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태양보다 밝은 노동의 등불
영일만(188~196쪽)
빛은 결국 우리들 인간의 내면에 있었던 것이다.
영일만은 빛의 바다다. 햇빛은 발고 달빛은 깊고 바람은 맑다. 모든 새벽들은 개벽처럼 이 바다에 찾아온다. 서기 158년에 신라 임금은 이 바닷가 마을에서 인간 세상에 빛을 맞아들이는 제사를 지냈다. 그때 사라졌던 빛은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다. 임금은 그 제사터 마을을 일월이라고 이름지어주었다. 이 마을은 지금도 일월동인데, 포항에서 구룡포로 가는 31번 국도변이다. 신라 임금은 또 인간 세상이 빛을 맞아들이는 이 들머리 바다를 영일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래서 새 천년의 이 바다는 영일만이다.
요는 중국 전설시대의 황제다. 어질고도 강력한 임금이었는데, 그의 덕은 세계의 구체성을 파악하는 능력에 있었다. 그는 짐승들이 교미하는 시기와 봄에 새털이 돋아나는 시기를 알아서 살폈고, 백성들이 바쁠 때와 한가할 때, 넉넉할 때와 모자랄 때를 미리 알았다. 가장 알기 쉬운 앎이 가장 소중한 앎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는데, 이 앎은 쉬운 앎이 아니다.
황제는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를 경건하게 맞았고, 저녁마다 저무는 해를 공손하게 배웅했다. 황제의 나라는 일출의 바다처럼 순결했고 날마다 새로웠다. 강건하되 포악하지 않았으며, 검박하되 비루하지 않았다. 중국 전설에 해가 처음 뜨는 땅을 양곡이라 하였다. 황제는 이 양곡 마을에 일관을 상주시켜 떠오르는 태양을 절하며 맞이하게 하였다. 고대 중국의 양곡은 곧 신라의 일월 마을이며, 새천년의 영일만이다.
포항에서 출발하는 자전거는 영일만 해안선을 따라서 동북쪽으로 간다. 장기곶 등대를 돌아서 해안도로를 따라 구룡포까지 내려간다. 구룡포부터는 바닷길을 버리고 산길로 들어간다. 금오산 꼭대기에서는 영일만과 포항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자전거는 산길로 금오산을 넘어서 다시 영일만 바닷가로 내려올 예정이다.
빛과 바람에 몸을 절여가며 영일만 바닷가를 달릴 적에, 몸 속에서 햇덩이 같은 기쁨이 솟구쳐 올라, "아아아" 소리치며 달렸다. 삶을 쇄신하는 일은 결국 가능할 것이었다. 길이 아까워서 천천히 가야 하는데, 길이 너무 좋아서 빨리 가게 된다. 뒤로 흘러가는 바다와 앞으로 흘러오는 바다의 길을 "아아아"소리치며 달렸는데, 새로운 시간의 바다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기어를 높이 끌어올리고 한 번 저어서 수십 바퀴를 굴렸다. 길을 버리고 새처럼 날아가는 판인데, 고단 기어의 묵직한 저항이 두 다리에 걸리는 걸 보면 역시 몸은 길에 붙어 있다.
지금 영일만의 오징어 떼들은 어촌 마을 앞바다까지 바짝 몰려와서 바닷물이 끓듯이 우글거린다. 오징어 산지 도매가격이 날마다 들쭉날쭉해서 한 마리에 160원 하는 날도 있고 200원 하는 날도 있지만, 오징어 떼들이 이처럼 가까이 와준 것은 신나는 일이다. 작은 포구 마을은 밤이고 낮이고 잠들지 않는다. 오징어 떼가 마을 앞바다에 머무르는 동안 한 마리라도 더 건져 올려야 한다. IMF 이후 거덜 난 도회지에서 상처받은 마을 젊은이들이 다시 고기 잡는 고향으로 돌아와 밤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간다. 배가 선착장에 닿은 순간 오징어는 돈으로 바꿀 수가 있다. 부부가 나아가고 부자가 나아가고 삼촌과 조카들이 함께 바다로 나아간다. 동틀 시간이 아직도 먼 새벽 포구마다 긴 고무장화에 오리털 파카를 입은 젊은이들이 구멍 뚫린 드럼통 속에 장작불을 때면서 바다에서 얼어 돌아온 몸을 녹였고, 선착장에서 기다리던 늙은 어머니들은 라면을 끓여서 젊은이들을 먹였다. 오징어데 찾아온 포구 마을은 젊은이들의 활기로 왁자지껄했고, 사람 사는 일의 아름다움과 눈물겨움이 그만 하면 모두 족할 터인데, 이제 처녀들만 돌아오면 될 것이었다.
0.7톤은 동력 어선이 성립할 수 있는 최소의 규모다. 경운기 모터를 발동기로 삼고 어창과 어구만을 갖추었다. 무선기가 없어서 어업무선국의 전파를 받을 수가 없지만 0.7톤의 어부들은 캄캄한 밤바다에서 휴대전화로 연락해서 고장 난 이웃집 재를 챙겨주고 휴대전화로 선착장에서 기다리는 아내에게 배 돌아갈 시간을 알린다. 0.7톤의 휴대전화는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 영일만의 모든 0.7톤은 출어중이다. 1.5톤도 나아가고, 1.7톤도 나아가고, 2톤도 나아간다. 발전 집어등을 갖춘 100톤짜리 배들은 수평선 너머까지 나아가지만 이 잠자리떼 같은 목선들은 포구 마을에서 0.5마일 덜어진 바다에서 배마다 만선을 이룬다. 모두 다 만선인 것이다.
