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DISE WAY/기업문화-기업이념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주-전락원 회장

김부현(김중순) 2014. 3. 6. 13:08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2년 성균관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청년은 서울 남산팔각정에서 전쟁의 참혹함에 치를 떨며 잿더미로 변한 시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발전이 시급하다는 생각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군을 상대로 한 운수업을 시작했다. 남다른 안목과 탁월한 사업전략으로 승승장구 종자돈을 마련한 청년은 유창한 영어실력을 발판삼아 굴뚝 없는 산업으로 불리는 카지노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고부가가치산업이기는 했지만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급했던 전쟁통에 카지노는 국가적으로도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카지노에 대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국민정서를 극복하기 위해 처음에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지만 우리나라 관광산업의 밀알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하나하나 극복해나갔다. ‘()가 뒷받침 되지 않는 행복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가치관을 통해 모든 인간은 경제적, 정신적 풍요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청년의 철학은 창업정신으로 계승 발전되어 오늘날 파라다이스그룹 구성원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청년이 바로 카지노의 대부파라다이스그룹 창업자 전락원(田樂園) 회장이다.

그는 1927516일 종로구 계동에서 부친 전주부(田周富) 목사와 모친 계성옥(桂成玉) 권사의 25녀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호는 우경(宇耕)이다. 아버지 전주부는 생전에 무려 14곳의 개척 교회를 설립한 목회자이자 기독교 운동가였다. 철저한 기독교적 가풍 속에서 성장한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청년은 풍부한 경제지식과 탁월한 영어실력을 발판삼아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가경제를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가졌다.

 

전쟁으로 인해 사회간접시설은 물론 공업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고 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울 전문경영인이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경제발전이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국가경제부흥을 위한 사업을 구상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처음 그가 택한 것은 주한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운수업이었다. 현대그룹이나 한진그룹의 창업주들 역시 전락원 회장과 마찬가지로 주한 미군을 상대로 납품사업을 벌여 오늘날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군의 각종 물자를 다른 업체들보다 더 빠르게, 안전하게 옮기고 배달하면서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운수업을 하면서도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철학을 지켜나갔다. 군부대를 돌며 버려진 쇠붙이나 빈병과 같은 폐품들을 모아 구호기금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탁월한 영어실력과 사업가적 수완으로 미군을 대상으로 한 운수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해 나갔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미군뿐만 아니라 여러 외국인들과도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아나갔다. 성공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그는 제살 깎아 먹기식 경쟁이 치열한 운수업을 뒤로하고 외국인들과의 친분을 통해 카지노사업에 관심을 가지게되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하루하루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당시 카지노사업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창조적 사업구상이었다. 산업기반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카지노사업은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흔히 카지노사업은 굴뚝 없는 산업으로 불린다. 투자규모에 비해 부가가치가 높았기에 정부에서도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주한미군을 상대로 외화획득을 통해 전후 복구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전락원 회장은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한 것이 카지노사업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잿더미 속에서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관광국가로 만들겠다는 그의 목표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카지노가 굴뚝 없는 고부가가치 산업이기는 했지만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도 필요했다. 마침내 정부 역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재원이 필요했던 터라 수출 진흥과 관광산업 육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파라다이스의 카지노사업 태동을 지원했다.

 

운수업을 하던 그는 한낱 꿈으로 그칠 뻔한 관광사업을 1962년 관광협회 서울시지부 이사가 되면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기업인으로 외국인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통해 주한 외국인의 달러를 겨냥한 카지노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65년 민간자본에 의한 최초의 대형호텔인 인천의 오림포스 호텔의 경영진으로 참여했지하여 개관했지만 지역적 한계와 호텔 문화의 미성숙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처럼 1966년 민간인이 지은 현대적 감각의 대형호텔이 개관했다는 소식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이 호텔을 직접 방문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통령의 관광산업 투자여건 개선지시에 따라 경영난에 허덕이던 호텔은 비로소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락원 회장은 내무부장관과의 면담을 통해 경제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외화획득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켜 카지노사업허가서를 신청했다. 이듬해인 1967년 호텔의 공동대표가 된 그는 필리핀인 딜러 10여명과 필요한 인력을 채용, 196781복표발행현상기타사행행위단속법에 의거 정부로부터 카지노설치허가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카지노를 개장하여 카지노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2001년 영종도에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게 됨에 따라 2005년 공항인근의 하얏트리젠시호텔로 카지노를 이전하였다.

