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다시 읽고 깊이 읽기

5. 다시 읽고 깊이 읽기-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김부현(김중순) 2012. 9. 12. 11:49

 

 

일정한 도덕률의 틀 속에서 온전하게 제 몫의 삶 누리기를 마다하고 떠돌이 앞소리꾼이 되어 영혼의 자유를 외치는 거인,

자기 내부에 잠재하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드높이고,

그 드높이는 과정에서 조우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문학적 표현을 부여하는,

참으로 초인적인 작업을 시도한 거인이 있었다.

신을 통하여 구원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카잔차키스의 문학은 존재와의 거대한 싸움터,

한두 마디로는 싸잡아서 정의할 수 없는 광활한 대륙을 떠올리게 한다.(445)

 

몇 해 전,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의무감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는 읽어야 소위 ‘책 좀 읽는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친구의 어줍잖은 독설 때문이었다. 최근 조르바를 “다시 읽고 깊이 읽기”를 해봤다. 처음과는 또 다른 자유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자유’가 더 그리운 내 삶의 힘겨움을 반영해 주는 것 같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저자가 직접 체험한 경험담이기에 더욱 현실감이 있다. 주인공인 ‘나’는 광산 개발을 하러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조르바의 본명은 기오르고스 조르바이다. 한 마디로 조르바는 우리가 배우고 생각하는 상식적인 인간상을 완전히 뒤집어엎은 ‘괴짜 인간’이다. 사지는 멀쩡하지만 생긴 꼬라지와 생각하는 대가리와 말하는 폼새와 하고픈 대로 행동하는 그리고 판단력의 척도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리스인 조르바>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유"라는 두 글자를 연상한다. 그 자유에는 영혼의 자유와 언어의 자유, 그리고 육신의 자유를 아우르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여행, 꿈”이라는 단어가 그 저변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잔차키스의 삶을 풍부하게 해 준 것은 바로 여행과 꿈이라는 단어였다. 그는 1883년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그의 머리를 채웠던 것은 전쟁이었다. 크레타인과 터키인들은 만날 때마다 어르렁거렸다.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아버지는 카잔차키스가 아홉 살이었을 때 터키인들 손에 교수형을 당하는 기독교들의 발에 입을 맞추게 함으로써 그들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고는 명령했다.

 

“잘보고, 죽을 때까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 누가 이분들을 죽였어요?”

아버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자유]

 

카잔차키스의 삶은,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1957년 74세의 일기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글은 지금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최근 조르바가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조르바와 같은 인간을 포용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나와 조금 다른 말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배려가 부족한 우리다. ‘한국인 조르바’들이 더 많이 등장하기를 기대해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글

  

“현재에 집중하라.

내 앞에 답이 있다.

답을 여기서 찾아라.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순간의 집중이다.“

 

지나간 과거보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강조한다. 조르바와의 첫 만남에서 소설이 시작되는데 소설 속에서 저자인 '나'는 35살이고, 나를 두목이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는 조르바는 환갑의 노인이다.

한 마디로 조르바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대부분 머리로 이해하는데 조르바는 가슴으로 이해하고 몸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조르바의 행동들이 좀 충격적이기도 하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미래라는 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를 수 있었을까.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24)

 

 

-http://blog.daum.net/bonokensin/6759089의 서평

 

 

1 감정과 이성

조르바는 자유를 이야기 하지만 요즘 관심이 있는 감정과 이성에 대한 여러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났다. 조르바는 감정과 육체가 되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성이 되어서 끊임없이 선문답을 한다. 감정과 육체는 마치 폭풍이 되어서 인간의 내면과 세상을 무참히 파괴시킨다. 이성은 먼저 감정을 따라다니면서 조금씩 원래대로 복구시킨다. 가끔 이성이 힘을 받으면 감정을 감옥에 잠시 가두어 두지만 그건 아주 잠시이다.

감정은 끊임없이 육체를 움직이게 하여서 세상의 변화를 만들려고 한다. 이성이 막으면 내면을 마구 흔들어댄다. 이성이 버겁게 따라다니면서 어느 순간 변화도 내면을 흔들림 멈춰서 그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본다. 고요하게 안개 속에는 인간의 주변은 파괴되어 있고 내면은 상처에 피가 흘리고 있다.

