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헐렁한 군주론

인문학큐레이터의 <헐렁한 군주룬>-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김부현(김중순) 2013. 1. 18. 21:58

도덕과 정치

 

‘군주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하지만 논의의 대부분은 너무 이상적인 윤리와 의무의 틀에 갇혀 현실을 도외시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쉽다. <군주론>15장

 

불편한 진실은 처음에는 지탄받는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말을 빌리면, “모든 진실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 조롱당한다. 둘째,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셋째,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진실이 진실로 인정받기에는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는 것을 반증한다. <군주론>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군주론>이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명품 고전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도덕과 정치를 분리시킨 진실의 힘’ 때문이다. 도덕과 윤리를 내세워 ‘신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는 교회 권력이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당시 교회권력의 비위를 건드린 것은 마키아벨리에게는 큰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그는 44세가 되던 1512년 공직생활을 끝내고 다음해에 <군주론>을 썼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필사본 형태로 읽혀지다 그가 죽은 후 5년 뒤인 1532년 정식 출판되었다.

굳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당시 서양에서는 ‘도덕=정치’라는 방정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르네상스가 신에게서 인간을 분리한 것처럼 일개 외교관에 불과했던 마키아벨리는 최초로 도덕에서 정치를 분리해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교회의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많아 1559년에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의 축’으로 낙인찍혀 ‘마키아벨리즘’으로 급속히 확대 재생산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마키아벨리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표면적으로는 <군주론>은 악의 축으로 지탄받았지만 그 이면에는 열렬한 추종자가 생기는 이중성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소련의 혁명가 레닌,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와 혁명가 그람시, 쿠바의 카스트로와 같은 사람들이 군주론을 탐독했다. 누구나 인정하고 싶은 진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좋은 여자이기보다는 나쁜 리더가 되라.

 

예전에 은행에서 기획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입사 3년차 P여직원이 생각난다. 지방대였지만 토익과 해외 어학연수 3개국 등 준수한 스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스스로 하기보다는 지시하는 일만 하려고 해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동업계의 자료 수집이나 금융상품 개발을 위해 외근이라도 보내면 내켜하지 않았다. 외근도 싫고 출장도 싫으니 1박 2일 가는 먼 출장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니 같이 입사한 남자 직원과 경쟁 자체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쟁할 자세도 되어 있지 않았다. 입사 1년이 되기도 전에 리더가 되려는 직원과 적당하게 일하려는 직원들이 극명하게 구별된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까마득한 일이지만 상당수의 여직원들은 입사할 때부터 목표를 확 낮춰버린다. 대학까지 졸업하고도 적당히 근무하다 때가 되면 결혼하면 된다는 식이다. 조직 생활을 시작하는 상당수의 여성들은 조직 내 목표가 없거나 있어도 너무 작다. 팀장이나 리더가 되려는 노력을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 회사의 중장기 계획보다는 ‘백마 탄 왕자’를 꿈꾸고 연예인, 패션과 드라마와 같은 신변잡기에 더 관심을 가진다. 회사의 업무 관련 자료나 책을 들고 다니기 보다는 카푸치노 커피를 들고 다닌다.

욕먹고 찬바람 맞는 리더가 되기보다는 좋은 여자를 꿈꾸는 것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백마 탄 왕자’는 커녕 ‘흑마 탄 거지’를 만나기 십상이다.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빌린다면, 좋은 리더가 되려면 상황에 따라 악한 기질을 가져야 한다. 여성들은 이것이 싫은 것이다. 나쁜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단언컨대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일수록 성공에 가깝다.

아무튼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고 리더가 되기를 포기한다. 남성 위주의 조직문화를 탓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코 남자들 탓이 아니라 여성들 탓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데도 월급을 적게 받는다고 난리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어떤 회사가 같은 일을 하는데 굳이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많은 월급을 주면서 남성들만 채용하겠는가? 만약 그런 CEO나 기업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 CEO는 집에 가게 될 것이고 회사역시 망할 것이다. 경쟁력이 생명인 회사는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자선단체가 아니다.

