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자기를 믿는 것이다."
-막심 고리키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저자 장하성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교육이 제대로 역할을 해 사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국가는 북유럽의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나라들이라면서 "이들 국가에서는 성장 환경이 좋지 않은 아이들도 교육을 통해 국가 사회의 중요한 인적자원으로 길러낸다"고 했다. 동시에 교육 시스템이 나쁘면 가정환경이 안 좋은 청춘들이 '이런 걸 해서 뭐하나'하고 생각하게 되어 자포자기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그렇고, 우리나라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맨땅에 헤딩하듯이 열심히 노력하면 됐는데, 이제는 시스템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반값등록금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지만 대학을 가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최근 <미디어리서치>의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학교생활을 불행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 수업을 받으면서 기쁘거나 행복하다고 느끼는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3.4%가 '약간 불행' 혹은 '매우 불행'이라고 답한 것이다. 대부분 중3 이상으로, 하루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는 16세 이상 학생의 경우엔 60.4%로 더 높았다. 기업 인사담당자의 75%도 현재 한국의 교육이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가장 많은 59.3%가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수업 방법을 꼽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갈등의 매듭을 교육에서 풀어야 한다는 '교육 희망론'을 잃지는 않았다. 학부모의 58.3%, 기업의 65%가 교육시스템의 발전과 개혁이 자본주의 문제 극복의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직은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데 학부모의 72%, 기업의 78.5%가 동의한 만큼 개개인이 갖고 있는 특기를 발견해 이를 키워준다면 교육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통계에서 보듯 우리나라 학생들이 공부라는 굴레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은교육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잘 아는 사실이며, 어제 오늘의 이야기도 아니고 전혀 새로운 일도 아니다. 모두가 교육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대안은 없어 보인다. 결과적으로 학생과 학부모, 기업, 그리고 국가 그 어느 한 쪽도 만족하지 못하는 교육이 계속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교과서를 덮고 다시 공부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창의력은 엉뚱함이다
그동안 우리 교육은 정형화된 기술적이고 테크닉이 우수한 인재는 많이 배출했지만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인재를 길러내는 데는 구조상 한계가 있다. 따라서 창의력과 상상력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었다. 모두가 명문대를 갈 것처럼 공부를 했고, 대학을 가서는 고시를 위해서 뛰는 형국이다. 이제 학교에서 배운 스펙으로 경쟁하는 시대가 아니기에 지금과 같은 기능적 역할을 강조하는 인재들은 발붙일 곳이 없다. 인간의 두뇌 용량의 70억 배가 넘는 정보가 쏟아지는 마당에 점수로 줄을 세우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향후 5년 안에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하는 가장 훌륭한 강의를 집에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 학생도 있을 텐데 그것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 자리를 이른바 '대안학교'가 빈자리를 메워가고 있지만 공교육은 아직 이에 대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교육현장에서는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공부가 하기 싫은 학생들 역시 억지로 하니 재미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재미가 없으니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즐겁게 공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공부를 재미있게 하려는 노력이, 싫어도 공부를 해야 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억지공부'는 대학생이 되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얼마 전, 모 대학에서 경영학과 전공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이지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 부지런하고 빈틈이 없어서 무서울 정도였다. '부지런한 게 왜 무서운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첫 시간 수업인데도 출석은 물론이고 지각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80년대 필자가 대학 다닐 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평균 잡아 당시에는 첫 수업 출석률이 90%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00명 중 10명 정도는 이런 저런 사유로 수업을 듣지 않거나 지각을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요즘은 100% 출석에 0% 지각이다. 하늘을 베개 삼아 벤치에 누워 비틀즈의 노래에 열광하고, 연못가 잔디밭에 둘러앉아 소크라테스를 논했던 아날로그적 캠퍼스의 낭만은 점점 사라져 가고 그 자리를 영어와 취업 그리고 도서관이 대체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깝다.