하지만 피는 다시 내면을 흘러 강을 만들고 나의 역사를 만들고 파괴후 인간은 창조를 시도할 수 있다. 이성이 이 찰나의 순간 뒤를 돌아본다.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한 줄기 한번도 보지 못했던 길.... 본인의 발자국만이 존재하는 그만 볼 수 있는 길... 그 길을 걷던 이성의 여정... 그것이 자유라는 것을...

 

2 악마의 책

문득 <영혼의 자서전>을 읽다가 쓰고 싶은 글귀가 생겨서 글을 적어보려고 한다.마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붓다의 환상을 보고 깨기 전에 글을 쓰고 싶어하듯이....무엇을 이해해서 나의 것이 되어 가는 것 즉 자기화는 고통의 길이다. 먼저 사람들은 좋아하고 이해하고 싶은 것들은 무작정 그 대상의 깊은 내면까지 들어가 그 대상을 느껴야 한다.

온 몸과 정신이 그 대상의 향기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대상을 제대로 보기를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그 깊은 내면에서는 빠져나와서 그걸 응시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 것은 너무 가까워도 되지 않고 멀어서도 안 된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 거리에서 그 대상을 응시할 때 향기와 함께 그 대상이 자기화가 진행된다.

근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무서운 책이다. 아니 악마의 책이다. 조르바를 벗어나서 조르바를 응시하면서 책을 보는 순간 독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속에 들어가 버린다.그 둘을 응시해야 제대로 이 책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데... 난 조르바를 벗어나기도 버겁기만 한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내가 가야할 자리에서 조르바를 벗어나려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

 

3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는 책 속에서 조르바, 그의 친구, 오르탕스 부인 모두 자신의 조각을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둘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생각해봤다. 사람들은 말한다. 조르바가 마치 자유전체인 것 같다고...

하지만 조르바는 사실 완벽한 자유가 되지 못했다. 책에서는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함께 했을 때 자유가 됐다. 순간순간의 행위로 보면 조르바는 굉장히 자유스러워 보인다. 그는 그저 "카르페 디엠"을 외치면서 현재에 가장 충실한 하나의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는 모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야기한다. 과거를 묻지 말라고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순간에 집중하지 말라고.. 그러나 그는 과거를 말하고 미래를 말한다.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부정한 행위를 마지막에 해버린다.

 

 

"나는 순간순간이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54)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통해 그런 조르바를 자유의 의미로 만들었다. 시간의 흐름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유가 되어 갔다. 순간순간을 자유를 응시하면서 그는 아파하고 환희하면서 감정을 느끼었다. 조르바는 공간을 자유로 지배했다면 카잔차키스는 시간을 자유로 지배했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의 두 축에서 존재하고 이 책에서는 실패, 상실, 허무 후에 둘의 춤사위로 딱 한번 자유를 인간에게 허락했다.

 

4. 춤과 산투르

이 책의 엔딩은 어찌 보면 두개이다. 하나는 모든 것을 잃고 춤을 추는 두 남자의 모습과 그리고 둘의 헤어짐 후 조르바가 남긴 산투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두 사람의 춤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이것의 큰 의미를 둔다.

하지만 이 책은 두 개의 엔딩을 공존 시키고 둘 다 모두 큰 의미를 담았다. 문학적으로 시적인 표현이 육체로 표현되는 것을 춤이라고 말한다. 사실 춤을 추는 부분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생각나게 만든다. 춤이라는 소재는 같지만 니체가 표현한 춤은 날아가는 느낌의 춤이라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대지와의 호흡을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 산투르를 전달하는 것은 사실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산투르는 아무 의미없는 물체이다. 그는 악기를 연주할 줄 모르고 조르바는 그 산투르를 그에게 주었다. 조르바는 제대로 다루지 못했단 산투르를 카잔차키스에게 남기었다. 카잔차키스는 그 산투르를 물질적으로 전달받지 않아도 된다.

카잔차키스의 깨달음에는 산투르는 노래할 것이다. 이 부분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를 보면 할 수 있다. 산투르 자체의 의미적인 접근은 베르그송의 이론으로 접근하면 될 것 같다.