많은 회사의 리더들은 왜 여자보다 남자들이 많은가? 그건 남성위주의 기업문화가 지배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능력을 제한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이제는 기업이나 조직에서 상당수의 여성들이 리더의 자리에 올랐다. 그 중에는 스스로의 능력보다는 사회적 배려에 의한 경우도 있다. 국회의원도 여성할당제라는 것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제는 배려받기보다는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도전해서 쟁취해야 하는 마키아벨리 정신이 필요하다. 지금은 물리적인 힘으로 되는 세상이 아니다. 지게를 지고 일하는 농경시대도 아니고 칼을 들고 산에 가서 동물들과 맞서 먹거리를 마련해야 하는 물리적 힘의 시대가 아니다. 부드러움과 공감이 물리적 힘을 대신하는 시대다.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직업들이 여성들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남성들은 빼앗길 것만 있고 여성들은 빼앗을 것만 있다. 바야흐로 여성시대다. 국무총리를 넘어 대통령까지 여성인 나라다. 월급의 적고 많음은 성별의 차원이 아니라 업무의 차원이다.

 

21C 여성, 마키아벨리 정신이 필요하다

많이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조직 내 남녀불평등은 존재하고 있고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남녀불평등은 두 가지로 방해를 받는다. 하나는 권리를 조금도 나누려 하지 않는 남성들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여성들 때문이다. 특히 조직에서. 남녀평등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여성은 경제적으로 홀로 설 수 있는 여성들로 국한된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 여성은 일을 해도 되고 남성은 일을 해야만 한다. 여성에게 일은 선택이지만 남성들에게는 필수다. 이러한 오래된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여성들 몫이 크다. 역사를 봐도 권력이나 성공, 내가 점하고 있는 유리한 위치를 순순히 내놓는 사람은 없다. 배려받기보다는 쟁취해야 한다. 마음에 숨겨져 있는 과거의 의식들이 끊임없이 착한 여자 신드롬을 제물로 만들어 내려고 한다.

여성이 해 낸 일을 가장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여성 자신이다. 혹자는 “남성의 경쟁자로서의 여성은 이미 어린 시절에 제거된다.”고도 한다. 왜일까?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씌어진 교과서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의 승자는 남성들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남성들은 끊임없이 달콤한 말로 여성들을 구속하고 있다. ‘애교’라는 말도 그런 경우다. 남성들이 여성들을 옭아매기 위해 만든 단어다.

그럼에도 세상은 변했고 바뀌고 있다. 여성들은 기회가 많은데도 여전히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성 스스로가 옴짝달싹도 못할 만큼 단단한 차별의식의 밧줄을 자신에게 묶어두고 있다. 자신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무작정 기다리면 근사한 왕자님이 유리 구두 한 짝으로 인생을 확 바꿔줄 것이라고 믿는 ‘신데렐라 신드롬’, 근사한 왕자님의 키스 한 번으로 모두 근심을 날려줄 것이라 믿는 ‘백설 공주 신드롬’, 그리고 무작정 해맑은 미소만 짓고 있으면 착하고 참한 여성으로 발탁되어 행복한 인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모나리자 신드롬’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수의 직장에서 상당수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보수나 승진의 기회를 좀처럼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여성이 해 낸 일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바로 ‘여성 자신’들이다. 안타깝게도 극히 소수의 여성들만이 경제적 독립으로 향하는 살벌한 전쟁터에 선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아직까지도 구시대적인 여성상에 얽매여 있다. 어쩌면 그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기보다 차라리 착한 여자로 살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해 내기에는 자기가 너무 무능하다는 생각에 길들여진 여성들이 의외로 많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항상 다른 사람이나 운명에 의존한다.

여성들은 지나칠 정도로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규칙에만 매달려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아무 비판 없이 내조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규칙에 순응할 뿐이다. 대부분의 규칙들이 여성들을 자신의 역할에 얽매고 속박하는데 사용되는데도 그저 규칙만 따를 뿐이다. 500년 전 죽은 마키아벨리가 무덤에서 나와 여성들을 부르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남성들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독립하라고, 착한 여자이기보다는 나쁜 리더가 되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많은 여성들이 교육이나 협상 능력,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기르기보다는 그들의 외모를 가꾸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한결 쉬운 삶으로의 길을 터주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은 착각이다. 이미 많은 남성들이 동등한 여성, 즉 서로 싸우며 사랑할 수 있고 책임과 생존의 안정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여성을 파트너로 원한다. 강한 여성과의 논쟁이 남성들에게 더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긴 안목으로 볼 때에 그런 여성을 파트너로 삼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하다는 사실을 남성들은 이미 깨닫기 시작했다.

