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함과 인자함
한 국가를 정복한 군주는 필요한 가해 행위들은 단번에 실행하고 은혜는 조금씩 천천히 베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가해행위는 백성들로 하여금 불안에 떨게 하고 반감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지만, 은혜는 천천히 베풀어야 오랫동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군주가 유념해야 할 것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러한 기조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어려움이 닥쳤다고 군주가 갑자기 거칠게 행동하면 그동안의 좋은 행위도 빛을 잃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그런 자선행위가 위선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 <군주론>8장
급여는 조금씩 자주 올려주고 해고는 한꺼번에 하라
한 마디로, “나쁜 일은 한 번에, 좋은 일은 천천히 나누어서 하라.”는 의미다. 여기서 급여라 함은 포상, 표창, 승진, 권한 확대, 호봉 상승 등과 같은 구성원들의 동기부여적인 제반 요소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천천히, 자주, 조금씩 행하는 것이 좋다. 반면 100명을 해고할 경우가 생겼다면, 10명씩 10번에 걸쳐 행하기보다 한 번에 100명을 모두 해고하는 것이 낫다.
우리가 읽었던 역사 속 위인들의 일대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위인들의 전기는 읽지 않아도 내용은 뻔하다. 고생고생해서 성공했으니 당신도 열심히 하라는 조언이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 뒤에는 때로 서슴지 않고 악행을 저질렀다는 점에 주목해 봐야 한다. 부정적인 면을 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공을 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비도덕도 필요하다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2000번의 실패 끝에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그는 “난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2천 번이나 깨달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명언을 남겼다.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당대 최고위 발명가로서, 실패의 아이콘에서 성공의 아이콘으로 변신한 에디슨이었지만 그가 경영했던 기업의 경영자로서의 평가는 냉혹하다. 돈과 일에 미친 악덕기업주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공장 종업원들은 밤늦도록 일하면서도 최저임금밖에 못 받았고, 공장에는 안전 및 위생시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자본력과 각종 특허권을 이용하여 경쟁 기업들의 사업을 불법적으로 방해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독점하려 한 부도덕한 기업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악덕기업인이라 부르지 않고 위대한 발명가로 부른다. 성공하면 일부 부도덕한 과정은 덮어지는 것이 역사다.
물론 역사 속 군주들이 처음부터 잔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리가 그렇게 만든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도덕을 내세워 신의를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사회에 살고 있어 모든 인간이 정직하다면, 신의를 지킨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이 없다. 그러나 현실 속 인간들은 신의를 지키는 사람을 밟고 일어서는 사악한 존재이므로, 굳이 혼자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
칫솔을 함께 쓰는 친구 간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다. 게임 이론에 “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라는 것이 있다. 프린스턴대학 터커(Albert Tucker) 교수가 고안한 것으로 두 명이 참가하는 비제로섬게임(non zero-sum game)의 일종이다. 이는 서로 협력할 경우 가장 이익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욕심으로 서로에게 가장 불리한 상황을 선택하는 불합리한 의사결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두 친구가 강도짓을 하다 체포되었다. 용의자 A와 B는 서로 다른 취조실에 격리되어 심문을 받고 있다. 용의자들은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검사가 두 명의 용의자에게 각각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할 때 두 명의 용의자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선택1> 죄를 자백한 사람은 즉시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10년을 복역 한다.
<선택2> 두 사람 모두 죄를 자백하는 경우 둘 다 5년을 복역한다.
<선택3> 두 사람 모두 죄를 부인할 경우 둘 다 6개월을 복역한다.
답은 두 용의자 모두 죄를 자백하여 5년을 복역한다. 이상하다. 둘 다 죄를 부인하여 6개월 복역을 선택해야 마땅한데 말이다.결과적으로 A와 B는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자백을 선택하여 둘 다 5년을 복역하게 되고, 이는 둘 모두가 자백하지 않고 죄를 부인하여 6개월을 복역하는 것보다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보인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용의자들은 상대방의 결과는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최대화한다는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위와 같은 불합리하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일어나고 있다. 어차피 배신을 당할 바에는 먼저 배신하라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조언이다.
