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지금의 내가 가장 풍요로운 인생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짧은 기간이나마 내 인생을 걸어 원했던 직장에의 취직도 난망하고, 당장 경제적으로조차 자립할 수도 없는 이 서른 넷의 무게가 끊임없이 숙면을 방해하는 지금, 그 정서의 버거움을 나눌 벗들은 너무나 멀고 해 지고나면 결국은 몇방울 알코올이 그 빈자리를 메우길 넉달째인 지금이, 내가 살아온 그리고 남은 인생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일런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호흡이 벅찰만큼 미래에의 불안과 현실에의 불만에 짓눌리는 와중에서 이처럼 엉뚱 한 생각을 해보는 건 공연한 자위에서가 아니라, 나는 아직도 꿈꾸고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치열한 나의 꿈꾸기. 길을 걷거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거나 나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을 하고 산다. 운전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나는 오직 한 가지에만 몰두하고 있다. 난데없이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 잊었던 나의 꿈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일상의 자잘한 좌절과 회의에 몸을 떨 때마다, 나는 한결같이 같은 결론을 낸다. 현실에 치열하자.
곧 어디엔가 자리를 잡고, 일상의 깊은 늪으로 알아차릴 수 없을만큼 조금씩 조금씩 나는 그렇게 빠져들 것이다. 적당한 이유대기가 가능한 속도로,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어느 순간에서부턴간, 쉽게 이름을 얻고 편히 돈을 얻는 일에 나의 꿈꾸기는 자리를 내어주게 될지도 모른다. 自愛를 담보로한 이 도덕적 치열함도 차츰 탈색해갈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아마도 얼굴엔 주름이 지고 이마에는 광택이 들어, 바로 노파의 외모를 가지게 되리라.
치열한 꿈꾸기의 상실은 단순히 나이를 먹어감이 아니라, 안정과 안락의 보수성에서 비롯한다. 슬픔이 詩人의 양식이듯이 불안은 치열함의 방부제이다. 실패의 개혁성만이 그 러한 꿈꾸기를, 늘 꿈꾸기를 포기치 않는 질긴 나르시시즘이 그러한 치열함을 가능케한다. 금이 간 듯 금이 간 듯, 그러므로, 불안할 것. 언젠가 어린시절 되뇌이던 그 싯귀가 새삼 새롬다. 오랜 시간 잊혀졌던 그 불안이라는 詩語를 다시 상기하게 한 것은 지금 이 방을 위요하고 있는 불안, 이 불안한 꿈꾸기, 늘 꿈꾸기를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꿈은 이루지 못하는 것보다, 꿈꾸기를 망각하는 것이 백배는 더 무섭다. 따라서 꿈꾸기의 가장 은밀하지만 치명적인 敵은 꿈의 성취 바 로 곁에 숨어 있다.
그 성공의 보수성. 내가 작은 성취에 마취되어 꿈꾸기를 천천히 잊게 되거나, 삶의 치열함을 차츰 잃게 될 것이 두려워서 이 글을 쓴다. 지금의 이 불안함과 불 안속에서 키우고 있는 이 치열한 꿈꾸기가 부패하지 않도록. 매일매일 나를 일깨우는 이 버거운 현실과 어둔 미래가 명치끝 그 깊은 곳에서 나를 까맣게 태우는 오늘, 지금이 어쩌 면 내 생애중 가장 풍요한 것이리라고 뇌어보면서, 나태의 나락에서 몸을 추스르지 못할 그 어느날에 바로 오늘의 불안과 오늘의 자위를 한번만 되살려 달라는 바램에서, 이 글을 쓴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
느낌이 큰 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풍요의 꼭대기에 올라 스스로를 가장 위대함으로 치부한 채 그 어떤 세상 물결에도 끄떡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분명 예전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족해 졌음에도 가슴이 허하고 머리가 텅 비어가는 듯한 휑함은 왜일까. 어쩌면 고집스런 자신만의 꿈을 잃은채 나침반없는 방황길을 헤메이는 탓은 아닐른지. 늙어감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큰 보약은 자신만의 꿈을 찾는 것이다. 꿈길은 그 과정 자체로도 이미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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