 

현모양처가 되기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악처가 되라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실추하고 남녀평등을 지연시킨다. 이것은 지나친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어떻게 남녀평등을 저해하는 것이 여자들 때문이란 말인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녀평등은 지연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권력을 조금도 나누려 하지 않는 남성들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권력을 요구하지 않는 여성들 때문이다. 결국 똑같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독립적인 여성만이 남성들과 동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임신을 하면 임신을 한 것이지 약간만 임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만’ 동등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평등을 포기함으로써 더 안전할 수 있다고 믿는 여성은 머지않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항상 이해하고 뭐든지 참다가 버림받거나 기만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에 대한 낡고 편협한 고정관념을 초월하려 노력하는 여성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종종 소크라테스의 악처 크산티페 같다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에 구애 받아서는 안 된다. 자기 길을 찾으려는 노력과 분명한 의지, 그리고 변화에 대한 욕망은 바로 여성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기 아내가 조금 더 살이 쪘는지 아니면 몇 킬로그램이 빠졌는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남성들은 그것에 큰 관심도 없고 미묘한 몸매 변화는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여성의 자아발전을 단순히 'S라인 몸매 가꾸기'라는 외모에 묶어두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여성 자신이다.

이제 ‘YES’와 ‘NO’를 분명히 하라. ‘NO'라고 말하는 것은, 착한 여자에서 나쁜 여자로 넘어가는 첫걸음이다. 착한 여자에서 악한 리더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현모양처에서 악처가 되는 변곡점이다.

최초의 간호학교 설립자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인생을 개척한 여성이다. 그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고, 전도유망한 결혼을 거절하면서 오랫동안 힘든 싸움을 해야만 했다. 물론 그녀는 어머니에게 끼친 걱정 때문에 자신도 괴로웠지만 결국 그녀는 이겨냈다.

강조하지만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여성들이 주로 포기해왔던 희망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여성들은 더 처절한 승부근성이 필요하다. 장애를 통해 배우고 저항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누군가 말했다. “경제력 없이 멋진 삶을 꿈꾸는 여성들은 남자의 노예가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라고.

 

측천무후와 처칠은 ‘악의 축’이 아니다

 

모름지기 조직의 리더라면 이른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마키아벨리즘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즉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방식’인 도덕과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인 현실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조직의 리더는 홀몸이 아니다. 홀몸인 사람이라면 좋은 여자가 된다고 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라면 경우가 달라진다. 도덕논리에 매몰되어 좋은 여자로만 조직을 운영한다면 그 영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리더는 조직의 영속성과 조직을 따르는 구성원들의 생존권을 확보해야 한다. 좋은 여자로 지는 것보다는 악랄한 리더로 이기는 것이 더 낫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이홍과 이현(李賢)은 물론 딸까지 죽인 악명 높은 중국 최초의 여 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3대 악녀라는 별칭을 얻은 것처럼 나중에는 예종도 폐위시켜 황태자 지위로 강등시키고 결국 자신이 주나라 황제가 되었다. 그녀는 실권을 장악한 다음부터 섬뜩한 공포정치를 폈다. 그녀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또 권력의 정점에 오른 다음까지 포함하여 죽인 사람이 무려 93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 23명이 자신의 가족 및 친족이다. 93명이라는 숫자도 연루되어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숫자는 뺀 것이다.

