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으로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여행은 어디로 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지만 사실은 어디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해도 된다.
여행은 나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무수한 삶을 찾아 헤매는 절실함으로 내 안으로 들어가면서 사색하는 행위일 터이다.
여행의 목적지가 다르다고 해도 되돌아오는 곳은 같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 안치운의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중에서,
1. 인터넷, 전화예약 필수
인터넷예약 |
http://bukhan.knps.or.kr → 공원탐방 → 국립공원예약 → 우이령탐방(산행시 신분증 지참) |
전화예약 |
(65세이상, 장애인, 외국인만 가능) 교현탐방지원센터 : 031-855-559 / 우이탐방지원센 : 02-998-8365 (산행시 신분증 지참) |
2. 찾아가는 방법
서울 우이동 우이령길 입구 |
지하철 수유역 3번 출구 - 버스 120,153번 우이동 차고지 종점 하차(도보3분) |
경기도 양주 교현 우이령길 입구 |
지하철 구파발역 1번 출구 - 버스 704,34번 / 석굴암입구 (우이령입구) 하차(도보5분) |
3. 우이령길 현황
거리 : 6.8km |
소요시간 : 3시간 30분 |
산행난이도 : 중 |
우이령길은 북한산 둘레길의 마지막 21구간이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를 연결하는 지름길이다.
북쪽 도봉산과 남쪽 북한산의 경계다.
이제는 역사책 속으로 사라졌지만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했다가 총격전 끝에 김신조만 생포되고 전원 사살된 사건으로 인해 민간인 출입이 전면 금지되어 왔으나, 40년 후인 2009년 7월 탐방예약제로 일반에게 개방된 길이다.
천혜의 자연 생태계를 자랑하며 인간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아 계곡과 숲이 원시의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맨발 체험도 가능하고 남녀노소 모두 걸을 수 있는 사랑스런 길이다. 우이령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연결하는 고개로 소의 귀처럼 길게 늘어졌다 해서 '소귀고개'로도 불리며 '우이령(牛耳嶺)'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고 한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 탐방객 수는 하루 1,000명으로 제한된다.
교현리에서 500명, 우이령에서 500명이 한계인원수다.
인터넷 예약의 경우 하루 800명만 가능하므로 원하는 날짜에 탐방하려면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특히 주말의 경우에는 2주 전에는 예약을 해야 탐방이 가능하다.
하지만 개방 초기에는 탐방객이 넘쳐났지만 최근에는 주말이나 휴일 외에는 탐방객 수가 미치지 못하는 날이 많다. 평일이라면 미처 예약하지 못했다하더라도 현장에서 신분증 확인 후 산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리 예약을 하고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양주 교현리에서 우이령차고지 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 내려 1번 출구로 나왔다. 하늘은 봄볕을 닮아가고 있었고 햇살은 눈부셨다. 배낭을 고쳐 메고 헐렁한 신발끈을 다잡고 704번 버스에 올랐다. 단정한 복장으로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말을 건네는 버스 기사님 덕분에 하루가 즐겁게 시작된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양주 '석굴암 입구' 정류소까지는 약 20분 소요되며, 탐방안내소까지는 도보로10분이 걸린다. 안내소에 신분증을 보여주고 탐방허가를 받았다. 평일이어서인지 탐방안내소도 탐방로도 한산한 편이었다.
"나에게는 두 명의 의사가 있다. 오른발과 왼발이다."라는 영국 역사학자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자전거 페달 대신 두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보려고 한다. 오봉산 자락에 비춘 햇살은 따사했지만 겨울과 봄의 자리다툼은 치열했다. 봄이 되면 신발이 자꾸 흙을 물어 올린다.
흙들이 숨을 쉬기 위해 아지랑이와 함께 부풀어 오른 탓이다.
흙도 겨울잠을 잔 것이다.
긴 잠에서 깬 흙들도 숨을 쉬기 위해 땅을 부풀게 한다.
그래서 봄 산행은 질척거린다.
허벅지와 발목에 힘이 더 들어간다.
시작부터 여기 저기 군인들의 흔적이 나타난다.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슨(Wallace Stevens)은 "나는 다름 아닌, 내가 걸어온 세계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걷기에 종지부를 찍는 통쾌한 지적이다. 걷기는 산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가장 힘든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다."라는 말 진부하지만 여전히 진실이다.
고교 동창 셋이 벼르고 별러 나선 우이령길이란다.
멋진 추억을 만들었으면 한다.
