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경영/꿈과 비전

빵보다 밥, 밥보다 꿈

김부현(김중순) 2011. 12. 18. 23:30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부러워하는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금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꿈은 온대간대 없고 오직 등수와 성적만이 그 아이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간 우리 교육이 분명 잘 한 부분도 있지만 잘 못한 부분도 있어보입니다. 산업화시대에는 가장 훌륭한 교육이었지만 지식정보화사회인 지금 우리나라 교육은 분명 개선해야 할 것들이 많아보입니다. 그것도 당장.

 

-고등학교때까지는 세계 1등을 하다가 대학에만 들어가면 꼴찌로 추락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참고 견디면서 하는 공부는 세계 1등이지만 창의력이나 자기주도적 공부면에서는 꼴찌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공부든 일이든 그것이 싫지만 참고 견디며 하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충동억제력'이라고 합니다. 일시적인 충동을 억제하는 '충동억제력'은 단순한 충동억제력이 아닙니다. 충동성은 주로 계획성 없이 어떤 일을 수행하거나 그때그때 기준에 따라서 행동하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동기를 스스로 부여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율성을 바탕으로 오히려 고통의 과정들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마음의 습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결핍동기'와 보다 나은 자기 모습을 위해 노력하는 '성장동기'가 그것입니다. 만약 배가 고파서 무언가를 먹으려 한다면 그것은 배고픔이라는 결핍을 해결하려는 결핍동기에 의한 행동인 것이지요. 반면에 더 나은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것은 성장동기에 의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충동통제력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높은 편입니다. 레이비치와 샤테의 '회복탄력성 검사 도구'를 통해 미국인과 비교했을 때 회복탄력성의 여러 요소들 중 한국인이 더 높은 수준을 보인 유일한 것은 이른바 '충동통제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요소들은 현저하게 낮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한국인들의 충동통제력이 높게 나타난 것 자체는 일단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동통제력이 건강한 것이 되려면 그것은 반드시 긍정성이나 자율성과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의미 있는 일이니까 다른 충동을 통제해가면서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은 건강한 충동통제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성이나 자율성이 동반되지 않는 충동통제력은 단순한 인내심의 발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 왜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이 충동통제력만 높은 것일까요?

이는 어려서부터 강요받은 참을성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우리나라 교육철학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교육환경은 너무 경쟁중심적입니다. 성적과 내신 등급의 상대적 우위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한국인들은 해야 할 모든 일들을 무조건 '참아내야 할 고통'으로 간주하는 역사성에 젖어들게 된 것이지요.

 

이런 교육 환경 탓에 비록 외형적으로는 충동통제력은 높아 보이고 따라서 가장 긴 시간을 공부하고 일하는 국민이 되어버렸지만, 이처럼 강요된 충동통제력은 창의성과 효율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국가간 학력을 비교 조사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중3(15세)학생들의 수학, 과학, 읽기 등의 학업성취도는 최상위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9년 OECD 국가만 놓고 보더라도 읽기, 수학은 1위, 과학은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부에 대한 흥미도와 자신감, 내재적 학습 동기, 다른 학생들과 팀을 이뤄 공부하는 협동학습, 그리고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 등에서는 최하위 수준이었습니다.

 

보통 학업성취도와 학습동기, 흥미도는 정적인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공부 잘하는 학생이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감도 크게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더 잘하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도, 내적동기, 자신감 등은 최하위 수준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한국 학생들은 뛰어난 능력과 우수한 자질을 지녔으면서도 자율적, 자기주도적 학습이 중요시되는 대학에 들어가면 경쟁력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나아가 사회인이 되어서도 업무성취도나 생산성에 있어서 상당히 뒤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 장애인 최초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는 2010년 어느 특강에서 한국의 높은 교육열에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예로 하버드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는 한국 학생의 비율은 1,600명 중 6%나 됩니다. 그러나 하버드에서 낙제하는 한국 학생 비율은 10명 중 9명이나 될 정도로 높다는 것입니다.

