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경영/필사-김훈 <자전거여행>

20. 원형의 섬, 진도 소포리(197~207)

김부현(김중순) 2012. 7. 18. 16:55

원형의 섬, 진도 소포리(197~207)

 

들에는 노동이 있고, 노래가 있고, 함께 일하고 노래하는 이웃이 있다.

 

진도는 원형의 섬이다. 음악과 놀이와 그림과 무속의 원형이 이 섬에서 비롯되었고 거기서 완성되었다. 이 원형들은 굳어져버린 틀이 아니라, 삶과 함께 출렁거리는, 열려진 표현 양식이다. <진도 들노래>는 김매는 대목에서는 한없이 느리고 유장한 진양조 장단으로 흘러간다. 그러다가 새참을 머리에 인 아낙네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 돌연 신바람 나는 자진모리로 바뀌어, 일의 신명과 밥의 신명은 하늘에 닿는다.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는 섬의 서남쪽 바닷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오랜 세월 함께 모여서 노래해온 주부, 할머니들의 자생적인 노래방이 있다. 도시에 가라오케 노래방이 창궐하기 훨씬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노래 모임을 '노래방'이라고 불렀다. 노래가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서 작동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포리 노래방은 한국 노래방의 원형이라고 할 만하다.

날이 저물면, 저녁 설거지를 마친 주부들은 이 마을 한남례씨 집 사랑방에 모인다. 노래방 회원은 30명 정도지만, 보통 15~17명 정도가 모인다.

조정심(50세)씨가 가장 젊고 고연기(75세) 할머니가 최고령자다. 이 노래방의 악기는 북과 바가지가 전부다. 북채를 쥔 한남례씨가 악장 격이다. 한씨의 북에 맞추어 주부들은 <진도들노래>, <육자배기>, <흥타령>, 단가, 판소리를 부른다. <육자배기>를 부를 때는 한 소벌씩 노래를 돌리는데, 대체로 나이 순서에 따른다. <둥덩이타령>을 부를 때는 북은 물러가고 다들 손바닥으로 바가지를 두들기며 합창한다. 앉아서 노래하는 사람들의 어깨가 흔들리고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그러다가 신명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이 방 한가운데로 나와 춤을 추면, 몇 명이 따라 일어서서 함께 춤을 춘다.

이 노래방은 겨울이 한철이다. 노래방 주부와 할머니들은 다들 억척스런 농사꾼이다. 들일, 밭일에 집안일까지 한다. 농사가 시작되는 2월부터는 모임 횟수가 줄어들고 여름에는 모이지 못한다. 여름이라도 비가 쏟아져서 일하지 못하는 날에는 모여서 노래한다. 이런 날에는 한남례씨가 집집마다 돌며 "날도 궂은데 한판 놀아보더라고"라며 노래꾼들을 모은다.

소포리 노래방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겨울이면 이 집 저 집 사랑방을 옮겨다니며 모여서 노래를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 이 노래방 활동은 금지되었다. 해방되던 해 노래방은 다시 결성되었다. 이때는 남자들의 노래방이었다. 광복과 함께 공동체의 기상을 회복하기 위한 자생벅 노래운동이었다. 집단적 역동성을 표출하는 농악과 군무가 성행했다.

1973년 이 마을 앞바다는 방조제로 막혔다. 농토가 늘어나 주민들의 삶은 소금을 구워서 먹고 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넉넉해졌다. 그러나 왠지 노래의 신명은 빠지는 듯했다. 농사는 기계화되었고, 남자들의 노래방은 이해에 슬그머니 없어져버렸다. 소포리 노래방은 이 무렵에 이 마을 40대 주부들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노래방 초기에 주부들에게 노래를 지도했던 정채심 씨와 김막금 씨는 진도 들판에서 들노래의 거장들이었다. 그들은 직업적 성악가가 아니라 한평생 논일을 했던 농사꾼이었다. 그들은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소포리 노래방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들노래를 할 때 방바닥에 모를 꽂는 시늉을 한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삶의 내용과 정서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의 노래를 노래하지 않았다.