서기 158년에 이 영일만 포구 마을에 고기 잡는 젊은 부부가 살았다. 부부는 가난했다. 배가 없어서 바닷가로 오는 고기를 잡거나 해초를 따서 살았다. 남자의 이름은 영오였고 여자의 이름은 세오였다. 아마도 그 해에 이 고기잡이 부부는 어로작업 중 안전사고로 실종되었던 모양이다. 신라 아달라왕 시대의 역사는 바닷가 바위가 이 부부를 싣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 부부는 일본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국유사>). 이 가난한 고기잡이 부부가 실종되자 영일만에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고 신라는 암흑천지가 되었다. 임금은 그 부부가 실종된 바닷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빛을 다시 모셔들었다. 빛은 결국 인간의 내면에 있었던 것이다. 고기잡이 부부가 실종되자 빛은 사라졌다.
일연은 이 전설에 서기 158년(신라 아달라왕 4년, 정유)이라는 절대 연대를 부여했다. 이것이 그 해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말이다. 영일만 바닷가에서 그 전설은 절대 연대와 함께 사실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었다. 빛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랴. 2천 년 후의 이 바닷가에는 포항제철과 포항공대가 들어섰다. 포항공대의 방사광가속기는 기존의 빛을 수백억 배까지 밝게 증폭시킨다. 이것은 꿈의 빛이다. 물질은 이 빛 속에서 새로운 구조와 의미를 드러낸다.
새벽 바다에 수많은 0.7톤들이 돌아온다. 연오와 세오들이 돌아오고 빛이 인간의 마을로 돌아온다. 새벽 영일만에서는 알겠다. 모든 빛은 인간의 내면의 빛이다. 일연은 그렇게 말한 셈이다. 방사광가속기의 빛도 그러하다. 바닷가를 달리는 자전거 바퀴살에 서기 158년의 영일만 아침 햇살은 부서진다.
어부들이 권하는 생선회
장기곶, 대보, 감포 마을 어부들과 술을 마시면서 무릇 생선회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웠다. 회를 먹을 때는 피해야 할 것이 두 가지이다. 첫째는 양식된 생선이고 둘째는 냉동된 고기다. 광어와 우럭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횟감이다. 값도 가장 비싸다. 지금 동해안 어촌에도 자연산으로 냉동 안 된 광어나 우륵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어쩌다가 몇 마리씩 그물에 걸리기도 하지만, 바다에서 놀던 광어나 우럭은 수족관 안에 넣으면 몇 시간 안에 다 죽는다.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죽으면 도리 없이 냉동해야 한다. 양식장에서 자란 광어나 우럭은 수족관에서도 잘 산다. 그놈들은 사람이 잡아먹을 때까지 며칠이고 그 안에서 살아서 버틴다. 거기가 제 고향이기 때문이다.
어부들은 비싼 값을 치르며 양식되고 냉동된 광어나 우럭을 먹지 말고 도다리를 먹으라고 권한다. 도다리는 양식으로 키울 수가 없다. 도다리는 사람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지 않는다. 생선도 성질에 따라서 팔자가 제각기이다. 광어와 도다리는 비슷하게 생겨서 구별하기 어렵다. 광어는 이빨이 있고 도다리는 이빨이 없다.
오징어는 동해안에 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가는 생선이다. 반쯤 말린 오징어를 동해안에서는 ‘피데기’라고 부른다. 오징어는 배에서 잡자마자 널어서 말린 것을 으뜸으로 친다. 어창에서 며칠씩 묵혀 두거나 냉동했다가 꺼내서 말린 오징어는 하품이다. 이걸 구별하는 방법은 오징어의 몸통 가운데 세로로 나 있는 검붉은 줄이다. 이 줄은 오징어가 죽은지 2~3일이 지나면 없어진다. 말린 상태에서, 이 줄이 굵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오징어가 좋은 오징어다. 오징어를 고를 때는 면적이 넓은 것을 피해야 한다. 크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냉동 오징어는 육질이 다 풀어져서 널어놓으면 밑으로 늘어나서 면적이 커진다. 자연 상태에서 바로 말린 오징어는 오그라들면서 두께가 두꺼워진다. 살이 투명하고 두껍고 폭신폭신한 오징어가 좋은 오징어다. 또 다리 10개가 모두 벌어져 있는 오징어가 좋은 오징어다. 다리끼리 들러붙어 있는 오징어는 잘 마르지 않은 것이다. 들러붙은 부분이 변질해서 냄세가 난다.
멸치회도 좋다. 멸치는 양식되지 않는다. 모두 자연산이다. 포구 마을 좌판에서 3천 원어치만 사면 셋이서 충분히 먹는다. 비늘을 긁어내고 대가리만 잘라내면 통째로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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