깔끔한 숲에 들면 몸도 마음도 덩달아 산뜻해진다.
내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를 오르는 것이다.
내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산에 오면 산을 생각해야 하는데 속세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속세의 좋았던 기억보다는 아팠던 기억만 떠오른다. 곰곰 생각해 봐도 아픔을 해결하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상처는 흐려지고 마음은 아물고 아픈 기억은 지워진다.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참을 수 없었던 일도 참아내게 되고 미운 사람도 기억에서 사라진다.
법정스님은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고 했는데...
나는, 당신은 어떤 향기를 뿜고 있는 것일까?
3년 전 우이령 길이 개방되었을 때 탐방신청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인원초과로 몇 번 밀리자 체념하듯 내 기억에서 우이령 길은 비켜나 있었다.
북한산 둘레길 전 구간 걷기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몇 구간을 남겨두고 우이령 길이 다가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음 한켠에서 머리로 신호를 보낸 것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다리를 움직여 오늘 지금 이 시각 맘씨 좋은 이 길 위에 섰다.
40년 만에 인간의 발자국을 받아들인 우이령은 그대로 어머니 길이었다.
부푼 흙을 벗 삼아 계곡을 돌고 산허리를 돌면 어릴 적 읍내 오일장에 다녀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을 뒤 고갯마루에서 어둠이 내릴 때까지 산을 놀이터삼아 자치기를 하고 병뚜껑으로 땅따먹기를 하며 흰 고무신을 사 오실 어머니를 기다렸던 추억이 아련하다.
검정고무신보다 한 단계 위가 하얀 고무신이다.
하얀 고무신은 신고 다니기가 아까워 두 손에 한 짝씩 들고 맨발로 뛰어다녔었다.
저 계곡을 넘고 산모퉁이를 돌면 오래전 추억 속의 어머니와 만날 것만 같았다.
산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욕을 덜 먹는다.
산은 인공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이다.
산은 본디 자연이고 자연은 곧 산이다.
산은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추하지 않다.
쓸쓸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속박도 없고 자유도 없다.
높고 낮음도 없다.
높낮이는 인간이 부여한 이름표에 불과하다.
설악산과 북한산은 높낮이로 자신을 뽐내지 않는다.
자연은 높고 낮음이 없다.
그 어떤 산도 다른 산에 비해 우위에 있거나 열위에 있지 않다.
자연에게 비교는 무의미하다.
해발 660미터에 불과한 '오봉'은 한 마을의 다섯 총각들이 원님의 어여쁜 외동딸에게 장가들기 위해 상장능선(오봉과 마주한 뒷면의 능선)의 바위를 오봉에 던져 올리기 시합을 하여 현재의 기묘한 모습의 봉우리가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꽃이나 프로포즈 대신 오봉던지기로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사랑에는 힘보다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 다음에 소망, 소망 다음에 사랑, '믿음-소망-사랑' 이 순서에는 이유가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믿음이 없으면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소망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랑에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이유는 믿음과 소망이라는 기초가 흔들리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틀리지 않다.
누구나 한 때 세상이 날 버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가진 적도 없었다. 세상은 누굴 가지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산도 마찬가지다. 산은 욕심을 버릴수록 더 많은 것을 내준다. 침묵하는 사람에게 더 깊은 속내를 드러내준다. 돌아드는 계곡과 산자락마다 발자국이 생겨 자연의 본심을 보듬어주고 앞서간 사람에겐 애처로운 노랫가락으로 남는 길... 그래서 길은 곧 마음이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아픔과 아픔을 연결하여 치유해 주는 마음의 길이다.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우이령에 기대어 살아가는 바위들도 성큼 성큼 다가온다.
-질문 : 석굴암이 있는 곳은?
-대답 : ⓵ 경주 토함산 ⓶ 북한산국립공원 오봉산
⓵이라고 대답한다면, 공부하기 싫어하는 초등학생에게도 시시한 질문이다. 그런데 석굴암이 경주에만 있는 게 아니다. ⓶번이라고 대답한 당신은 산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둘 다 정답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1번지 오봉산 자락에도 석굴암이 있다. 오봉산은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산 서쪽 자락이다. 서울과 경기도에 걸친 북한산국립공원은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특히 산세가 빼어난 곳으로 손꼽히는 도봉산 서쪽에 위치한 오봉산 석굴암은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이 모여서 떠받든 것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몇 차례 허리를 펴고 호흡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면 멀리 보이던 오봉이 시나브로 가까워진다. 가파른 능선을 몇 굽이돌면 웅장한 오봉이 갑자기 눈앞으로 왈칵 다가온다. '와~' 내지는 '우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대웅전과 나한전, 삼성각 등이 오봉 아래 머리를 맞대고 있다면 석굴암에 당도한 것이다.
