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는 전쟁과 관련된 전략 수립 및 군사훈련 외에는 그 어떤 일이든 목표로 삼거나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며 또 연구해서도 안 된다. 군주가 군대와 관련된 일보다 개인적으로 사치스러운 일에 더 몰두하게 되면 그 지위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군대를 갖추지 못하는 군주는 경멸을 당한다. <군주론>14장
성공은 운과 우연의 산물이다
제갈공명은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라고 했고, 프로이센의 군사이론가였던 클라우제비츠Clausewitz도 <전쟁론> 제1권에서 ‘운과 우연’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설파했다.
“전쟁은 그것의 객관적인 본질로 말미암아 일종의 확률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단 하나의 요소만 더 있으면 그것이 확률 게임이 아닌 진짜 게임이 되는데, 전쟁에는 그러한 요소가 늘 있다. 그것의 이름은 다름 아닌 바로 ‘우연’이다. 인간의 활동 가운데 전쟁만큼 우발적 사건과 끊임없이 그리고 광범위하게 부딪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우연이라는 요인 때문에 전쟁에서는 ‘운수’와 ‘요행’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제 “아침형 인간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새벽에 일어나 무슨 일이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철지난 ‘성공교과서’는 유통기한이 지났다. 하지만 이 교과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우롱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흉내 내고 있다. 솔직히 남들 잘 때 안자고 남들 먹을 때 안 먹고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논리는 산업화의 시대에 가능한 논리다. 소위 자기계발서에서도 앵무새처럼 아침형인간이 되어야 성공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과거의 성공방정식이다. 환경 변화가 미미한 안정된 사회에서의 성공법칙이라는 말이다. 지금처럼 빠르고 다양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열심히 부지런히 일한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성공할 수 있다면 새벽에 남산약수터에 모이는 사람들은 모두 성공의 깃발을 꽂았어야 했다.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하는 시스템이라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청과시장에서 수레를 끄는 사람들은 모두 성공했어야 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면 이른 아침 눈을 부비며 만원 전철에 몸을 맡긴 채 출근하는 샐러리맨들은 모두 별을 달았어야 했다.
일찍 일어나, 열심히, 부지런히 하되 왜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거기에 운이 따라야 한다. 운이 없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운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부자인 부모를 만나는 것도 운이고, 돈 많은 투자자를 만나는 것도, 하늘이 도와주는 것도 운이고, 실력에 의한 것도 운의 범주에 들어간다. 실력이 있어도 운과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미국의 석유왕으로 불리며 세계 최대의 부자반열에 올랐던 존 록펠러도 성공의 비결을 “첫째도 운, 둘째도 운, 셋째도 운”이라고 했다. 열심히 해서 될 일이 있고 하늘이 도와주어야 할 일이 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 한다. 운을 연구하는 학자도 있다. 영국의 행운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 교수다. 그는 약 10년 전 1,000명을 대상으로 운에 대해 심층연구한 뒤 “운 좋은 사람은 예기치 않은 기회를 활용해 행운을 만들어낸다. 낙관적이고 정력적이며 개방적이다. 운 나쁜 사람은 반대다.”라고 주장했다. 나이가 들수록 노력보다 운이 더 크게 보이는 경우가 잦아진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운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인내와 노력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운도 따라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범주가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지적처럼 운의 반 이상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 운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은 자신의 일에 열과 성을 다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다.
성공의 기회는 평등하지 않다.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방정식은 성공한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리다. 우리 사회가 생각만큼 진일보가 느린 이유는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을 하고 나면 성공하기까지의 치열한 과정은 잊어버리고 기존 성공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내가 저 사다리만 오르면, 더 많은 사다리를 내려 보내 주겠다던 호언장담은 막상 사다리를 오르고 나면 사다리를 내려 보내 주기는커녕 있던 사다리마저 걷어찬다.
역사를 보면 대개 사회가 썩었을 때 종교가 더 번창하듯 모두가 도덕군자라면 굳이 종교가 필요 없다. 성공의 기회는 평등하지 않다. 성공은 시험을 쳐서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회라면 그것이 오히려 불공평하다. 성공과 평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문화심리학자, 여러 가지 문제연구소장, 전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였던 그는, 어느 날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이 책이 던지는 ‘자유’라는 조르바식 질문에 견디다 못해”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자유를 선언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의 저자 김정운이다. 그는 ‘성공은 우연이다’라고 강조한다.
“모든 사람들을 ‘성공중독’으로 몰아간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모두 성공할 것 같은 환상을 준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성공한 사람들도 모두 정형화된 모범답안을 흉내 낼 뿐이다.”
마리 레네루도 성공은 우연이라고 거들고 있다.
“성공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우연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은 확실히 다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개이다.”