 

당시 정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하루빨리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관광산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68년을 '관광의 해'로 정해 12만 명의 외국관광객을 유치하여 4천만 달러를 벌어들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동아일보, 1968,3.26) 정부에서도 경제개발을 위한 재원확보라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출진흥과 관광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부의 관광산업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카지노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1963년부터 주한미군의 휴양시설로 운영되어 오던 국제관광공사 소유 사단법인 워커힐의 만성 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워커힐에 카지노를 추가로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국제관광공사와 공동으로 카지노허가를 추진하여 196835일 올림포스관광호텔 워커힐 지점, 콘티넨탈 카지노클럽으로 허가를 받아 두 번째 카지노를 개장했다. 워커힐호텔 지하에 200평의 카지노시설이 들어서자 당시 서울에서 외국인들이 즐길 수있는 관광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외국인들이 즐겨찾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이와 관련 196871일자 경향신문 6면에 의하면, 소유는 국제관광공사이나 허가명의는 월커힐지배인이며, 올림포스호텔이 시설투자와 운영을 맡되 2년 후 시설은 국제관광공사에 이관한다는 용역계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위탁운영에 들어갔다. 이후 1973년 워커힐이 당시 선경그룹(SK)에 매각되었음에도 카지노운영권은 계속 콘티넨탈클럽의 후신인 파라다이스그룹이 보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아가 전락원 회장은 국가재건을 위한 자금확보라는 범국가적 요청과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관광국가로 발전시키려는 그의 포부를 하나씩 현실화시켜 나갔다. 19689월에는 재일교포가 세운 제주도 서귀포호텔에도 카지노허가를 받아 운영하였고, 1975년 제주의 KAL호텔로 카지노를 이전하였다. 1979년에는 경주의 코오롱호텔에 카지노를 개장, 타인에게 양도되어 힐튼호텔에서 영업을 계속하다 2011년 대구의 인터불고 호텔로 영업장 이전하였다. 1981년에는 부산의 해운대호텔을 인수하여(현 파라다이스비치호텔) 그곳에도 카지노를 개장했다. 1985년에는 서귀포의 하얏트호텔에 카지노를 개장하였다가 2000년 롯데호텔이 개관하자 그곳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7년 카지노 개설당시에는 '허가조건'으로 '외인에 한'하되, 외국인과 동행하는 내국인도 카지노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광호텔에서 운영하던 투전기(슬롯머신, 소위 빠찡꼬) 오락실처럼 당초 목적과 달리 내국인위주로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에 따라, 1975년 외국인 미성년자나 안내원을 제외한 내국인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도록 하는 사항을 추가한 시행령이 개정되어 이때부터 외국성인을 대상으로만 영업을 할 수 있었다. 이후 국내에서는 외국인 전용카지노만이 허용되었으며, 이런 규제는 1994년 관광진흥법 개정 시 포함된 카지노 설치허가 근거규정에도 그대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쯤되자 전락원 회장은 해외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카지노경영의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던 그는 해외의 카지노사업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특별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1970년 그의 경영능력을 알아본 말레이시아 림고통(Lim Goh Tong, 林梧桐, 1918~2007)에서 카지노운영노하우를 전수하기로 약정하고 동사의 이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파라다이스그룹이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는 전기를 마련했다.그 후로도 필리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 굴지의 관광업체들이 그를 찾아와 사업자문을 받았다. 우리나라 관광산업의 해외진출과 국위선양에 일조한 그는 해외에서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사파리파크호텔과 카지노를 운영하여 실업난 해소는 물론 관광전문 인력을 양성하여 케냐 정부와 파라다이스그룹, 그리고 한국과의 우호관계를 여는 단초가 되었다. 당시 아시아권 기업으로는 드문 사례로 국내는 물론 세계 관광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이끌어내는데 큰 힘이 되었다. 1981년 바덴바덴에 모인 IOC위원들에게 서울올림픽 개최에 찬성표를 던져줄 것을 적극적으로 유도한 사람 중에 기업인으로는 드물게 전락원 회장이 있었다. 파라다이스그룹은 케냐 정부로부터 자국내에서의 역할을 높이 평가받아 1989년 현 장충동 사옥에 케냐 명예총영사관을 설치하고 영사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 후 전락원 회장은 케냐 대통령으로부터 명예총영사로 임명되어 한국과 케냐의 선린관계를 돈돈하게 했다. 그는 1990년 방한한 아랍모이 케냐 대통령의 청와대 예방을 주도하하여 민간외교관으로서도 두각을 보였다.