게다가 어려운 리포트도 척척 박사처럼 빠짐없이 제출하는 통에 학점 주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마치 100명이 한 사람처럼 움직인다. 정말 거기서 거기다. 오십 보 백보다. 하지만 리포트나 발표 등에서 독창성과 차별성을 가진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기존의 방식을 따르는 것은 잘 하는 편이지만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어려워한다. 지금이나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대학에서도 강의평가제를 도입하는 등 많은 변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강의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학생들 역시 공부하는 방법도 비슷하다.
무리를 이탈했을 경우 겪게 되는 고통을 혼자 감내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탓이다. 청춘이란, 젊음이란, 필시 실패를 하고 또 그 실패를 인정받는 법인데도 요즘은 좀처럼 실패하는 학생이 없다. 실패하는 학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학생이 없는 것이다. 도전하지 않으니 실패할 수도 없다.
역으로 말하면 실패했을 경우 사회가 그 실패를 경험으로 인정해 주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어릴 때부터 이른바 '튀는 놈'을 관리하고 다듬어 보석으로 만들 수 있는 학교 내의 시스템이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튀는 놈'은 '이상한 놈'으로 또래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선생님에게도 찍히게 되는 것이다.
직장은 계급화, 학교는 서열화
지금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대구 초등학생 5학년 자살'이라는 기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자살의 이유는 또래 학생들의 집단 괴롭힘과 폭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TV와 신문에서는 연일 야단법석이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모아 토론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그동안의 과정을 볼 때 토론을 위한 토론, 토론하는 그 순간으로 끝나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급기야 얼마 전에는 국무총리까지 나서 학교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불처럼 타올랐다 금방 사라지는 일회성 대책이 아니길 기대한다. 대안을 마련하는 길은 알지만 이해관계자들이 너무 많아 산으로 가기 일쑤다. 가해 학생들은 수시로 피해 학생의 돈을 뺐고 심지어 물고문까지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 물고문이라니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 또래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학교에 CCTV를 추가 설치한다느니, 보안관을 배치한다느니 하는 단기적 대책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성적으로 서열과 등급을 매기는 교육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와 16개 시도교육청에서 파악한 '학생 자살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은 총 735명으로 조사됐다. OECD 국가 중 학생 자살률 역시 우리나라가 부동의 1위다. 세상이 온통 물음표 투성이고, 좌충우돌해야 할 아이들, 자살이란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뛰어 놀아야 할 아이들이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결과다.
에두아르 로네가 쓴 <완벽한 죽음의 나쁜 예>라는 책에 수록된 죽음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통계는 '나이에 따른 자살 성공률'이다. 25세 미만 여성이 자살에 성공할 확률은 160분의 1에 불과하지만 65세 이상의 성공률은 무려 3분의 1이나 된다. 특히 남성 노인의 성공률은 2분의 1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인의 자살 행위가 더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충동적으로 자살을 선택하지만 노인들은 심사숙고하여 자살을 선택한다. 혹시 자살에 실패할 경우 얼마나 비참해질지 노인들은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외국의 통계를 보면 자살은 두 세 번의 시도 끝에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예방이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자살성공률은 이 통계를 무색하게 한다. 그 마음, 꼭 죽어야 한다는 그 단호하고 절박한 마음이 너무 비장해 보여 슬프다. 자살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다. 자살을 개인의 문제나 의지력의 문제로 생각하는 한 결코 대책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살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우리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성적 하나로 서열이 매겨지는 시스템 하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그것을 만회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일탈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서열화를 가장 먼저 배우는 곳이 초등학교가 아니었으면 한다.
암튼 요즘 아이들은 참 부지런하고 너무 열심히 한다. 배워야 할 것도 해야 할 일도 너무 많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생이 되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고, 역사상 가장 화려한 스펙과 재능을 가진 청춘들의 고통은 대한민국의 심각한 인적자원 낭비다. 그들의 눈물이 우리나라의 미래조차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요즘 청춘들은 결코 울지 않는다. 아프면 아프다고 싫으면 싫다고 하는 것이 청춘인데 아파도 안 아픈 척, 싫어도 좋은 척,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너무 일찍 사회시스템에 적응해 버린 결과로 청춘들의 마음의 키가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아 걱정스럽기만 하다.