아무튼 상황이 어떻든 그래도 나는 정직하게 살겠다고 한다면 박수를 보낼 일이다. 선택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르면 그만이다. 원숭이 100마리가 있다. 꼬리가 없는 원숭이가 99마리이고, 꼬리가 달린 원숭이가 1마리 있다. 이 때 1마리는 99마리의 원숭이들에게 오히려 비정상적인 원숭이라고 손가락질 받는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백성들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너무 자비로워 무질서를 방치해서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소수의 몇몇을 시범적으로 처벌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실제로는 훨씬 더 자비로운 셈이기 때문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잔인한 인간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잔인함은 로마냐의 질서를 회복하고 그 지방을 통일시켜 평화와 번영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주론>17장
자비로 인한 혼란보다 잔혹함으로 인한 질서가 낫다
군주는 자신의 백성들을 한데 모으고 충성을 바치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잔혹하다는 비난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도에 넘친 인자함을 베풀어 혼란한 상태가 지속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약탈과 파괴를 경험하도록 만드는 군주보다 아주 가끔 가혹한 행위를 하는 군주가 더 자비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도에 넘친 인자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만, 군주가 집행한 가혹한 조치들은 특정한 개인들에게만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에나보다 몸집이 작은 아프리카의 들개인 리카온은 굶주림이 심해지면 무리를 지어 사자를 공격한다. 싸우는 과정에서 몇 마리는 죽지만 그러는 사이 사자도 치명상을 입는다. 치명상을 입은 사자는 사냥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은 리카온은 다른 리카온들이 돌봐준다. 이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위계질서를 통해 조직을 이루고 그 조직을 통해 생존력을 확보해 나간다.
현명한 잔인함이 진정한 자비다
마키아벨리는 군대를 통솔하는 군주라면 때로 잔인하다는 평판쯤은 개의치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비로운 리더와 잔인한 리더를 비교하는 사례로 한니발과 스키피오를 언급한다.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이야기는 리더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역사적인 교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니발은 잔인하게 부하를 통솔해 배신자가 없었지만, 스키피오는 자비롭게 통솔해 배신하는 부하들이 많았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한 한니발은 많은 종족이 뒤섞인 용병을 거느리고 싸웠지만 상황이 불리하던 유리하던 그 어떤 내부 분란도 없었다. 반면 자비로웠던 스키피오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매우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그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유일한 이유는 그가 너무나 자비로워서 적절한 군사적 규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자유를 병사들에게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장군에게는 현명한 잔인함이 자비보다 낫다는 것이다. 조직의 리더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군에 ‘소원수리’라는 제도가 있다. 필자가 군복무 할 1980년대 당시에는 “소원수리(訴願受理)에는 소원을 적지 마라.”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다. 사실대로 미주알고주알 적었다가는 내무반 생활이 더 괴로워지기 때문이었다. 소원수리는 병사들의 고충을 듣고 개선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무기명이라 솔직히 까발려도 탈이 날리는 없다고 하는데도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죽은 마키아벨리가 강림한 것도 아닌데 소원수리 내용을 고참들은 샅샅이 알고 있었다. 김수복의 소설 <소원수리>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수료를 앞둔 훈련병들이 소원수리를 쓰게 되자 영내에는 갑자기 훈풍이 분다. 조교들은 웃으려고 애를 쓰고, 정훈교육은 숫제 오락회로 둔갑한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훈련병들은 그간의 불만을 적어 낸다. “쓴다고 달라지냐” “이건 함정”이라는 말들이 있었지만 순진한 훈련병들은 별 의심을 않는다. 그런데 잠시 후 분위기가 급전된다. 소원수리를 거둬간 부관은 선착순 집합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매타작과 함께 기합이 이어진다. 선임하사는 “이상 무” “불편 없음”을 선창하고, 훈련병들은 목이 터져라 복창한다. 다음날 진짜 소원수리가 실시됐을 때 훈련병들은 일사불란하게 “이상 무”라고 적어 내려간다. 혹시라도 “어느 놈이 개나발 불지나 않는지” 서로서로 감시하며….