기록이 남겨져 있는 건 아니나 석굴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고, 고려 공민왕 무렵 왕사였던 나옹화상이 3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 정진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 무학 대사의 제자인 설암스님이 석굴에 지장과 나한 두 존상을 조성했으며, 1455년에는 단종왕후가 왕세자를 위해 원찰로 중수하기도 했다. 여러 고승이 주석하며 맥을 이어갔으나 1950년 6.25 때 소실돼 한동안 잊혀진 사찰이 됐다. 1954년엔 초안스님이 다시 불사를 일으켜 지금은 나한기도의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굴곡진 우리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석굴암이란 이름을 있게 한 거대한 석굴에는 나한전이란 편액이 붙어 있다. 천연적으로 이뤄진 바위굴 안에는 여러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더운 여름에 이 석굴 안에 들어서면 시원한 기운이 땀을 식혀준다고 한다.
석굴암의 풍경소리가 바람에 어울어진다. 바람에 포개진 풍경소리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대의 음이다. 인간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궤도를 이탈한 소리다. 단청 끝에 매달린 풍경은 석굴암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절 마당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멀리 북한산 장군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운치 있게 구부러진 소나무와 주변의 꽃들, 수려한 산세를 둘러보노라면 문득 이 곳이 선계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자연은 숨김없이 모든 것을 내놓는다.
바람과 나무와 돌과 하늘을 온전하게 내어준다. 숨김이 있는 곳은 속세다. 정신을 혼돈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내뱉은 말과 글이 윤회하여 다시 되돌아온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처럼 자신이 가진 알맹이를 모두 내주고 난 뒤 기꺼이 빈 몸둥아리로 남을 때 가능하다. 텅 빈 마음으로 다 내주며 살아온 사람 그 몇이나 될까?
법정스님은 "무소유란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든 중생들이다.
석굴암 소나무숲엔 바위가 하늘을 이고 있다.
가시덤불 속에서 참새떼의 울음소리가 방정맞다. 새들이 이 높은 곳까지 찾아든 이유를 알 수 없다. 중간기착지 없이 광활한 김포평야를 지나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예까지 왔을게다. 네비게이션도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새들이 어찌 방향감을 유지하며 목표물에 도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네비게이션을 가지고 있을 게다. 새들의 나라에도 무선기지국이나 등대나 관제탑이 있을 것이다. 나의 인생 네비게이션은 잘 작동하고 있는지, 인생지도는 제소임을 다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점검해야 한다.
참새는 철새가 아니라 텃새다. 농작물의 수확기에는 제법 먼 거리까지 날아가 먹이를 찾는다. 김포평야를 거쳐 김해평야와 나주평야까지 먹이를 찾아 다녀온 것이 분명하다. 농작물의 낟알·풀씨·나무열매 등 식물성을 주로 먹고 여름철에는 딱정벌레·나비·메뚜기 등의 곤충류를 많이 먹는다. 참새는 곡식의 낟알을 먹긴 하지만 농작물을 해치는 벌레를 잡아먹기도 하기 때문에 농업에 중요하다고 한다.
햇
'출입금지'라는 금지의 말 대신 '그대 발길 돌리는 곳'이라는 표현...
참 속깊은 표현이다.
관람객을 배려하는 고민의 흔적이 묻어 있는 것 같아 정겹고 고맙다.
실타래 같은 하루하루를 얼리고 달래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아픔과 힘겨움이 함께 했을까. 어리석은 사람도 지리산을 찾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했다. 지리산뿐만 아니라 모든 산은 다 지혜롭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우리, 생애 어느 하루만이라도 지혜롭게 살았노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산을 벗하여 사는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
욕심이 없어 산에 드는 것이 아니라 산에 들었기 때문에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백두산이 아버지의 산이라면 북한산은 어머니의 산이었다.
숲을 보려면 숲을 나와야 하고 산을 보려면 산을 나와야 한다. 하지만 마음으로 보려면 가까이 다가설 때 가능하다.
산은 묻는다.
우이령 길은 묻는다.
무엇이 너의 발길을 예까지 오게 했느냐고 조용히 묻는다.