'남자들은 울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역사와 괘를 같이 해왔다. 그런 탓인지 정말 감동적이고 슬픈 상황에서 막상 울려고 해도 눈물이 잘 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따지고 보면 눈물이 많아진다는 건 경험이 많아지는 것이다. 경험이 많아질수록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 가지 상황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니까. 공감한다는 것은 남 얘기가 아닌 내 얘기 같다는 마음이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맞장구를 치게 한다는 것이다. 내 이야기니까 눈물이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눈물이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대가로 내가 세상에 지불하는 동전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어찌됐던 슬픈 눈물이라면 싫지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흘리는 눈물은 반가운 일이다.
과거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
40대 초반에 대기업 이사로 파격 승진한 학교 선배를 만났다.
내가 서른 즈음의 무미건조함에 대해 털어놓자,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30대를 후회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건 단 하나의 메시지 때문이었네.
바로 ‘과거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였지.
과거에 자꾸 먹이를 주면 미래를 키울 양식이 바닥나고 만다네.”
그 순간, 나는 찬물을 머리에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그렇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먹이를 주어 그 몸치를 불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쉽지 않지. 후회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파도처럼 불쑥불쑥 우리 인생을 덮치게 마련이니까.
그럴 때 쓰는 방법이 생각을 멈추는 것일세.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지금 당면한 일에 정신을 집중해 보게나.
그러면 시간을 매우 알차게 활용했다는 느낌이 들 거야.
바로 그 느낌이 중요하네.
그 느낌을 유지하는 훈련을 반복하면 결코 과거에 먹이를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걸세.”
그 뒤, 나의 30대는 거짓말처럼 하루하루가 소중해졌다.
지금도 나는 과거의 후회가 떠오르면, 그 즉시 멈춰 서서 나 자신에게 큰 소리로 명령을 하곤 한다.
“멈춰! 스톱!”
오구라 히로시의 <서른과 마흔 사이>에 나오는 말이다. 상처는 대부분 시간이 해결해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치유는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과거에게 자꾸 먹이를 주지 말자. 곰팡이가 있어서 퀘퀘하고 지저분한 게 아니라, 퀘퀘하고 지저분해서 곰팡이가 생기는 것이다. 좋은 일이 생겨야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해야 좋은 일이 생긴다. 과거에게 먹이를 많이 주는 곳이 회사다.
인사가 만사다
한 예로 우리나라 기업들의 인사채용 과정을 보자. 사실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어느 방식이 좋다 나쁘다의 이분법적 차원이 아니라, 바뀌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람마다 다양한 특성을 가진 특기나 장점들을 가려내는데 한계가 있다. 채용시스템을 보면 마치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빼곡히 빈칸을 채운 이력서와 4x3 증명사진 그리고 가족사항, 출신학교, 출생지, 아버지가 하는 일, 면접 그리고 신체검사.
사진 규격도 똑같다. 좀 커도 안 되고 좀 작아도 안 된다. 너무 웃어도 안 되고 너무 화난 표정도 탈락의 지름길이다. 온통 되는 건 없고 안 되는 것만 가득하다. 그리고 온 몸이 나오는 사진도 안 되고 입 벌리고 찍은 사진도 곤란하다.