 

5. 변증법과 공존성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선문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조르바는 변증법방식의 대화를 이야기하고.. 카잔스키스는 긍정하고 싶다고 말을 하고 싶지만 대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조르바의 대답을 그래도 받아드리지 않고 대지 즉 크레타의 공간속에서 자기의 이상(그리스 내부의 사상과 부디즘)과 조르바(그리스 외부의 사상과 안티 기독교)의 이상에 조화시킨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가장 핵심이지만 배경에는 '조화'라는 단어가 깔려있다. 인간 중심과 다중신의 헬레니즘과 유일신 기반의 헤브라이즘의 공존 종교를 부정하는 니체주의 속에서도 종교를 존중하는 의지 등... 이 조화를 이루는 바탕에는 공존성이 있는 것이다.

 

6. 그리스인 조르바 우리는 제대로 보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이 책을 제대로만 본다면 굉장히 좋은 책이다. 삶이라는 여정 속에서 우리가 들고 가는 무거운 질문들을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근데 요즘 이 책의 판매부수와 읽는 분위기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자유에 대한 열망을 조르바를 통해 대리만족하고 허상을 만드는 것이 목적인 분위기다. 나도 예전에는 조르바를 읽고 아 조르바처럼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마음껏 여행을 하고 여자를 만나고 멋대로 하는 것이 살게 돈이 정말 많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다. 사실 그 나이에 깊은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근래 베스트셀러에 가깝게 이 책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이 책이 인기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왠지 서글픈 결론이 나왔다.

 

짧게 이야기하면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는 출판시장이 지금 내는 책들의 패턴이 독자들에게 주는 피로가 실실 현실화되고 있는데 마케팅 포인트(노벨문학상 노미네이트)와 몇몇 유명인 추천(박경철, 김정운, 조국 등)이 편승한 깊이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유는 왠지 있어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은가?

 

둘째는 자본주의의 허상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철학적 고민을 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유를 국가적, 탈자본적, 종교적, 개인적으로 자유를 분할과 중첩으로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런 자유의 분리를 못해서 마지막 결국 자유롭게 살아야지 생각하고 생각해낸 게 그동안 가고 싶은 나라 여행을 가도록 하자. 이런 결론을 내린다. 세상의 압박을 풀어낼 해답을 갈망하는데 쉽게 정답을 차지하고 싶은 열망이 잇는데 답을 선택지에서 고르고 싶어 한다.

 

그건 주관식으로 답해야 하는데 문제에 객관식 보기가 없다고 투정대는 어린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수준의 책으로 해석한다. 안타깝다. 옮긴이의 말에 나오지만 이 책을 이해하려면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이 세 명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리스의 역사적 배경도 어느 정도 이해가 필요하다.여러 번 읽었지만 아직도 고민할 부분도 많고 이해 못한 부분들도 많은 <그리스인 조르바>이 잘못된 소비로 망쳐지는 모습에 안타까워서 약간 건방적인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자유가 뭔지 알려 준다 아니면 자유롭고 싶으면 봐야할 Bible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나도 자유를 고민할 수 있는 책인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스인 조르바>의 모든 것이 자유는 아니다. 난 자유는 그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사람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선택한 도구로 밖에 안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 읽고 깊이 읽고’ 싶은 구절들

 

 

산다는 게 감옥살이지.

(.....)

암, 그것도 종신형이고 말고, 빌어먹을.(8)

 

 

 

....고독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니까.(9)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미래라는 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13)

 

 

 

내 삶의 양식을 바꾸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이제껏 너는 그림자만 보고서도 만족하고 있었지? 자, 이제 내 너를 본질앞으로 데려갈 테다.(15)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17)

 

 

 

사사건건 뭐든지 우린 주판을 튕겨보고 쟤보고 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조르바는 상식을 업어버리는 사람, 생각보다 행동파다. 이버지를 아버지라 하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한다. 이중인격을 강요받는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이런 인간상이 없어 세상은 갈수록 정형화되고 기계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22)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라는 거지!(24)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고....

정오 가까이 되어 비가 멎었다. 태양은 구름을 가르고 그 따사로운 얼굴을 내밀어 그 빛살로 사랑하는 바다와 대지를 씻고 닦고 어루만졌다.(26)

 

 

 

인간만을 위한 자비심이 아니라 싸우고, 울고, 소리치고, 바라면서도 만사 무상의 허깨비임을 알지 못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이었다.(27)

 

 

 

해가 바지면서 바다는 조용해졌다. 구름도 사라졌다. 밤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바다를 보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후회했다.(29)

 

 

 

목자 : 내게는 말 잘 듣고 부지런한 양치기 여자가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였습니다.