측천무후의 치세는 정치적으로는 공포시대였을지언정 백성들의 생활 측면에서는 대체로 안정을 누린 시기였다. 물론 그 안정이란 그녀의 공이기보다는 당 제국의 기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정치적 공적은 후한 점수를 주어도 무방하다. 명문 귀족 출신이 아니었던 측천무후는 가문과 혈통 중심이 아니라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이라는 기풍을 진작시켜 당나라의 전성기를 예비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뛰어난 많은 문인들을 적극 우대하여 화려하고 탐미적인 문풍(文風)이 꽃필 수 있게 했고, 불교 숭상을 통해 중국 불교의 융성과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으며, 공예, 도자기, 건축 등에서 당나라 특유의 미적(美的) 기풍을 진작시키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 고종 황제의 황후였지만 황태자들을 연이어 폐위시키는 ‘피의 숙청’을 통해 자신이 황제가 된 여성, 스스로 나라를 세워 15년 간 중국을 다스린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측천무후, 잔인한 폭군이자 권력의 화신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탁월한 정치가이자 군주였다. 그 곡절 많은 삶만큼이나 여러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 유능한 군주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처칠도 마찬가지다.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자가 정의다."라고 말한 영국 수상처칠은 여러 전투를 통해 인기를 얻자, 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다. 스물여섯 살에 하원의원이 되었고,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여러 자리의 장관을 두루 거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 수상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펴냈는데, 이 책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1953년에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받은 정치가는 처칠밖에 없다. 위인전에 등장하는 선량하고 도덕적인 정치가의 모습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 당시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악랄하고 비열한 인물이었다.

측천무후가 단순히 좋은 여자였다면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동시에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었을까. 처칠이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기만 했다면 영국이 독일을 이길 수 있었을까. 결국 군주라면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천양지차다.

 

마키아벨리는 행해지는 바를 따르지 않고(현실)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도덕)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비단 정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치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적인 도덕논리에 매몰된 조직이나 리더 역시 몰락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생존 기계다.", "인간과 기타 모든 동물은 자기 복제하는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너무도 단도직입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된 이후 지난 한 세대 동안 이 책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유사한 점들이 많다. 우선 도킨스는 자신이 사용하는 윤리적 성격의 단어, 즉 '이기적'이니 '이타적'이니 하는 말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해에 주의하라고 한다. 이 말들로 진화에 따른 도덕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말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즉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떠하다고 하는 진술'의 구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식 논법이다. 마키아벨리 역시 ‘도덕=정치’가 진리처럼 이어져오던 당시 도덕을 현실과 분리시켜 접근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의 구별을 전제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도킨스는 자신의 목적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탐구한 데 반해 마키아벨리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정치학'을 탐구했다. 물론 도킨스의 경우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관점'에서 본 한정된 현실이지만, “현실을 직시하라.”는 대명제는 같은 맥락에서 출발했다. 결국 도킨스의 주장은 ’강한 개체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진화론과 괘를 같이 한다. 따라서 강한 여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여자가 강한 여자다.

도덕과 현실은 존재와 당위로 이어진다. '있음(有)과 없음(無)', '현상과 실제', '정신과 신체', '나와 너' ‘보수와 진보’와 같은 모든 이분법(Dichotomy)은 사태인식을 위한 잠정적 혹은 조작적 개념이거나 지성의 미성숙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존재와 당위'라고 일컬어지는 문제 또한 인간 지성이 자주 범하는 분절적, 대립적 사고의 전형으로 특히 서구의 근현대지성사를 면면히 흐르는 경향성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이러한 사유의 특징은 존재와 당위를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본다. 특히, 존재(사실이 이러므로)에서 당위(이렇게 해야 한다)를 이끌어내는 자연주의의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철저히 비판한다.

피렌체의 외교관으로 외교 일선에서 활약했던 마키아벨리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과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것’의 차이를 구구절절이 실감했기 때문이다. 현실을 앞세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도덕이다.

존재(sein)와 당위(sollen)란 독일철학의 관념론적 사유물이자 현대철학의 근간을 이르는 단어이다. 쉽게 말해 존재란 ‘지금의 순간을 나타내는 것이고(at the time of speaking)’ 당위란 ‘마땅히 그러해서 누구나가 수긍할 수 있는, 그래서 어떠한 질서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강한 여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여자가 강한 것이다

 

2012년 12월, 우리는 18대 대통령으로 박근혜를 뽑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다. 투표 결과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이 가장 심하게 작동한 선거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분법적 사고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정치에서 이분법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 가지다. 진보는 '당위'를 추구하고 보수는 '존재'를 추종하는 것이다. 진보는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싸운다. 이를 테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제도와 문화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진보의 사고방식은 연역적 구조를 가진다. '인간은 평등하다'와 같은 추상적 공리에 시작해 구체적 실천 전략과 전술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로 이어지는 일관성 있고 복잡한 논리 체계를 만든다. 진보의 경쟁력은 이상을 향한 열정과 논리의 힘이며, 망할 때는 거의 언제나 '연합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망한다.