필자가 만난 기업의 인사담당자들 역시 어려움을 토로한다. 바꾸고 싶어도 객관성을 담보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기업 입장에선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장점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채용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시대 흐름을 반영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러면 지원자 역시 하나의 이력서로 여러 회사를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이력서는 개인의 역사다
회사마다 철학도 다르고 생산하는 제품도 다르고 기업문화도 다른 것처럼 채용방식역시 다양화 되어야 한다. 시스템에 지원자를 끼워 맞출 것이 아니라 지원자에게 시스템을 맞추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요구하는 서류, 사진 크기, 심지어 자기소개서 양식까지 모두 똑같이 만들어 놓고 특이한 지원자가 없다고 하소연할 일은 아니다. 기업에서도 학교가 필요한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다고 뒷짐만 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인재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다양한 채용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구직자보다는 기업이 우월적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교육은 그 특성상 집단화된 인간을 배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에서 기업이 요구하는 우수한 인재를 길러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학교와 기업 간의 인재요구 격차는 좁혀지기보다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사실 복잡하고 다양화되는 시대에 학교 입장에서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애매한 게 사실이다. 기업도 가만히 앉아서 우수한 인재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평소에 학교 현장으로 달려가 관심을 기울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향후 지금과 같은 정형화된 이력서가 사라져야 하고 분명 사라질 것이다. 이력서는 개인의 인생 역사이자 스토리다. 땀과 눈물, 기쁨과 아픔이 함께 녹아 있다. 이력서가 다양해지면 다양한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채용하고 배치하는 일도 쉬워진다. 이력서가 사라진다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카페나 블로그와 같은 그 사람의 인생스토리가 축적되어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될 것이다.
하지만 SNS 역시 자신의 철학과 꿈을 담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낭비일 뿐이다. 철학과 꿈이 담겨있다는 것은 스펙이 아닌 스토리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인터넷을 떠돌며 가십이나 유행하는 연예인 사진이나 정보를 찾고 모으는 것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결국 삶이란 선택하고 실패하고 도전하고 또 다른 것을 선택하고 다시 실패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중요한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실패를 받아들이고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력이다.
아이가 죽기 살기로 배우고 싶다고 해서 피아노 학원을 보내줬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하기 싫다고 태권도학원을 보내 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많은 학부모들은 "네가 배우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니 끈기를 갖고 배워야지. 왜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야!"라며 아이를 몰아세운다.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졸랐다가 막상 해보니 재미도 없고 배우기도 싫어서 하모니카를 배울 수도 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파우스트Faust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라고 했다. 방황은 노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이가 싫다면 바꿔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른도 마찬가지다. 꿈을 찾는 데는 어른, 아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니까.
어리니까.
철이 없으니까.
처음 해보는 거니까.
이것저것 해보고 그만두기를 반복하다 보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내가 그것을 해야 하는지, 하고 싶은지와 같은 가치관이 정립되고 꿈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결국 꿈이란 다양한 경험에서 나오고 경험이 모여 가치관이 되고 삶이 되고 스토리가 된다.
따라서 누군가의 행동은 미래의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란 독립적으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와 같다. 세상 끝, 맨 밑바닥에서도 '여기가 시작점이야, 여기가 내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라고 말 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이런 마음만 있다면 때로는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도 나쁘지 않다.
따라서 걱정할꺼리도 걱정할 대상도 아니다. 청춘들에게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래서 더 많이, 더 자주 실패하고 또 변덕을 부리고 포기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 한라산이 좋아서 오르다가 갑자기 싫어지면 꾸역꾸역 계속 오를 것이 아니라 빨리 내려와 지리산을 오를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 그러다보면 내가 오르고 싶은 산은 한라산도 지리산도 아닌 설악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오르고 싶었던 산은 따로 있었고 또 내가 오르고 싶었던 산을 오를 때 힘도 덜 들고 재미있게 오를 수 있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외과 의사 토마스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공산당원들을 비판하는 편지 한 통을 쓰는 실수를 범한다. 러시아 군인들이 국권을 다시 장악했을 때 그는 자리에서 해고되고, 취업의 어려움 앞에서 유리닦이로 전락한다. 처음에는 침체기를 겪은 후 토마스는 이 일을 하면서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무수한 인연들을 만나기도 했던 만큼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이 일을 통해 더욱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의사와 유리닦이 그 어느 것이 결코 우위에 있지 않다. 모두가 좋아하는 의사지만 토마스는 유리닦이를 통해 더 큰 만족과 기쁨을 느꼈다. 모든 베스트셀러가 모두에게 베스트셀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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