밤에 아내를 희롱하는 나는 행복합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

 

 

붓다 : 내게는 착한 영혼이 있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 영혼을 길들여 왔고,

나와 희롱하는 것도 가르쳐 놓았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31)

 

 

 

그렇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는 내 피가 뜨거웠어요. 도무지 <왜>라든지 <어째서> 같은 걸 생각해 볼 수 없었으니까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남없이 나이 처먹어 분별이 생기고, 이빨도 좀 빠져야 합니다.(34)

 

 

 

나는 생각했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 무엇일까?(38)

 

 

 

오후 늦게 우리는 모래 깔린 해안에 내려 말끔하게 생긴 흰 모래, 아직 꽃이 지지 않은 유도화, 무화과와 콩 나무.....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찢긴 구름은 천천히 대지 위를 달리며 그림자를 대지 위에 부드럽게 드리우고 있었다. 또 한 떼의 구름이 하늘 저쪽에서 일어났다. 태양이 구름 뒤로 들어갔다 나옴에 따라 대지의 표정은 살아 있는 얼굴처럼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곤 했다..... 내 앞에는, 아직은 사막처럼 매혹적이지만 필경은 죽음같이 무서운 신성한 고요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39)

 

 

 

나는 운명이 나를 실어다 놓은 해변을 한 바퀴 돌아볼 여유가 된 셈이었다.....내 마음에 크레타의 시골 풍경은 잘 다듬은 산문, 단정한 어순, 절도 있는 표현, 군더더기 수식을 피한 강력하고도 절제된 산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산문은 필요한 모든 것을 극히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법이다. 여기엔 경박한데도, 작위적인 구석도 없다.(49)

 

 

 

해가 오른 하늘은 맑았다. 나는 암초 사이에 앉은 갈매기처럼 바위틈에 앉아 오래 바다를 응시했다. 내 육신은 기운이 넘쳐 내 말을 순종했다. 마음은 파도를 응시하다 한줄기 파도가 되어 순순히 바다의 율동으로 잦아들었다.(50)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52)

 

 

<오냐,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란다.> 내가 대꾸했죠. <저는 제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살고 있군요.>자, 누가 맞을까요, 두목?.....

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같은 봉우리에 이를 수도 있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53)

 

 

 

우리는 영혼이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다니는 육체라는 이름의 짐승을 실컷 먹이고 마른 목은 포도주로 축여 주었다. 음식은 곧 피로 변했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 보였다.......조르바의 눈은 끊임없이 구르고 있었고, 온 세상을 끌어 안고 싶다는 듯이 팔을 벌렸다.(56)

 

 

 

세상만사에는 숨은 뜻이 있으려니 싶었다. 사람, 동물, 나무, 별은 모두가 상형 문자, 그 상형 문자를 해독하려 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사람이며 동물이며 나무며 별이라고 생각할 뿐, 이해할 나이에 이르면 때는 늦는 법....(68)

 

 

 

우리에게 버릇 들게 된 것들, 예사로 보아 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자나가는 여자를 봐도 그는 말을 멈추고 큰일이나 난 듯이 말한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묻고 또 묻는다. “....여자란 무엇인가요? 왜 이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요? 말해 보시오. 나는 저 여자란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거요. 그는 남자나, 꽃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자신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77)

 

 

 

이 세상이라는 게 조잡하고 시시껄렁한 굿판 같다. 귀한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하거나, 자라다 말거나, 쐐기풀에 치여 맥을 쓰지 못한다. 나 자신은 어떤가? 나는 깨닫고 있거니와 논리에 질식당하지 않았다. 하느님을 찬양할진저! 나는 아직도 돈키호테의 편력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기분이다.(80)

 

 

 

내 마음엔 이 바닷가에서 이루어야 할 두 가지 과업이 새겨져 있었다. 붓다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나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아직 그렇게 늦은 건 아닐 거야.”(83)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라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94)

 

 

 

