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군주는 다른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강한 군주와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군주와 힘을 합쳐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당신은 그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군주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다른 군주의 처분에 자신이 맡겨지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군주론>21장
강력한 세력과는 자발적인 동맹을 맺지 마라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격언을 무색하게 하는 요즘이다. 분명 성공하는 사람들은 예전보다 많아졌는데도 청년들의 취업은 어렵다. 부족한 일자라도 문제지만 개천에서 용이 되겠다는 청춘이 없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대부분 개천에서 미꾸라지로 살려고 하는 것 같다. 처음부터 용은 아니다. 용은 미꾸라지와 뱀을 지나 용이 되는 것이다. 모두 용이 되려고 하지 뱀이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150년 전 프랑스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머나먼 시공간을 뛰어넘어 한국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다. 한국 관객에게 익숙지 않은 세 시간 분량의 뮤지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500만 관객에 달하는 흥행 기록을 써가고 있다.영화의 흥행으로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과 뮤지컬 음악을 바탕으로 한 OST까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이런 '신드롬'은 장안의 화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런 현상의 배경으로는 작품 자체의 힘과 함께 영화가 개봉된 2012, 2013년 초 지금의 사회상과 큰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50년 전 개인들의 불행한 삶을 이야기했던 프랑스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 맞아떨어진 결과다. 한 영화평론가는 '레미제라블'이 개인성과 사회성을 결합한 영화로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을 비추는 점이 관객들의 감성을 강하게 건드렸다고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지난 2-3년간 한국사회에 큰 변화가 있었고 개인의 삶이 이제는 시대와 맞물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사회가 됐다. 원래 '레 미제라블'이 '비참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로 번역되는데, 시대의 불행 때문에 개인이 불행한 모습을 보여준다. 150년 전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로 보이는 것이다. 이 영화가 5년 전이나 10년 전에 나왔으면 절대 이런 반응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우리나라는 스포츠는 물론 문화산업에도 열광적인 폭발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인구 5천 만 명인 나라에서 심심치 않게 천 만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가 줄을 잇고, 세계 7대 출판 대국이지만 책 안 읽기로 유명한 나라에서 10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를 계속 만들어 내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또한 1:99의 법칙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나라 역시 우리나라다. 1%가 99%를 가지고 나머지 99%가 1%를 나누어 갖는, 보수와 진보, 성공과 실패, 선과 악의 극단적인 이분법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다양한 의견이나 소수의 의견이 발을 붙이기가 힘든 구조다. 좋게 말하면 신바람근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떼잡이 근성이다. 좋게 말하면 단일민족의 힘이고 나쁘게 말하면 불통글로벌화이다. 이런 양면적인 극한 상황을 보면 자연스럽게 마키아벨리를 떠올리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당시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시대가 저물어가고 주변 열강들의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는 사분오열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를 극도의 혼란과 분열로 몰고 갔던 가장 큰 요인은 이른바 특권층들 때문이었다. 군주는 군대와 귀족들의 눈치만 봤고 백성들을 안중에도 없었다. 군주를 만든 것도 백성들이었지만 군주를 끌어내리는 것도 백성들이다. 그런데도 권력은 군과 귀족으로 불리는 특권층에게 집중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우리가 명품 고전을 읽고 배우는 이유는 역사의 반복성 때문이다. 인류 역사는 돌고 돈다. 외향은 달라도 그 근본은 달라지지 않고 반복된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다. 모든 권력과 부는 특권층에게 집중되고 권력층은 일부 거대 자본가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은 또 다른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훈구파가 득세를 했다. 그 후 사림파의 등장으로 왕은 어느 한쪽의 힘이 쏠리는 것을 막으며 왕권을 강화 한다. 선조 때 이조전랑을 두고 사림파 내에 퇴계 이황 중심의 동인 계열 김효원과 율곡 이이 중심의 서인계열 심의겸이 처음 충돌 한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를 두고 서인계열 정철의 악수는 동인의 득세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정권을 잡은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누어지고 임진왜란 대처 방법에 이견을 보이며 다시 북인이 실권을 잡는다. 북인은 다시 소북과 대북파로 나뉘고 광해군과 함께 하였던 대북파가 결국은 권력의 정점에 있게 된다. 그러나 서인들 중심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되고 다시 조정은 실권을 잡은 서인과 남아있던 남인들이 상호 경쟁하며 정사를 돌보는데 특히 효종의 사후 벌어진 남인과 서인간의 예송논쟁은 그 치열함이 극에 달했다.
이후 남인과 서인은 서로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다 숙종 때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가며 실권을 잡다 결국은 장희빈 사건으로 서인이 최종적인 권력에 핵심으로 부상한다. 그러나 홀로 남은 서인은 다시 소론과 노론으로 나뉘어져 장희빈에 아들과 최무수리 아들을 두고 경쟁하게 되고 결국은 단명하게 된 장희빈에 아들로 인해 최무수리 아들 영조를 지지하였던 노론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러나 노론은 다시 정조 시대에 사도세자의 죽음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시파와 그 시대에 어쩔 수 없었다는 벽파로 나뉘게 되고 이는 조선시대 당파에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이후에는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무너져 가는 조선후기를 더욱 힘들게 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조선시대 훈구파에 비해 조금은 진보적이었던 사림파는 스스로 분열에 의해 계속 무너졌다. 당파싸움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우리 역사는 부패와 분열을 축으로 당파싸움의 뿌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오늘날의 정치도 한 쪽은 부패로, 다른 한 쪽은 분열이라는 악수를 두어 자멸하고 있다. 당파싸움의 가장 큰 폐해는 제3의 대안이 존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적 아니면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가치만이 생존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논리는 지금도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 위력을 떨치고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이 열광적인 관객동원기록의 이면에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던 150년 전 프랑스 국민들의 고단한 삶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왜 그럴까. 역사의 교훈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00년 전 씌여진 군주론을 보면 지금 우리 정치와 권력층들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있다. 정치는 정치일 뿐이고, 도덕은 도덕일 뿐이다. 정치를 하려면 도덕을 버려야 하고 도덕을 가지려면 정치를 버려야 한다. 이 말은 정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칼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도덕이 무의미하듯 돈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도덕 역시 무의미하다. 성공하려면 도덕을 버려야 하고 도덕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조언이다. 정치와 도덕이 별개이듯, 성공과 도덕도 별개이다. 도덕은 자연인과 종교의 몫이지 정치인의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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