 

교육전문가들은 청소년기 때는 학업성취도가 조금 낮더라도 흥미도나 자기주도적 내적동기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재미있어서 즐기면서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어찌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럼 왜 유독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만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따지고 보면 이것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나치게 당근과 채찍, 처벌과 보상이라는 외적보상으로 동기부여를 이끌어내려는 잘못된 교육철학 때문입니다. 성적지상주의를 외치는 학교와 학부모들이 공동으로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전교 1, 2등하는 중학생이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을 하고 나아가 상아탑이라는 대학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자살, 청소년들의 자살은 사회학자들의 주장처럼 일종의 '사회적 타살'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20~30대 젊은층의 자살률은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병적인 수준의 불행감과 집단적인 우울증에 빠진 학생들에게는 무슨 일이 닥쳐도 다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꿈이 절실해 보입니다. 학생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은 입시위주의 교육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단 하나의 교육 이데올로기가 교사, 학부모 그리고 학생들까지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유일무이한 신앙과도 같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부모들은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놀지 말고 공부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대립시키는 것이지요. 그 결과 '노는 것=즐거운 것', '공부하는 것=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수학공식 같은 위험한 상식을 아이들에게 맹목적으로 주입시키게 된 것입니다.

 

결국 공부는 아주 재미없고 고통스럽지만 훗날의 즐거움을 위해서 참아 내야 하는 것이 되버린 것이지요. 공부를 고통의 덩어리로 만들어 놓고 그러한 고통을 누가 누가 더 잘 견디나 하는 고통주기 게임을 집단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한국 교육의 실상입니다.

 

인터넷에서 본 초등학교 5학년의 글입니다.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란 감옥에 갇혀,

교복이란 죄수복을 입고,

실내화란 죄수신발을 신고,

공부란 벌을 받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

 

가수 서태지가 부른 <교실이데아>노랫말의 일부이다.

매일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썩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학교라는 감옥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어른들입니다. 시대가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뀌었는데도 어른들은 여전히 자신이 공부한 방식-공부는 재미없지만 미래를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강요합니다. 물론 가끔이지만 이러한 교육이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빙산의 일각인 동시에 바람직하지 않은 교육법입니다.

 

우리는 왜 무조건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악바리 공부법에서 벗어나 재미있고 즐겁게 공부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교육철학으로의 변화가 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장 결과가 나지 않는 장기적인 마라톤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쉽게 나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감옥에서 석방된 아이들은 다시 대학이라는 더 크고 호화스러운 감옥으로 옮겨갑니다. 초등학교 때 잘해야 중학교 때 성적이 좋고 중학교 때 성적이 잘 나와야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서 출세한다는 식입니다.

 

지나간 것은 그 시대와 환경 탓이라 치더라도, 지금부터는 공부를 재미있는 놀이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당장은 성과가 나지 않고 정착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겠지만 이것을 포기해서도, 늦추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공부를 다른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더라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은 늘 지적 즐거움을 추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읽고, 쓰고, 그리고, 부르는 여러 가지 창작활동이 인류 역사의 큰 줄기입니다.

 