영혼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정신이 되었으며, 정신은 무가 되었다..... 손가락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도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환상은 살같이 지나가며 사라졌다. 그 환상을 따라잡아야 했다.(97)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 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99)

 

 

 

원래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날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을 몽땅 가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어기적거릴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오.(101)

 

 

 

내 속에는 소리치는 악마가 한 마리 있어서 나는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면 이놈이 소리칩니다. <춤춰!> 그러면 나는 춤을 춥니다.그러면 숨통이 좀 뚫리지요.(109)

 

 

 

내 정신을 육신으로 채워야 했다. 내 육신을 정신으로 채워야 했다. 그렇게 하자면 내 내부에 도사린 두 개의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112)

 

 

 

공자 가라사대 <많은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던가. 지당한 말씀! 따라서 모든 사람에겐 그 키에 알맞은 행복이 있다는 뜻이겠네. 내 사랑하는 제자여, 스승이여, 이즈음의 내 행복도 그렇다네,

나는 내 키 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사람의 키 높이란 늘 같은 게 아니라서 말일세.(135)

 

자네는 자네가 지향하는 삶을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네는 행복할 것이네. 자네 역시 자네 키에 맞는 행복을 선택했고 지금의 자네 키는(하느님을 찬양할진저) 내 키보다 훨씬 크다네. 위대한 스승이라면 자기를 능가하는 제자를 만드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네.

나는 어떤가? 나는 이따금 내 길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다는 느낌, 내 신념은 불신의 모자이크라는 느낌 때문에 자주 혐오스럽다네. 이따금 흥정이라도 해야 할 기분이라네. 한순간을 사람답게 사는 것으로 나머지 인생을 던져 버리자는 것이지.

그러나 자네는 자네의 키를 단단히 잡고 있네. 아무리 황홀할 순간에도 자네가 설정한 목표를 잊어버리는 법을 없을 것이네.(137)

 

 

 

나는 외롭지 않다..... 낮의 날빛이 강한 힘으로 나와 더불어 싸우고 있다..... 햇빛도 때로는 패배하고 때로는 승리한다.... 햇빛은 절망하지 않는다... 나는 싸우고 햇빛과 함께하기를 희망한다.(169)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안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177)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는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180)

 

 

 

순수시! 인생의 한 방울의 피도 방해할 수 없는 밝고 투명한 놀음이 되어 있었다.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좇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198)

 

 

 

나는 놀랐다. “붓다가 그 최후의 인간이다!” 나는 부르짖었다.

이것이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다. 붓다에겐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이 있다. 붓다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 자신이 바로 공이다. “네 육신을 비워라, 네 정신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나는 외친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서 물은 흐르지 않고 풀은 자라지 않으며 아기는 태어나지 않는다.(198)

 

 

 

경고해 두거니와 내가 이 땅을 <떠나>더라도 자네는 어디에 있건 두려워하지 말게.(211)

 

 

많은 사람들이 천당을 믿고 거기에다 나귀 한 마리씩 붙잡아 매고 삽디다. 내겐 나귀도 없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자유롭답니다.

내 나귀가 거꾸러져 죽을 지옥도 나는 두렵지 않아요. 천당도 바라지 않아요. 기껏해야 클로버나 잔뜩 뜯어 먹는 정도겠지요.

(....)

많은 사람이 허무를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허무를 극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렵게 생각했지만 내겐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나는 좋다고 기뻐하지도, 안 됐다고 실망하지도 않아요.(213)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 조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 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두목, 이따금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가를 당신에게 보여 주는 대목이겠는데)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217)

 

 

 

나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224)

 

 

 

조르바와이 만남은 외부 사건의 수학적인 연속도, 내부의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결이 고운, 따뜻한 모래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 손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모래를 감촉할 수 있었다.(228)

 

 

 

나는 인간의 고통에 따뜻하게, 그리고 가까이 밀착해 있는 이들을 존경했다.(239)

 

 

 

나는 순간순간이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254)

 

 

 

 

 

 

나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행복했다. 나는 옷을 벗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신이 난 파도가 저희들끼리 희롱하고 있어서 나는 파도를 희롱했다. 물에서 지친 나는 물에서 나와 밤바람에 몸을 말렸다.

