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고해 속의 무한강산
부석사(172~187쪽)
몸이 기진했을 때, 풍경은 기갈처럼 몸속으로 파고든다.
마구령 산길을 따라 소백산을 넘어갔던 자전거는 다시 고치령 산길을 따라 산을 거꾸로 넘어서 부석사(浮石寺, 경북 영주시)로 돌아왔다. 산속 비탈 밭에서 거두지 않은 고추가 서리를 맞아 지천으로 썩어간다. 농부를 붙잡고 물어보니, 고추값이 맞지 않고 품삯을 댈 길이 없어 거두지 못하던 차에 서리가 내렸다는 것이다. 더 바싹 말라 비틀어지면 낫으로 걷어내서 군불이나 때야겠다고 말하면서 그는 땅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는 땔감으로 쓰려고 마른 콩대를 지게로 져나르고 있었다. 그의 지게 짐은 키보다 높았다.
바람이 짐을 떠밀자 지게에 짓눌린 그는 쓰러질듯이 비틀거리더니 목발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그는 게처럼 모로 걸어가며 바람의 공세를 피했다. 무너지고 또 일어서면서 그는 썩어가는 고추밭 고랑을 따라서 집으로 돌아갔다.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에게 기운내라고 말하는 것이 도덕인지 부도덕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산비탈 양지쪽 그의 집 굴뚝에서 푸른 연기 한 줄기가 겨울바람에 흩어진다.
고치령 오르막길은 멀고도 팍팍하다. 여기는 명승도 절경도 아니다. 산천에 본래 잘난 땅이 따로 있고 후진 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진대 금강산이나 경기도 일산의 정발산이나 모두 다 국토의 이름으로 동등하다. 고치령 오르막길은 다 잃어버리면서도 또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고단한 삶 속으로 뻗어갔다.
버리고 떠난 슬레이트 지붕 처마 밑에서 바람에 부대끼는 시래기다발이 흙벽에 쓸리면서 메마른 소리로 서걱거렸다. 햇볕에 말리던 무말랭이 소쿠리는 땅바닥에 뒤집혀 있었고, 먹다 버린 된장독 속에서 주먹만한 버섯들이 솟아올랐다. 새천년의 온 산골 마을 빈 집 흙담에서 시래기는 겨우내 바람에 서걱거리고, 라면 껍질 떠 있는 우물 속에 새까만 염소 한 마리 빠져 죽어 있는데, 못 얻어먹어서 비쩍 마른 주인 없는 개들은 사람을 보고 반기지도 짖지도 않고 비실비실 피했다.
고치령 오르막길은 굽이굽이 멀었다. 고개 너머 내리막길을 아예 잊어버려야만 자전거는 기나긴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고치령을 넘어온 자전거는 순흥(順興)들판을 가로질러 저녁 무렵 부석사에 당도하였다. 고해의 산맥을 다 넘어온 들녘가에서 푸른 절벽처럼 우뚝한 절은 노을에 젖어 있었다. 소백 연봉 뒤로 저무는 석양이 무량수전에 비치어, 일몰의 부석사는 무한강산이었다. 몸이 기진했을 때, 풍경은 기갈처럼 몸속으로 파고든다. 사찰 경내의 길은 꺾이고 또 꺾이면서 일주문‧범종루‧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에 이르고, 길이 꺾이는 지점마다 누각들은 서로 어려워하듯이 비스듬히 좌향을 틀면서 들어앉았다.
꺾이고 휘어지면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그 길은 멀지 않았으나 아득하였고 수평 이동을 수직 상승으로 끌어올리는 고양감으로 높아 보였는데, 이 전환을 위한 장치들은 모두 개산조 의상(義湘, 625~702)의 공간 연출이었을 것이다. 그가 짐승의 산을 열어서 부처의 산으로 바꾸어 놓을 때, 그의 도로 연장 공사는 저 마구령‧고치령을 넘어가는 인간고(人間苦)의 길을 부처의 땅으로 끌어들여 무량수전 앞마당에까지 이어놓으려 했던 것인데, 세기가 저무는 부석사의 저녁에 화엄의 도로는 소백 연봉의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신라의 군대는 AD 158년에 소백산맥을 넘는 죽령도로를 개척했다. 산맥 너머에 포진한 고구려의 군대를 잡기 위한 군사도로였다. 이 노선의 일부는 지금 죽령휴게소에 차 세우고 우동 먹고 가는 5번 국도다. 길은 본래 주인이 없는 것이므로 고구려 군대도 이 길을 따라 신라로 쳐들어왔다.
