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경영/꿈과 비전

꿈이란, 꿈 이상의 것이다!

김부현(김중순) 2009. 2. 24. 20:15

당신의 일상이 힘들고 지쳐 있는가?

 

만약 대답이 'YES'라면, 빅터 프랭클 박사가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어보라. 이 책은 빅터 프랭클 박사의 자전적인 체험수기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강제수용소의 체험을 바탕으로 프랭클 박사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를 완성하였다.  

-사진출처 : 강제수용소 <라벤스부뤼크> 홈페이지에서,

 

"베를린 북쪽 경계선에 오라니엔부르크란 지역이 있고, 바로 그 지역에는 작센하우젠이라는 곳에는 나치시절 강제수용소가 있었다. 그리고 이 작센하우젠에 수용되었던 자들이 1938년 11월부터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9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 여성들만을 수용할 수 있는 강제수용소를 지었으니, 그 지역의 이름은 '라벤스부뤼크'. 1939년 1,000여명의 여성들이 수용되기 시작하여, 1941년에는 남성 강제수용소와 1942년 청소년 강제수용소까지 만들어지면서, 이곳은 가히 나치정권의 인종청소 장소로 악명이 높았던 곳.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지멘스 & 할스케와 같은 회사에 의해서, 전쟁 물자를 생산해 내는 강제노동까지 이루어졌던 곳. 통계에 의하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13만 2,000명의 여성과 어린이들, 2만 명의 남성 수용자 그리고 1,000명의 청소년 수용자들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40여 개국에서 잡혀온 유대인들과 '신티와 로마'라는 집시들이 이곳에 강제 수용되어, 굶주림과 질병 혹은 의학실험을 통해서 사망하거나 살해당했던 곳이다."

 

 

책에 빠져 보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 뿐'인 곳, 그 곳이 바로 강제수용소이다. 여기서는 평범한 삶을 통해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꿈과 목표들이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극한 공포와 싸우면서도 어떤 절망에도 희망이,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꿈과 사명이 있다. 자유가 철저히 망가진 강제수용소에서도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니체의 말이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비극적인 과거로부터도 미래에 대한 낙관이 보인다!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자살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개인의 정신 심리 상태 등이 이제는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점점 더 삶에 대한 의미가 희박해져가고 있는 요즘, 앞일을 가늠할 수 없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조차도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성의 승리를 일구어낸 한 보통 사람. 나치 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은 이제는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 되었다.

 

익명으로 출간하려던 본인의 의지를 뒤로 한 채 이름을 밝히고 낸 책이 이렇게까지 전 세계에서 읽히는 베스트셀러가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에게 이렇게 오래토록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는 이시형 박사의 말은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비극적인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샘솟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는 이 말은 죽음의 순간을 넘나드는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넘어서서 지금 살아가고 우리들 누구에게나 삶의 이정표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것 말고도 이와 비슷하게 놀라운 일을 많이 경험했다. 나 같은 의학도가 수용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었다.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한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정말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것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이것 혹은 저것이 있으면 살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도착한 첫 날 밤에 우리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침상에서 잠을 잤다. 각 층(길이 6.5피트에 폭이 8피트인 곳이다)에 무려 9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닥 위에서 함께 잤다. 9명에게 배당된 담요는 단 두 장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옆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고,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비비면서 잠을 자야 했다. 날이 혹독하게 추웠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는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신발을 잠자리에 갖고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흙이 떡고물처럼 묻은 신발을 몰래 갖고 들어와 그것을 베개 삼아 잠을 자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팔을 베개 삼아 잠을 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잠이 밀려 왔다. 그리고 그 잠은 비록 몇 시간 동안이지만 우리에게 고통을 잊고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뎠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를 몇 가지 더 들어 보자. 수용소에서 우리는 이를 닦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 심각한 비타민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잇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했다. 셔츠 한 벌을 가지고 반 년 동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입었다. 수도관이 얼어 붙어 세수는 고사하고 손 하나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흙일을 하다가 어쩌다 찰과상을 입어도, 동상에 걸린 경우만 제외하면 결코 상처가 곪는 법이 없었다.

 

밖에서 생활할 때 잠을 제대로 못 잤던 사람이 있었다. 옆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잠이 깰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용소에서는 그런 사람이 동료의 몸 위에 엎어져서 귀에서 불과 몇 인치 떨어진 곳에서 나는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주 깊이 잠을 잤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의학적 관찰은 아직 이런 것을 말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전되지 못했다. 우리 중에서 이런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심리적 반응의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아주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극한의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행동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착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지막 진리는 존재한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수용소에서는 끊임없이 당신을 시험하고 있다. 따라서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상황을 도덕적 가치를 잡을 기회로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은 각자의 몫이다.

 

따라서 수감자들의 내면적 자아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심리적, 육체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조망 밖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 역시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곧 자신뿐이다. 자신의 태도 뿐이다. 자신의 미래, 자신의 진정한 꿈을 찾지 못한다면 계속 지나온 과거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할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라는 공간 또한 물리적 철조망이 아닌 인위적 철조망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스스로가 만든 자신만의 철조망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프랭클 박사가 말하는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을 간단하게 말한다면 '삶의 의미 찾기'라 할 수 있다. 로고테라피를 환자치료에 적용할 때 다른 치료법과의 차이점은 치료자에 의해 환자를 치료하는 게 아닌 환자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한다는데 있다. 즉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삶의 의미 찾기'에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환자의 두려움이 현실이 되는 '예기불안' 또는 지나친 집중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는 '과잉투사'등을 의도를 반대로 사용함으로써 환자를 치료하는 '역설의도'등이 그 예인데 여기서도 중요시 하는 것이 환자 자신의 의지라 하겠다. 로고테라피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이 있는데, '창조 또는 일', '경험 또는 만남', '시련과 태도'로 이러한 것들은 삶의 목적을 찾는 일, 즉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인 동력이라고 보고 있다.

 

프랑스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결과는 89%의 사람들이 인간에게는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그 중 61%는 자신의 삶속에서 기꺼이 그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어떤 것'과 '어떤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는 사회과학자들이 48개 대학 7,948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2년 동안 통계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설문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6%의 학생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한 반면, 78%의 학생들은 첫 번째 목표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수용소에서는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죽음을 부른다고 했다. 통계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 기간의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려오지 않자 용기를 잃고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는 죽었다. 꿈과 희망이 사라진 사람에게는 어떤 행동이 일어날지 정말 모를 일이다.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 꿈과 희망이 없다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역시 꿈이 없다면 육체는 살아 있을지 모르지만 정신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간절히 원하는, 꼭 하고 싶은 그 꿈을 찾아야 한다.

꿈이 있다면 프랭클 박사가 강조하는 삶의 의미 역시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침체로 많은 사람들이 한숨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힘들기로서니 수용소의 수감자들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삶이 정말 힘든가?

정말 삶이 힘든가?

그렇다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어보기를...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힘들 때 일수록 프랭클 박사가 말하는 '삶의 의미', 즉 '꿈'을 찾아야 한다.

 

계절은 겨울과 봄의 중간에서 서성이고 있는 푸근한 밤이다.

이 밤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되새겨 봄은 어떨까?

 

우리는,

지금 처해진 상황을 감히 힘들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