그러고는 대단한 위험에서 탈출했다는 기쁨, 아직도 나는 어머니 대지의 가슴에 꼭 안겨 있다는 기분으로 성큼성큼 그곳을 떠났다.(256)

 

 

 

마음 한번 먹었으면 밀고 나가라, 후회도 주저도 말고, 고삐는 젊음에게 주어라, 다시 오지 않을 젊음에게, 네가 너를 잃지 않는 순간은 네가 이기는 순간!(263)

 

 

 

위대한 금욕주의자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가르친다.

“자기 자신 안에 행복의 근원을 가지 않은 자에게 화 있을진지!”

“남을 즐겁게 하려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금생과 내생이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266)

 

 

 

이들은 정신을 한 가지, 똑같은 것에만 집중시켜 기적을 일으켜요! 조르바, 돋보기로 태양 광선을 한 곳에다 집중시키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시지요?

그곳엔 불이 붙지 않아요? 왜? 태양열이 분산되지 않고 바로 그 지점에만 모이거든. 우리들의 정신도 이와 같아요. 정신을 한 곳, 오직 한 곳에만 집중시키면 당신도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어요.(268)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리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 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324)

 

 

 

내 조국으로부터 구제받고, 신부들로부터 구제받고, 돈으로부터 구제받았습니다.

나는 짐을 덜기 시작했습니다. 있는 족족 덜어 버린 겁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짐을 덜었습니다.

자, 이런 걸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해탈의 길을 찾은 겁니다.

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328)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331)

 

 

나는 하늘의 별들이 위치를 바꾸어 가는 것을 구경했다. 내 머리 위의 별이 움직였다. 내 머리통도 천문대 돔처럼 별자리에 따라 움직였다.

“그대도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라. 함께 따라 도는 것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 한마디가 내 가슴속에서 조화로운 울림을 지어 내었다.(335)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맛을 보고 먹을 만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 봅니다. 잎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소리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 (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리에서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봅니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지요.

멀리서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우리 잎으로 수액을 빨아올리는 걸 감지합니다.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끔직한 나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도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

조르바, 그 순간에 위험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 아찔해지거나 정신을 잃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용기를 북돋워 줄 해답을 찾으려다가 <하느님!>하고 소리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잎사귀 가장자리에서 다시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용감하게 <나는 저게 좋아> 하고 말았지요.(389)

 

 

 

저항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필연을 극복하여 외부적 법칙을 영혼의 내부적 법칙으로 환치시키고 존재하는 것을 깡그리 부정하고 자기 정신의 법칙에 따른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긍지에 찬 돈키호테적 반동이 아닐까! 이것은 결국 자연의 비인간적인 법칙을 반대하고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우수하고 도덕적인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행위가 아닐까?(391)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한 부류는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지요. 이 사람들은 인간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선행을 독려하지요.

마지막 부류는 전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인데,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휘말려 들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오. 글쎄, 무슨 싸움일까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401)

 

 

 

 

재수 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는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만사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험한 길, 신성한 길을 따르다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에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거리다 보면 아무 도전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428)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을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거요”(432)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433)

 

 

 

이를 악물어라, 사랑하는 이여,

그대 영혼이 날아가지 않도록(442)

 

 

 

“천국에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리고 하느님 만나시거든, 제가 인간이 이렇듯이 죄악과 악마에 시달리는 것은 하느님 탓이라고 하더라고 전해 주세요. 하느님이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만든 탓이라고요.”(457)

 

 

 

Den elpizo tipota, Den fovumai tipota, Eimai eleftheros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484)

 

 

-http://lala1123.tistory.com/15의 서평

 

 

‘박웅현’ 씨의 ‘책은 도끼다’를 읽을 때였습니다.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소개해주고 있었는데요. 참으로 눈에 띄는 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여자의 음모로 베개를 만들고 다닐 정도로 농탕한 사내’ 라고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고놈 참. 웃기게도 그 구절 하나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작자이기에?!’, 이 궁금증 하나를 가지고 말이죠. 저의 이 괴기스러운 책 선택 과정만큼 소설 속 ‘나’와 ‘조르바’의 만남도 괴기스럽습니다.

 

“여행하시오?”

“크레타로 가는 길입니다. 왜 묻습니까?”

“날 데려가시겠소?”