성공은 ‘운칠우삼’(운이 7할이고 우연이 3할이다)이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모든 것을 희생해서 성공하지 마라. 그런 성공은 본인도 가족들도 모두 힘들게 할 뿐이다. 그건 일시적 성공이지 진정한 성공은 아니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성공인 것처럼 보이는’ 허상에 불과하다. 김정운 교수의 말처럼 앞으로는 많이 놀수록 성공한다. 노는 만큼 창의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156년간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지만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성공자들을 배출하고 있는 나라다. 하지만 1960년 이후 미국은 이혼율 2배, 청소년 자살률은 3배 늘었다. 폭력 범죄는 4배 증가했고 감옥에 간 사람은 5배 늘었다. 게다가 우울증 환자는 10배로 늘어났다. 나라 전체가 ‘성공중독’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더 심각하다. 이혼율은 세계 최고이고 출산율은 뒤에서 1등이다. OECD 국가 중 청소년 범죄와 자살률 역시 9년 동안 부동의 1위다. 올림픽과 월드컵 한 번 하고 나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다. 겁나는 것이 없다. 우리의 방식이 세계 최고라고 주장하며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경고를 해도 기존의 방식을 고수한다. 죽기 살기로 그저 일만 열심히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이다.
산업화적 근면성 vs 창의적 근면성
지금은 몸을 기계처럼 움직여 열심히 일하는 ‘산업화적 근면성’이 아니라, 마음과 머리를 움직여 놀면서 일하는 ‘창의적 근면성’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요직에 있는 리더들은 산업화 시대의 주역들이다. 배고픈 나라를 배부른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사회 전체가 여전히 수십 년 전에나 통했던 ‘산업화적 근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처럼 산업화적 근면성이 사라져야 대한민국이 산다. 우리나라는 IMF만 졸업한 것이 아니라 산업화적 근면성도 졸업했다. 예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모 기자에게 “내가 세계 정상 중 제일 열심히 한다. 제일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에게 무능, 무책임, 무철학을 붙이면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열심히’라는 단어는 요즘 그다지 각광받지 못한다. 군주나 리더는 열심히 한다는 사실만으로 면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잘 해야 한다. 과정보다는 결과로 평가 받아야 한다.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결과를 내야 하는 것이 군주요, 리더요, CEO이다. 과정상의 반칙은 결과가 좋으면 덮어진다.
평범한 직원이나 팀원인 경우,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고 기업을 영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리더라면 과정보다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 도덕교과서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지만 경제교과서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한다.
얼마 전 기획재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과 한국의 고용지표를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한국인들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44.6시간으로 34개 회원국 가운데 터키에 이은 두 번째로 많았다. 이어 멕시코, 그리스, 체코 순이었다. 일하는 시간으로는 OECD 국가 중 두 번째지만 생산성은 23위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이야기하는 ‘산업화적 근면성’ 때문이다. 근면성실의 기준을 결과보다는 과정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간으로 인사고과를 하는 관습이 여전하다. 일하는 시간이 적거나 어쩌다 지각이라도 할라치면 무능한 직원으로 낙인을 찍어버린다. 물론 조립 공정이나 일부 제조업에서는 아직도 유효한 수단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조직의 리더가 단순히 일하는 시간으로 구성원들을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이제 국가는 국민들에게 쉬면서 일하라고 해야 한다. 쉼을 통해 나올 수 있는 창의력에 집중해야 한다.
주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속에서 그동안 우리나라를 이끌었던 산업화적 근면성이 한계에 부딪히자 경제 여기저기서 부작용들이 속출하고 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곪아가고 있다. 속성 산업화의 부작용이 한꺼번에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부동산거품을 통한 장기침체 사이클은 스페인과 일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데도 경제 관료들은 우리의 경제기반은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 나라는 망했다.
2013년 새해 벽두, KBS <시사기획 창>은 '쿠오바디스 한국경제'라는 제목으로 올해 우리나라가 맞이할 경제 위기를 진단했다. 한국·스페인·일본 3국의 경제를 부동산·부채·인구구조라는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봤다. 또 앞서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경제가 수렁에 빠진 일본과 스페인의 사례를 통해 우리나라가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고령화. 부동산 버블. 저성장’ 이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다. 일본과 스페인의 15~64세 생산가능 인구의 정점은 각각 1990년, 2005년이었다. 한국은 2012년이다.
부동산버블을 보면, 일본은 1991년, 스페인은 2007년, 한국은....? 일본과 스페인을 보면 생산가능인구가 정점에 달하고 1~2년 내 곧바로 부동산버블로 이어져 장기침체를 맞았다. 이 주기가 맞다면 한국은 2013~2014년에 같은 경로를 겪게 된다.
많은 경제지표들이 위험 징후를 경고하는데도 정부의 대책은 미온적이다. 하긴 무대책이 대책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모두가 1:29:300이라는 하인리히 법칙을 되새겨 봐야 한다. 하나의 대형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와 관련한 작은 사건은 29건이 발생하고, 그 작은 사건 이 일어나기 전에는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300가지 이상의 이상 징후들이 나타난다는 미국 여행보험회사의 허버트 하인리히가 발견한 법칙이다. 사회 곳곳에서 어두운 징후들이 나타나는데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를 이루어냈다는 말로 모두 덮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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