소포리의 겨울은 신명이 뻗쳐오른다. 지금은 설날 다 함께 모여서 놀 강강술래를 연습하고 있다. 그 신명의 힘으로 소포리 사람들은 새 봄의 노동을 예비하고 있었다.

 

노래방 지도자 한남례 씨

 

한남례 씨는 진도 소포리 노래방의 창설자이며 음악적 지도자이다. 이 노래방 사람들의 장단은 모두 한씨가 두드리는 북의 지휘를 받고, 끄는목과 떨림목은 모두 한씨의 목청을 따라간다.

한씨는 어렸을 때부터 이 마을에서 가장 신명 높은 아이였다. 일에서나 놀이에서나 늘 신바람이 나 있었다. 부엌에서 일할 때도 늘 노래를 불렀다. "개구리가 물속에 뛰어드는 소리만 들려도 엉덩이가 덜썩거렸고 어깨가 흔들렸다"라고 한씨는 말했다.

한씨에게 음악은 몸의 일이었고 삶의 일이었다. 노래가 몸을 흔들어서 삶을 신명나게 해주었다. 시집간 뒤로는 시부모님 눈치가 보여서 집안에서 일할 때는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한씨의 시댁은 염전도 있고 논도 있었다. 염전일을 할 때는 이렇다 할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한씨는 주로 들에 나가 일했다. 들에는 노동이 있고, 노래가 있고, 함께 일하고 노래하는 이웃들이 있었다.

<진도들노래>에 대한 한씨의 애착은 대단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마을의 생산과 노동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마을 앞바다가 방보제로 막혀 염전은 논이 되었고 나루터는 없어졌다.

농지가 정리되어 농로가 직선으로 바뀌었고 모내기와 추수작업은 기계화되었다. 노동의 구체적 동작과 결합되어 있던 들노래의 리듬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인간과 노동과 노래가 뿔뿔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한씨가 애초에 노래방을 결성한 목적은 이 위태로운 들노래를 마을 안에서 살려내기 위한 것이었다.

한씨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그러나 한씨의 언어 능력은 놀라웠다. 한씨는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거침없고 발랄한 전라도 사투리로 한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한씨는 요즘 마을회관 야학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다. '가'에다가 'ㅣ'를 합치면 '개'가 되고, '개'라고 써놓으면 남들이 이것을 '개'라고 알아본다는 것이 한씨는 너무너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야, 요놈의 글자가 멍멍 짖는 개다냐, 아니면 헛것이다냐?"라고 한씨는 말했다. 말할 때도 한씨의 어깨는 리듬을 따라 출렁거렸다.

 

진도의 들은 겨울에도 푸르다

 

진도의 들은 겨울에도 푸르다. 10월에 김장 배추를 걷어낸 밭에 다시 월동 작물을 심는다.흰 눈이 쌓인 들판에 무‧배추‧대파들이 돋아나서 진도의 겨울 들판은 흰색 바탕에 초록이다.

진도의 산들은 낮고, 작은 우마차들이 그 산들의 중턱을 이어준다. 산밑에서 들판이 끝나는가 싶지만,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다시 넓은 들이 펼쳐진다. 자전거로 이 우마차로를 달리면서 내려다보면, 진도의 겨울 들판은 노랑에서 초록에 이르는 색의 스펙트럼이다.

싹이 막 돋아난 무밭의 노랑은 여리다. 이 세상에 갓 태어난 그 노란색은 흰 눈 위에서 애잔하게도 가물거린다. 파밭은 어릴 때는 연두에서 시작해서 점차 초록으로 이행한다. 배추밭은 초록에서 시작해서 점차 검은 기운이 감도는 수박색으로 변해간다. 눈 쌓인 들판 위로, 이 유순한 색깔의 스펙트럼은 끝도 없이 전개된다.