소백산맥에 군사도로가 뚫린 지 518년 후에 의상은 이 고개를 멀리 바라보는 신라 최전방 격전지 들판에 부석사를 세웠다. 그 500년 동안 전란은 그칠 날이 없었다. 김부식의 수사법에 따르면, 의상의 시대인 7세기에 이 들판에서는 인마(人馬)의 피가 내를 이루어 창과 방패가 피에 떠내려갔다. 피가 내를 이루던 살육의 시대에 의상은 가장 웅장한 평화의 체계에 도달했던 것인데, 그의 화엄 체계 속에서 당대의 살육이 어떻게 설명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부석사 안양루에서, 소백 연봉은 말떼가 질주하듯이 출렁거리면서 지평선 너머로 달려갔다. 이 산하는 흔들거리는 산하였고, 부석사의 '뜰 부(浮)' 자처럼 떠 있는 산하였으며, 그 저무는 산하를 바라보는 인간은 물오리처럼 거기에 빠져서 숨을 꼴깍거리며 자맥질할 뿐이었다. 들판을 건너오는 비스듬한 석양은 무량수전의 천년 된 기둥 속으로 편안히 스며들었는데, 오래된 것들끼리의 고감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그 무한강산 앞에서 젊은 사마승이 7세기의 들판을 향하여 저녁 예불의 종을 때렸고, 아미타불은 들판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서방 정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캄캄하게 저물어져, 자전거를 끌고 여관으로 내려왔다. 산 너머 마을의 빈 집 흙벽에 쓸리는 시래기 우는 솔를 이 종소리가 잠재울 수 있을까. 새천년의 들판에서 시래기 소리는 울고 또 울 것이었다.
고승들의 사랑법
원효나 의상 같은 신라의 높은 스님들이 젊었을 때 연애한 얘기는 후세 대중의 갈채를 받고 있다. 선묘(善妙)는 젊은 구도자 의상을 연모했던 중국 산둥반도의 바닷가 여자다. 중국으로 유학간 의상이 상륙 첫날 묵었던 집의 딸이다. 선묘는 의상의 여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분을 발랐다. 선묘의 소망은 이 멋진 구도자를 파계시켜서 살림을 차리는 것이었다. 선묘는 의상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면서 온갖 일용잡화를 구해 바쳤다. 의상은 공부를 마치고 한마디 말도 없이 신라로 돌아갔다. 선묘는 의상을 태운 배가 떠난 부둣가에서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의상은 돌아와서 부석사를 세웠는데, 이 절의 전설에 따르면 선묘의 넋은 용이 되어서 지금 부석사 무량수전 밑 땅속에서 이 웅장한 화엄 종찰을 떠받치고 있다. 부석사는 선묘를 위한 제각을 세웠다.
젊은 날의 원효와 의상은 친한 친구였고 진리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도반이었지만, 그들의 삶의 자취는 정반대다. 원효는 인간의 구체적 실존 속으로 나아갔고 의상은 화엄의 사유 체계를 건설했다. 당나라로 가는 부두에서 두 청년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 한잔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자신에게 절실한 길은 따로따로인데, 청춘은 아름답다는 말은 이런 대목에서나 써야 한다. 의상이 낙산사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원효는 설악산 영혈암에서 산을 바라보고 있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무량수전, 범종각, 안양루다.(출처 : 부석사닷컴)
의상은 정치적이다. 의상은 언제나 임금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하고 있었다. 부석사를 지은 재물도 임금한테 받은 것인 듯싶다. 원효는 대궐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백성들 틈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뒹굴었다. 의상은 명문가의 아들인데 원효의 아버지는 하위직 관리였다. 의상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이었으므로 명문가의 딸을 만날 듯싶지만, 산둥 바닷가의 여염집 딸한테 걸려들었다. 어떤 사람은 선묘가 7세기 산둥반도의 바닷가에서 외항선 선원들을 기다리며 바람 속을 서성거리던 수많은 여자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원효는 행벅으로 보아서 천민의 딸과 연애해야 마땅할 것 같지만, 원효의 애인은 요석공주다. 출신 계급이나 이념적 지향성을 일체 떠난 인연이다. 스님들의 사랑은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선묘는 처녀고 요석은 과부다. 의상은 여자로부터 도망치고 외면하지만 원효는 밤중에 제 발로 애인 집을 찾아간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라고 쓰여 있지만, 여자 앞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원효는 사랑의 깃발을 당당히 내세우면서 여자한테 가지 못하고, 여자 집 앞에서 일부러 개울에 빠져서 옷을 적시고, 옷 좀 말려달라는 구실로 여자한테 접근했다. 이것은 속세 대중이 하는 수작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옷을 말리자면 옷을 벗어야 하는데, 설총은 그날 밤에 잉태되었다. 원효 스님 애인 집은 지금 경주박물관에서 남천 개울가를 따라 내려가다가 35번 국도와 만나기 직전, 반월성 건너편에 있었다.