군대나 조직이나 억압된 분위기에서는 진실을 진실대로 말하기 힘들다. 스페인의 철권 통치자 프랑코 총통이 모로코에서 일선 부대를 지휘할 때였다. 배급된 식료품이 형편없자 병사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런데 겁 없는 졸병이 프랑코가 나타나자 홧김에 프랑코의 얼굴을 향해 식판을 던져 버렸다. 프랑코는 담당 장교를 불러 “식사의 질을 높이라”고 지시한 뒤 졸병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이 병사를 끌어내 즉각 총살하라!” 이런 분위기에서 겁 없는 직언은 철없는 짓이다.
프랑코 총통의 이런 일화는 <군주론>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물론 부실한 급식이 일차적인 원인 제공을 했지만 상관에게 도발한 하극상도 군율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총살형이 최선이었는가에 대한 판단은 별개의 문제다. 마키아벨리는 부하의 하극상을 눈감아 주는 선한 장수는 리더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리더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리더이기 때문에 때로는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민주적 리더십이 각광받는 시대다. 하지만 민주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총칼 대신 법과 제도로 다스린다는 의미상의 변화일 뿐 그 근본은 같다. 리더라면 응당 소설 속 주인공 같은 ‘고귀한 이상’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현실은 냉혹하다.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실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현실적 리더십 위에 이상적 리더십이 더해져야 한다.
군주가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더 나은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사랑도 느끼게 하고 동시에 두려움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동시에 둘 다 얻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굳이 둘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군주론>17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본 대부분의 인간들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위선적이고 위험을 피하려 하고 이익에 눈이 멀었다고 편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는 온갖 충성을 바친다. 평화시에 그들은 당신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자신의 소유물, 생명까지도 당신을 위해 바칠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막상 당신이 위험에 처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되면 그들은 냉정하게 등을 돌린다. 따라서 평화로울 때 당신에게 아부하는 인간들을 멀리해야 한다. 또한 인간은 사랑하는 자를 해칠 때보다 두려워하는 자를 해칠 때 더 주저하게 된다. 사랑이란 일련의 의무감에 의해 유지되는 것인데 인간은 비열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경우라도 그것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항상 효과적인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실패하는 경우가 결코 없다.
특히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당시에는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비열한 짓을 일삼았던 난세였다. 피아의 구별이 모호한 상황에서 난세를 통과하려면 기만과 음모라는 비도덕적인 방법을 동원하라고 마키아벨리는 충고한다. 난세에는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 있어도 무의미하다. 선이 곧 악이고, 악이 걷 선이다. 이긴 자가 선이고 패한 자가 악이 된다. 의사들은 이 세상에 독성 없는 물질은 없다고 한다. 함량이 적어 몸에 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야채에도 독성 물질은 존재한다. 미량이기 때문에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을 뿐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당시 이탈리아의 정신세계를 담당했던 카톨릭 교회의 도덕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부분이 많아 결국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급기야 1740년 프로이센 프리드리히대왕은 28세의 나이에 <반군주론>을 집필하여 ‘마키아벨리를 인간성을 파괴하는 괴물’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그로부터 15년 후 프로이센은 로이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전 유럽을 상대로 싸우기란 벅찼다. 시간이 흐를수록 프로이센의 자원은 고갈되었고, 전황은 불리해졌다. 프로이센은 패하는 전투가 많았지만 그래도 프리드리히 2세의 탁월한 전술과 잘 훈련된 군대 덕분에 궤멸은 피했다. 독약으로 자살까지 시도했던 프리드리히 2세에게 1763년 광명의 빛이 쏟아졌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 프리드리히 2세는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베를린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독일 국민들은 그에게 ‘대제’의 칭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완전히 독재자로 변했다. 전쟁 중에 그는 가혹한 징세를 실시했고, 병력 조달을 위해 납치도 서슴치 않았다. 정적을 가혹하게 숙청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지만 개인적으로는 청렴하고 고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가장 앞장서서 비판했던 그가 마키아벨리즘을 열렬히 추종한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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