반면 보수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불가피한 자연의 질서로 간주하고 그것을 지키려 한다. 어떤 질서든 상관없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군주제를 비롯하여 개발독재, 천황제, 심지어는 공산당 일당 독재조차도 보수가 지키려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보수는 진보와 달리 경험주의적,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견해의 차이는 별 중요하지 않다. 이익이 일치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단결한다. 보수의 경쟁력은 가장 강력한 권력을 중심으로 단일한 위계질서를 수립하는 줄서기 문화와 냉철한 이해타산 능력이다.

그래서 보수가 망할 때는 걷잡을 수없는 부패로 망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보수의 힘은 일반적으로 진보를 능가한다. 보수의 무능과 부패와 나태함이 민중의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만 진보가 승리를 거두며, 그 진보의 승리는 보통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아무튼 이번 대선은 투표율이 75.8퍼센트에 달해 모든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우리나라 정치를 한 단계 성숙시킨 효과도 있었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했다. 실존이란 존재, 본질이란 목적이다. 다른 모든 사물들은 본질이 정해진 후에 실존한다. 뭔가를 기록해야했기 때문에 연필과 종이가 생겼고, 멀리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자동차와 기차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사르트르는 "인간은 목적이 없기에 자유롭다." 역설적이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목적이 없으니까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가능성을 어떻게 끌고 가느냐는 스스로의 선택이다. 태어나기 전에 무슨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태어날 땐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자유롭게 태어난다. 그러기에 우리는 흰 도화지에 저마다의 인생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남녀의 구분이 필요하겠는가? 마키아벨리가 말한다. 역사는 ‘Boys be ambitious’가 아닌 ‘Girls be ambitious’를 부른다.

 

리더는 조직을 위해 영혼을 팔 수 있어야 한다

 

경영학교과서에 나오는 조직組織의 목적은 거창하다. “인간 등의 집단 혹은 공동체가 일정한 목적 또는 의사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휘 관리와 역할 분담이 정해져 계속적인 결합이 유지되고 있을 때, 그 집단을 조직이라 부른다.”

이 문장을 한 단어로 줄이면 ‘이익’이고, 한 글자로 줄이면 ‘돈’이고, 동물적 표현으로 하면 ‘밥’이고, 경영학 교과서적으로 표현으로 하면 ‘사회적 책임’이다. 이익, 돈, 밥, 사회적 책임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밥’이다. 밥을 못 먹는 데 돈이 있을 리 없고 돈이 없는데 사회적 책임 운운 하는 것은 어불성성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에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밥을 먹어야 공자도 있고 소크라테스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김훈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돈과 밥의 두려움을 알라’는 단순명료한 편지가 가슴에 와 닿는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 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 사내의 한 생애가 뭣 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

"우리는 구석기의 사내들처럼 자연으로부터 직접 먹을거리를 포획할 수가 없다. 우리의 먹을거리는 반드시 돈을 경유하게 되어 있다. (...) 다 큰 사내들은 이걸 혼돈해서는 안 된다. (...) 밥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그 (...) 매끄러운 촉감, 이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의 토대인 것이다. (...)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이다.“

"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아버지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다 써라. 난 나대로 벌겠다. "

밥을 강조한 김훈의 스승이 있다. “밥 한 그릇에 세상만사가 들어있다(식일완만사지食一碗萬事知)”라고 한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다. 밥을 못 먹는데는 백약이 무효다. 오늘 당장 밥이 목구멍에 들어가야 내일의 고귀한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영국 시인 새뮤얼 존슨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할 때 가장 순수하다”고 했다. 밥 그것은 인류를 지탱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