의상은 한 사내로서, 그리고 한 구도자로서 선묘라는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대목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잘못한 일일 듯싶다. 중요한 기사를 빠뜨렸다. 낙종이다. 의상은 중국에서 공부할 때 선묘가 가져다 바치는 일용잡화를 다 받아서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의상은 선묘라는 여자의 존재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언반구 말을 걸지 않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갈채는 끝난다. 원효는 살아 있는 여자의 몸에서 아들을 낳았고 의상은 죽은 여자의 넋 위에 절을 지었다.
살아 있는 여자의 몸에서 아들을 낳고 절도 지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높은 스님들도 이 두 가지 사업을 한꺼번에 해내지는 못했다.
선묘의 꿈은 살아서 솥단지를 들여앉히고 밥상을 차리고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가엾은 선묘는 죽어서 용이 되었고, 지금도 아득히 높은 애인의 절을 지키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 나라의 사랑법이라고 해도 선묘의 넋은 여전히 가엾다. 용이 되었기로, 밥상을 차리고 싶었던 젊은 날의 꿈을 버릴 수가 있었을까.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생각해보니,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불법의 바다는 넓고, 슬픔의 바다도 넓다.
세속으로부터 비켜 앉은 무한지계 화엄강산
화엄은 사람들이 이 세계 위에 어질러놓은 온갖 헛된 희망의 뿌리를 뽑는다. 화엄은 사람들이 이 세계 속에서의 삶과 시간과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온갖 개념의 가건물을 철거한다. 화엄은 이 세계를 언어로 치환해놓은 결과물을 인식이라고 말하려는 인간의 분별을 향하여, 그것은 인식이 아니라 세계와의 단절과 차단일 뿐이며 폐쇄된 존재의 미망이라고 가르친다.
화엄은 인간의 존재를 일시에 열어 젖혀 모든 티끌과 모든 순간 속으로 나아가게 한다. 화엄이 열어내는 자유의 시공 속에서는 티끌이 작고 세계가 큰 것이 아니며, 순간이 짧고 영원이 긴 것도 아니며, 그리고 그 반대도 아니다. 그 새로운 시공 속에서 티끌과 우주는 융합하고 순간과 영원은 삼투하는 것인데, 그렇게 합쳐지는 시간과 공간은 사람들이 부처의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유의 터전이다.
부석사는 신라 화엄의 종찰이다. 어떤 장엄한 산하는 그 굽이치고 넘실대는 풍경만으로도 이미 한 경전의 세계를 구현한 듯한 설렘을 주는데, 부석사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소백 연봉이 그러하다.
6월의 소배산맥은 푸르고 강성하다. 태백산맥에서부터 서남방으로 방향을 틀어잡는 소백의 산세는 힘찬 기세로 부석사의 먼 남쪽 외곽을 달려 나가는데,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이 단연 우뚝하고, 수많은 작은 봉우리들이 큰 봉우리들 사이로 앞질러 달려 나가고 있다.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맥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을 달리는 산맥으로 떠오르기 십상인데, 그 풍경은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설명하려는 자에게 침묵을 명령하는 듯하다.
그 풍경을 설명하려는 시인, 묵객들의 끈질긴 허영심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부석사 안양루에 걸린 낡은 현판의 기록에 따르면, 어떤 자들은 이 웅장한 산하 앞에서 한낱 티끌로 떠도는 인간 존재의 슬픔을 토로하였고, 또 다른 자들은 그 한없는 산하와 합치하는 듯한 존재의 부풀어 오르는 자유를 노래하였다. 그러나 그 웅장한 산하에 대한 매혹만으로 부석사로 가는 여행을 설계할 수는 없다. 당에서 화엄 수학을 마치고 전란에 휩싸인 조국으로 돌아와 닫힌 산하를 열어서 화엄의 도량을 건설하던 무렵의 젊은 의상의 마음속 비밀을 헤아리는 일이 부석사로 가는 여행의 사명이라야 옳을 것이다.
