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경영/꿈과 비전

당신만의 도피처를 만들어라

김부현(김중순) 2009. 5. 18. 14:44

어느 책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우리가 월, 화, 수, 목, 금요일을 미치지 않고 보낼 수 있는 이유는, 미칠 수 있는 토, 일요일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어떤 일에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미친다는 것은 온 몸을 던질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있는 대로 마음을 풀어 헤치고 무한대로 미칠 수 있는 날, 나설 수 있는 도피처가 있는가?

일상이 자꾸 비틀거리고, 꼬이고, 넘어질 때 달려가 위로받을 곳 말이다.

 

도피처는 힘들어서 피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그 일에 더 당당하게 맞서기 위한 일시적인 휴식처이자,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마음의 장소를 말한다.

 

당신만이 힘을 받을 수 있는 장소.

당신만이 쉴 수 있는 장소.

목 놓아 울 수 있는 장소,

크게 소리치고 웃을 수 있는 장소.

세상을 향해 십 원 짜리를 내뱉을 수 있는 장소.

 

그 곳은 반드시 거창할 필요도 없고 신성한 장소일 필요도 없다.

시내 커피숖,

산속의 찻집,

산, 바다, 강,

그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좋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경우에는 그 도피처가 바로 산이다.

산에 들면 들뜬 마음이 차분해지고 엉킨 마음이 순서대로 잘 정리되기 때문이다.

무한대로 리필이 가능한 그 산에서 나는 지난 일들을, 기억들을, 추억들을 되새겨보고, 반성해 보고 또 내일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평범한 일상에서는 좀처럼 자신의 크기를 정확히 잴 수 없다.

때문에 자신의 본래 모습과 정확한 크기를 확인할 수 있는 도피처가 필요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분명 열정도 넘쳤고 분명한 목적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남과 함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삼천포로 향하고 있거나 아예 애초의 목적이 희미하게 된 경험은 없었는가?

 

또 지나치게 겉모습에 신경 쓴다거나 주위를 너무 경계한다거나, 쓸데없는 고집만 피운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는가?

이런 자세로는 누구나 꿈과 목표를 정확하게 볼 수도 없고, 또 분명하게 보일리도 없다. 지금껏 해 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뿐이다.

 

그 도피처에서 나는 가끔 빈 종이를 꺼내 그동안 했던 일들을 쭉 나열해 본다.

생각하기에 따라 사소하고 작은 일도 있었고, 의욕을 가졌으나 실패한 일, 그 당시에는 실패인 것 같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일도 있었다.

그 일에 따라 연결된 일, 일의 가치, 사람에 대한 실망이나 희망 같은 것들을 첨부한다.

설령 내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더라도 지나온 경험은 결코 무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들을 정리해 보지 않고 새롭게 어떤 일을 시작하기는 어렵다.

 

그렇다하더라도 지난 일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난 일은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만이니까.

또한 우리에겐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멀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즐겁게 일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꿈을, 성공을 이루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전환점은 가만 있어도 찾아오는 나그네가 아니다.

훗날 극적인 인생 반전 드라마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따라서 적어도 주말 하루쯤은 일에서 자유로워 보라.

 

멋진 휴식도 일이다.

사실 휴식이 일보다 더 어렵다.

그냥 가만히 쉬는 것은 휴식이라 할 수 없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은 굳이 일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일이 된다.

머리와 가슴이 먼저 느낀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꼭 무슨 목적을 가지지 않아도 몸이 먼저 느끼기 때문이다.

 

휴지통이 가득차면 비워야 한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꽉 짜여진 스케줄에서 하루쯤 비껴나 보는 것이 필요하다.

잠깐 동안의 비껴남, 그곳이 당신만을 위한 도피처다.

피처는 삶의 전환점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해결책이 좀처럼 보이지 않을 때는 그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보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그는 1833년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그는 1866년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발명했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하고 폭약으로 돈을 많이 번 그는, 어느 날 아침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본 신문에는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하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를 읽어보니 여러 가지 부제들이 달려 있었다.

"다이너마이트 왕이 죽다."

"죽음의 사업가가 죽다."

"파괴의 발명가가 죽다."

가사를 본 그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보다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세상 사람들이 '죽음의 사업가'니 '파괴의 발명가'라고 부른 것 때문이었다.

물론 그 기사는 그와 동명이인의 죽음을 잘못 보도한 것이었다.

 

그는 노벨이다.

노벨은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즉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인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을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데 기여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극적으로 결정한 것이 자기의 거대한 재산을 바쳐 인류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노벨상을 제정한 것이었다.

지금도 노벨상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벨상은 이렇게 탄생했다.

 

실패할 뻔했던 인생이 성공한 인생으로 바뀐 것은 잘못 보도된 신문기사 때문이었다.

노벨에게 있어 터닝포인트는 잘못 나간 신문기사였다.

만약 그 기사를 보고 화를 내거나 분노했다면 결코 전환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스치는 모든 일에는 어떤 전환점이라는 것이 반드시 있다.

 

삶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전환점은 그냥 찾아오지는 않는다.

찾아나서야 한다.

떠나라.

당신의 휴식처이자 도피처로.

그 곳엔 또 다른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노벨의 말이다.

"가난하지만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꿈은 가난, 바쁨 그 너머에 있다.

가난하다고 꿈조차 꿀 수 없다면 그건 불행한 일이다.

바쁘다고 꿈조차 꿀 수 없다면  그건 핑계일 뿐이다.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의 꿈을 꾸라"는 말을 되새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