁명이 시작되었다. 지하철과 도로망이 잘 갖추어져 시내로의 접근성이 뛰어나고 바다와 접하고 있어 최근 부산지역에서 가장 많은 아파트 물량이 쏟아지고 있어 공급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여전히 주거지로서 각광받는 지역이다.
남구는 부산진구 다음으로 많은 16곳에서 재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주목해야 할 곳은 ‘대연3구역’과 ‘감만1구역’이다. 대연3구역은 2호선 못골역 초역세권에 4500여 세대에 달하는 특급대단지로서 우룡산을 낀 수영로의 관문이다. 2018년 9월 최종적으로 현대산업개발과 시공계약을 체결하고 관리처분인가가 난 상태이며 대연동은 물론 남구를 대표하는 재개발의 핵심 축이다. 그리고 감만1구역은 공공지원민간임대주택(구. 뉴스테이) 연계형 재개발이라는 점이 주목을 끈다. 부산에서 뉴스테이 연계형 재개발은 감만1을 포함하여 감천1, 우암1,2를 포함하여 모두 4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감만1구역의 경우 우선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미니신도시급인 9092세대는 우리나라 재개발구역 전체를 통틀어 단일아파트로 단지로는 최대를 자랑한다. 시공사로는 대우·동부건설 컨소시엄이 7:3의 비율로 참여하고 있으며, 2018년 12월 조합원분양신청이 완료되어 관리처분인가를 앞두고 있다.(하루에 끝내는 재개발 재건축, p179~180. 참조)
감만동은 남구에서 서남단에 위치해 있다. 북쪽은 대연동과 우암동에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용당동, 서쪽과 남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다. 감만동에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며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그러나 조선시대 감만포에 수군영이주둔했다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형은 대부분 야산을 끼고 있어 해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중심 도로는 우암로로 동쪽으로 용당동과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곳이지만 남구에서도 변방지역으로 취급받는 탓에 상업시설은 크게 각광받지 못하고 있는 지역이다. 더구나 남쪽 바다를 끼고 방대한 감만, 우암부두와 제8부두가 있어 공업위주의 시설이 대부분이다.
1997년 연합철강과 대한통운 등이 들어섰는데 연합철강 옆에는 OBD라는 미군부대가 있다. 미항공모함이 자주 정박되어 있다. 최근에는 탄저균 생화확무기가 반입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인근 주민들과 지역사회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지만 여전히 명쾌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지만 북항재개발로 점차 사라질 것이다. 아파트가 완공되고 트램이 오가면 오랫동안 부산 사람들의 감만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상쇄할만큼 상전벽해와 같은 부산 최고의 바다벨트 신도시급 명품주거단지로 변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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