재미있게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키워져야 합니다. 같은 일이라도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느낌이 들어야 흥미를 느끼고 재미있게 할 수 있게끔 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꼭 해야 하는 것'이라는 압박을 느끼는 순간 그것에 대한 흥미를 급속히 잃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좋아서 취미로 하던 일이 돈벌이가 되면 갑자기 재미없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게임을 엄격하게 금지하면 할수록 오히려 아이들은 게임중독에 빠질 경우가 훨씬 더 높아진다고 합니다. 게임을 하지 말고 공부하라는 부모의 지시가 점점 더 문제해결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지요. 공부는 하기 싫은 것인데, 엄마가 하라고 강요되는 것이고, 반대로 게임은 재미있고 하고 싶은 것인데 엄마가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공부라는 고통을 피하고 엄마에게 반항하는 수단으로 게임에 더 적극적으로 의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지 말고 공부해라',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와 같은 말은 교육방법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히 고등학생들은 공부가 하기는 싫지만 참고 견뎌내어 좋은 대학에 입학한 후 놀자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또다시 좋은 직장에 입사한 후를 위해 지금의 행복이나 즐거움은 미뤄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그 어려운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행복해 지지 않는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승진이라는 더 힘든 경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공동무덤에 두고 경쟁이라는 달리기를 위해 현재를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100미터 달리기라 생각합니다. 100미터 달리기는 같은 출발점에서 같은 방향으로 달려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 하는 경기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같이 지점에서 같은 방향으로 달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옆으로 달릴 수도 있고, 힘들면 쉬어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 방향으로 달리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헌법에도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현실의 가장 큰 병폐입니다. 헌법에 나와 있는 이른바 '행복추구권'은 공동묘지에서나 필요한 것인지 반문해 볼 일입니다. 미래를 위해 참고 사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의 삶은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어떤 미래를 위해 마지못해 참고 견디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타워스 왓슨이 2009년 11월부터 2010년 1월까지 한국의 응답자 1,000명을 포함해 미국, 영국, 일본 등 전 세계 22개국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를 내놓은 '2010 글로벌 인적자원 보고서'에 따르면, 자신의 업무에 별로 몰입하지 않거나, 마지못해 회사에 다니는 우리나라의 직장인 비율이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48%에 달해 조사대상 평균치인 38%를 훨씬 상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근무하는 기업의 성공을 위해 어느 정도 추가적인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는가를 의미하는 이른바 '회사에 대한 자발적인 충성도' 역시 평균치인 21%에 훨씬 못 미치는 6%에 그쳤습니다. 최하위 수준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지만 결과는 최고 낮은 수준으로 나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개인보다는 회사일을 중시해 왔던 우리나라 조직문화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일사분란하고 단합된 충성심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회사에 대한 충성도 역시 세계최하위 수준입니다.

 

아무튼 취직하는 것도 어렵지만 취직을 해서도 문제입니다. 이 조사결과가 말해 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우리나라 직장인 역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는 일에 흥미가 없고 재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긴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하는 것이니까요. 외적보상만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교육철학이 기업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긍정심리학의 강의로 유명한 탈 벤샤하르는 미래의 달콤한 보상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는 식의 삶의 태도를 '채식주의자의 맛없는 음식'에 비유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맛이 없지만 훗말 몸에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꾹 참고 먹는 것입니다.

 

반면 기름기 많고 달콤해서 당장은 입이 즐겁지만 훗날 몸에는 해로워서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음식입니다. 즉 맛이 없으면 몸에 좋은 것이고 맛있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식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공부는 고통스러운 것이고 놀이는 재미있는 것이라는 우리의 교육이데올로기와 비슷합니다.

이상적인 음식은 지금 당장 먹으면 맛있고 행복하고 몸에도 좋은 것입니다. 바로 지금 행복하면서도 미래의 꿈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꿈을 이루고 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때문에 꿈을 이룬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직장에서도 일하는 것을 고통으로, 참아내야 할 괴로움으로 인식하는 사람일수록 열심히 해도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하는 일을 '마지못해 참으면서'하는 사람이 성공한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재미가 없다면 차선책으로 그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한라산 정상을 목표로 오르는 사람은 정상을 향한 발걸음 하나 하나가 모두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정상에 올라야만 등산은 아닙니다.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즐기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겠지요.

-본 글은 김주환의 <회복탄력성>, "Part3-참지 말고 즐겨라"의 내용을 참조하여 각색함.

 

어른이 아이보다 세상에 대하여

의사가 환자보다 상처에 대하여

교수가 학생보다 학문에 대하여

목사가 신도보다 믿음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다고 단정하지 말라

내가 모르는 한 가지를

그가 알고 있고

그 한 가지가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

꿈은 양이 아니며

꿈은 더 위에 있거나

혹은 더 아래에 있지 않다

-<1cm>, '진리에 대하여'를 참조하여 각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