 

나아가 1975년부터 마이애미에서 카리브해를 운항하는 유람선상의 카지노운영에도 참여, 모나크 선호, 모나크 스타호, 칼립소호, 돌핀호 등을 임대하여 미국의 공해상(3마일 밖)에서 카지노를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1982년 선상카지노사업에서 철수하였다.

 

2006년 관광공사 자회사인 그랜드코리아레저가 강남의 오크우드호텔, 서울역 앞의 힐튼호텔, 부산 롯데호텔에서 외국인카지노를 개장하기 전인 2005년 말 현재로 전체 13개 외국인카지노 중 워커힐카지노, 인천하얏트호텔카지노, 부산파라다이스호텔카지노, 제주 KAL호텔카지노, 서귀포 롯데호텔카지노 등 5개를 운영하였는데, 전체 입장객 574천 명 중 507,600여명(전체 입장객의 88%), 총매출액 4,347억 원 중 3,875억 원을 차지(전체매출액의 89%)하여 한국카지노 산업을 선도하여왔다. 2012년 말 현재 국내에는 관광공사 자회사 카지노 영업장 3개소를 포함, 모두 16개의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영업중인데, 파라다이스그룹에서 운영하는 5개 카지노의 입장객은 66만 명으로 전체입장객 238만 명의 28%, 매출액은 6,066억 원으로 전체매출액 12,531억 원의 48%를 차지, 비중은 줄었으나 입장객과 매출액은 계속 신장되어 명실상부한 한국 카지노 업계의 선두주자로서, 한국의 관광산업진흥에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 2012년에는 일본의 게임기 메이커인 세가사와 합작법인을 설립, 영종도에 카지노가 포함된 복합리조트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후 사업영역을 면세점, 건설, 소방용스프링클러 제조, 미디어 분야로 확대하며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부산, 파라다이스건설, 파라다이스미디어아트 등 11개 영리법인과 학교법인 계원학원 등 5개 비영리법인을 거느린 파라다이스 그룹을 일궈냈다.

 

워커힐 카지노 사업을 맡고 있는 파라다이스는 지난 200211월 코스닥에 등록했다. 최근(2014.03.05.) 파라다이스(액면가 500) 주가가 코스닥 등록 후 처음으로 마의 3만원을 넘어서며 코스닥시장 시가총액 2위 자리를 탈환했다. 사상 최고가였으며, 종가기준으로 3만원을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시가총액은 27737억 원으로 늘어나 서울반도체(27403억원)를 따돌리고 시가총액 2위에 올라섰다.

 

파라다이스 호텔체인은 파라다이스호텔 제주, 케냐의 파라다이스 사파라파크호텔, 파라다이스호텔 부산, 파라다이스호텔 도고, 파라다이스호텔 인천 등 국내 토종 호텔 브랜드로 유명하게 되었다. 이후 계열사별로 전문 CEO체제를 구축, 그룹 경영에서 한발 물러섰으며 2004년 계원학원 이사장을 마지막으로 그룹경영에서 물러난 후 같은 해 11378세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