생명을 가진 것들의 색깔은 '노랑'이나 '초록'같은 개념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색깔이다. 그래서 그 색깔은 정처 없고, 불안정해 보인다. 김치 담가 먹은 무와 배추의 아름다움은 겨울 진도에서는 알 수 있다.

진도의 파밭은 대단하다. 진도의 대파는 전국 파 소비량의 20퍼센트 정도를 감당한다. 진도 밭 전체의 반 정도(2,834헥타르)가 파밭이다. 겨울의 흰 들판 위로 이 연둣빛 바다는 출렁거린다.

진도의 식당에서는 눈밭에서 뽑아온 겨울 배추와 대파들을 얼마든지 준다. 된장에 찍어서 날로 먹는다. 그 맛은 달고도 아리다. 눈 속에서 견디느라고 배추의 섬유질은 완강해져 있다. 씹을 때는 와삭와삭 소리가 나면서 액즙이 입 안에 가득 찬다. 겨울 배추는 잎맥 사이에 월동용 당분을 저장한다. 겨울 파는 흰 밑동 부분에 끈적거리는 진액이 많다. 이것을 날로 씹어 먹는 것은 겨울과 봄을 함께 씹어 먹는 일이다.

진도군 농업기술센터의 박춘석 과장은 "춥고 메마른 땅에서 올라온 채소가 달고 고소하다"라고 말했다. 봄은 겨우내 이 섬에 머무른다.

 

진도 운림산방 '옛 모습 찾기'

 

내가 깊은 산 속에 혼자 살자니 적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비록 책은 있으나 안력이 좋지 않아 모두 포기해버렸고 또한 마음속에 경영하는 바가 없어 흰 머리털을 어루만지며 홀로 슬퍼할 뿐이었다. 사촌(沙村)의 차가운 방아는 석양에 멀리 보이고 계사(溪寺)의 맑은 종소리는 바람결에 들린다.

 

이 한유로운 글은 허소치(1808~1893)의 자전적인 <소치실록>의 첫 문장이다. 늙은 거장이 아니면 쓸 수가 없는 문장이다. 허소치는 자기 생애의 일들을 적은 글들을 '꿈의 기록'이라고 해서 <몽연록>이라고 이름지었으나 후에 '실록'으로 고쳤다. 그의 생애는 꿈과 사실이 포개져 있다.

진도 운림산방은 꿈과 꿈과 현실이 포개져 있었던 그의 말년의 화실이다. 허소치는 50세 되던 1857년에 귀향해서 이 초가집을 짓고, 70세까지 여기서 글미을 그렸다. "치로(癡老)가 한가로이 고향의 예 동산에 돌아와 지내니 만 가지 사념은 사라졌다. 오직 한 개의 소나무 베개를 옆에 두고 있으니 몇 권의 책을 한쪽으로 치워놓은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라고 그는 썼다.

이 운림산방은 이제 진도 관광의 명소가 되었으나, 그 옛 주인의 탈속한 체취는 크게 훼손되어 있다. 집 앞을 너무나 꾸며놓았고, 초가집 옆으로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기념관은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다. 옛 주인의 초가집은 새 건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진도군은 지금 이 어이없는 기념관을 철거해버릴 계획을 만들어놓았다. 헐어내고, 문화재 양식에 맞게끔 새로 설계된 건물을 다른 자리에 지을 계획이다. 이 사업에 3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이래저래 예산만 이중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기념관이 정비되고 나면 운림산방은 좀 더 옛 모습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 옛 모습의 원형이라는 것은 오직 군더더기가 없고 단촐한 것이다. 그리고 결핍 속에서 우아한 것이다. 그것이 허소치가 말했던 '법'이다. "법이 있어야 아름다울 수가 있고 아름다워야 신묘하게 될 수가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허소치의 글을 읽으면, 그의 유적지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꾸만 짓는다고 잘하는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