의상은 한평생 옷 세벌과 물병 한 개와 밥그릇 하나 외에는 몸에 지닌 것이 없었다. 세수를 한 뒤에도 수건을 쓰지 않고 얼굴의 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여러 산천을 두루 떠돌아다녔으며, 추위와 더위를 모르고 정진하되, 죽더라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상 잡사를 입에 담지 않았으며, 문도들과 화엄의 교학을 문답할 때도 말을 지극히 아꼈고, 말이 번다한 후학들을 엄히 꾸짖었다. "인연으로 빚어지는 모든 것들에는 주인이 없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저작물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불러모으지 않았으마 배움을 구하려는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왕명을 받들어 그는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여름에는 그늘에서,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의상의 삶의 모습에 관한 기술은 <송고승전< <삼국유사> 그리고 균여의 글을 부분적으로 짜맞춘 것이다.).
물병 한 개와 밥그릇 하나로 국토를 편력하던 젊은 의상에게 부석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소백산맥의 풍광은 신령했다. 1천3백 년 전 그 산하의 매혹은 지금도 게속되고 있다. 그 풍광은 이 젊은 이상주의자의 종교적 상상력을 절정으로 몰아가고 있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부석사의 터는 '고구려의 바람과 백제의 먼지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며, 소나 말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땅'이다. 더돌던 의상은 이곳에 으르러 '이 땅은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하여 참으로 법륜을 굴릴 만한 곳이다. 화엄은 이처럼 선하고 복받은 땅이 아니면 융성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화엄의 교학이 산하의 웅장함과 만날 수 있었던 그 자리에 부석사는 세워졌다. 부석사는 그 지리조건과 풍광만으로도 이미 화엄강산이었다.
부석사 일주문에서 범종루, 응향각을 지나 안양루와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은 천천히 걸어서 15분이면 족하다. 부석사의 공간구조는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점차 확대되고 상승하는 서방정토의 모사를 보여주고 있다.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은 3단계의 거대한 석축을 지나게 되고, 그 석축은 다시 9개의 층으로 나뉜다. 이 3단계 석축과 9층위 계단을 모두 거쳐서 올라가야만 사람들은 무량수전 안의 아미타불을 만날 수 있다. 이 9층위 계단은 서방정토에 이르는 길목이며, 그 계단이 끝나는 안양루는 정토의 입구이며,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의 정토인 셈이다. 부석사 공간구조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은 중생이 서방정토에 이르는 단계를 설명한 <무량수경>의 기록과 일치한다. 부석사의 경내 동선은 꺾여 있다.
부석사의 3단계 석축들은 서로 평행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각도로 어긋나 있다. 안양루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앞뒤 건축선은 30도 정도로 꺾인다. 부석사 경내에서 기하학적인 대칭이나 평행선을 이루는 공간은 없다. 모든 건축물은 다른 건축물과 마주치치 않고, 옆으로 비켜서 있다. 건축물들은 웅장한 산하를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고, 산하의 풍경으로부터 어느 정도 비켜서 있다.
무량수전 안의 아미타불도 그 발 아래 산하를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는다. 아미타불은 몸을 옆으로 돌려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부석사는 공간 전체를 양분하는 중심 축을 갖지 않는다. 부석사의 공간은 이 꺾인 동선과 건물 축, 어긋난 공간 배치와 수평을 이탈한 축대선에 의해 약동하는 생명력을 얻는다. 일주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은 이 세상의 변방을 아득히 우회하는 듯한 공간감의 확장을 느끼게 한다. 서방 정토는 굽이굽이 돌아서 찾아가는 곳이라는 느낌을 그 길은 구현하고 있다.
범종루의 아래 통로를 지나면 마치 액자 같은 공간에서 안양루가 허공에 뜬 모습으로 나타난다. 범종루에서 바라보는 안양루는 비스듬히 옆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범종루에서 안양루에 이르는 길은 다시 꺾여 우회한다. 안양루는 그 건물을 밑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공간감을 크게 확장시킨다. 서방 정토는 인간의 현실 속에서 뚜렷하고도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그 낙원에 이르는 길은 아득히 우원하다는 종교적 경건성을 부석사의 길은 공간 안에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화엄을 수학하던 시절 의상이 저술한 <화엄일승법계도>의 도인이 그려져 있다. <화엄일승법계도>는 <화엄경>의 거대한 구도를 210자로 압축한 시문이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
서법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다.
하나 안에 일체요, 多 안에 하나
하나가 곧 일체니, 다가 곧 하나
한 티끌 속에 십방세계가 들고
모든 티끌이 또한 그러하다.
<화엄경>의 입법계품은 진리를 찾아서 천하를 떠돌던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을 만나는 대목으로 끝난다.
그때 보현보살의 몸에서는 모든 털구멍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의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었고, 그 부처의 바다마다 또 다른 부처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선재동자는 보았다. 안양루에서 내려다보이는 화엄강산의 모든 수목들 속에서 부처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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