어제의 어제를 걸어 찾아온 우이령 길, 길 위엔 길은 없고 길 같은 길만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발이 약속이나 한 듯 서둘러 산을 넘는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 한 귀퉁이를 내 줄 수 있는 나이, 소소한 만족에 숱한 시간들이 함께 했다. 편안한 우이령 길, 무거운 마음 하나 내려 노을 자리 없을까.
마음병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다독여주는 치유의 길, 즐거웠던 기억들을 떠올려 주는 행복의 길이 곧 우이령길이다. 그 아픈 역사만큼 넉넉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을 받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혼자 있으면 외톨이라 생각하고 세상으로부터 밀려났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전화기를 만지고 메신저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날린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한다.
일 년에 며칠쯤은 기꺼이 혼자가 되어 보자.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 산을 오르고, 밤하늘 아래 가만히 서보자. 허름한 여관에서 몸을 눕혀보고 자연의 숨소리를 들어보자. 꼭 한 번 시도하고 도전해 보자. 생각보다 건질게 많다.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뭇별들을 보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그래야 산 정상에 항구에 목표물에 다가갈 수 있다. 지도는 목표와 목표 사이의 신호를 일치시키고 소통시키고 이동시킨다.
우이령 고개다. '소귀고개'라고도 한다.
산 정상이 아니고 고갯마루이기에 별도의 표지석은 없었고
이정표만이 이곳이 우이령고개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부턴 하산길이다.
하산길은 내리막이 보통이다. 우이령 길은 학교였고 북한산은 도량이었다.
길이라는 공부를 마치고 집에 들면 상처는 줄고 용기가 샘솟는다. 4년간 준비만 하다 5년째부터 갑자기 크기 시작하는 모죽(毛竹)처럼 길에서 돌아온 나는 어느 순간 마음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한 번의 떠남은 한 번의 경험이다.
한 번의 떠남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고 온 기분이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은 거창한 성공 목표가 아니었다. 스치는 바람과 발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 나무와 햇살이었다.
여행은 걷기와 등산이 합쳐진 말이다.
산을 오르기 전에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럴땐 문을 박차고 신발끈을 메는 것이 상책이다.
오십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잘하는 것도 없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렀다. 남들보다 더 많은 약속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고 한 시간만이라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으면 손가락이 허둥댔다. 바빠야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바빠야 잘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늘 하고 싶은 일은 있었지만 해야 하는 일에 밀렸다.
산을 오르면 수많은 삶과 스토리가 보인다.
산에 들면 부자도 빈자도 모두 하나가된다.
성공도 실패도 없다.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고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청정지역 코타키나발루의 밀림에서의 느낌과 설악산 대청봉의 표지석을 부여잡고 야호를 외쳤던 씩씩함도 어머니 마음 같은 북한산우이령 길과 다르지 않았다. 산은 그대로 산일 뿐 비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배낭을 멘 길 위의 사람들은 카르페 디엠을 즐기기에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미래도 현재가 된다. 미래에 행복하기 위해 카르페 디엠을 포기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즐기면 즐거운 미래가 온다고 믿는다.
등산의 매력은 부딪혀 본다는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일지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당일치기 설악산 종주를 계획하면 십중팔구 '그건 무리다'라는 결론이 날 것이다. 설악산 공룡능선을 타려면 우선 배낭을 메고 설악산으로 가는 것이다. 가면서 도착해서 고민하고 주판을 튕겨봐도 된다. 우리는 원래 어떤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완벽한 준비란 없다. 일단 배낭을 매고 신발 끈을 조여보자.
산을 오르는 것은 날 것 그대로의 인문학에 다가가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는 내내 구멍난 마음을 메우고 자연과의 진지한 대화로 삶의 활력을 찾게 해 주기 때문이다. 지금 대학도 기업도 개인도 인문학을 외친다. 기법과 전략위주의 방법론적 스펙쌓기가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결과와 효율성을 중시했던 사회시스템 하에서 그에 반하는 인문학을 논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한가한 사람의 전유물처럼 취급받아 왔던 게 사실이다.
우이동 차고지에 다다르자 특이한 전통카페 하나가 눈에 띈다.
여행을 할수록 세상을 보는 눈은 커진다.
그리고 그 단계가 지나면 자신만의 세계관이 생긴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절대적인 시간의 축 위에 내 시간의 축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여행을 하기 전에는 잘 모른다.
어딘가로 굳이 떠나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공부할 것이 많고, 알아야 할 것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뭔가가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채지형, <인생을 바꾸는 여행의 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