“왜요?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서요?”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요리사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들어 보지도 못한 수프, 생각해 보지도 못한 수프를 만들 줄 압니다.”(17)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공갈 비슷한 태도와 격렬한 말투가 우선 마음에 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다짜고짜 들어와서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합니다. 우리가 이 상황에 놓였다면 한번쯤 생각해 봤음직한 질문들, 예를 들어 ‘왜 내가 이 사람과 같이 여행을 해야 하는가?’, ‘이 사람과 같이 가도 괜찮을 것인가?’ 따위의 질문들을 그 사람은 답답해하며 눈 질끈 감고 그냥 결정해버리라고 합니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하여튼 주인공은 이 첫 대면이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게 그 둘은 크레타를 가서 같이 ‘갈탄광 사업’을 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들도 이제는 이 ‘조르바’라는 사람이 조금은 궁금해지셨을 겁니다. 음탕하기도 하고 부끄럼도 없는 것 같은 이 철면피의 사내 ‘조르바’란 도대체 누구인가? 앞의 내용만 보면 대한민국 정서상(?)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책 속의 ‘조르바’에게는 배울 점이 참 많았습니다.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에게 울림을 준 4명의 인물 중에 ‘조르바’를 꼽았을 정도이니까요(소설 속 ‘알렉시스 조르바‘는 실존인물인 ‘기오르고스 조르바‘를 모델로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조르바의 말에 감명을 받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이를 소개하기 위한 리뷰를 쓰기 위해 조르바를 뭔가 한 단어로 압축하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정말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구지 한 단어를 고른다면 조르바가 소설 속에서 외친 ’인간은 자유라는 거지!‘의 ’자유‘ 정도로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단어조차도 조르바를 나타내기에는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것 같습니다.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문학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는 사나이였다.’(22)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는 사나이, 자유 그 자체인 사나이 조르바! 그의 입담을 몇몇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통해 듣는 것보다는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 조르바를 이해하는 데에는 훨씬 더 나을 듯합니다.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되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조르바?”

“이런, 모르시는군.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게 정열이라는 것이지요.(21)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24)

 

 

 

“우리 현명한 솔로몬이여, 죄 많은 백면서생이여! 세상 잡사 꼬치꼬치 따지지 맙시다! 예수님이 태어났어요, 안 났어요? 물론 태어나셨지. 그런데 왜 멍청하게 앉아 있어요?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언젠가 기술자 하나가 가르쳐 줍디다)물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디다. 보고는 못 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173)

 

 

 

아마 잣대를 들이대면 하지 못할(하지만 해야 하는!) 무수한 일들이 있을 겁니다. 조르바는 이왕 할꺼 뭘 그렇게 묻고 따지고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들어 상대방을 녹다운 시키는 '조르바'의 말들이 많은데요. 굉장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우화가 갖는 설득의 힘이 아마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직접적인 말보다는 훨씬 더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요.

 

 

그의 말에서도 많은 감동을 받지만, 우리는 ‘조르바의 시선‘, 세상을 바라보는 ’조르바의 눈‘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가 포스팅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제가 ‘조르바의 눈’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점은 아마 이만큼 ‘창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이템 이름(?) 같기도 한 ‘조르바의 눈’을 한번 감상해보세요.

 

 

우리에게 버릇 들게 된 것들, 예사로 보아 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지나가는 여자를 봐도 그는 말을 멈추고 큰일이나 난 듯이 말한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묻고 또 묻는다. ‘여자란 무엇인가요? 왜 이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요? 말해보시오, 나는 저 여자란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거요.’

 

그는 남자나, 꽃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자신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

“두목 이 빨간 물이 대체 뭐요? 말해 봐요. 늙은 가지에 새 가지가 뻗으면 처음엔 아무것도 없지요. 그리고 거기 처음에 달리는 건 쓰디쓴 열매뿐이지요. 시간이 지나고 태양이 열매를 익히면 마침내 꿀처럼 달콤한 물건이 되지요. 이게 포도라고 하는 겁니다. 이 포도를 짓이겨, 우리가 술고래 성 요한의 날 열어보면, 아! 포도주가 되어 있지 뭡니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빨간 물을 마시면, 오, 보라, 간덩이가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하느님께 시비를 겁니다. 두목, 말해 봐요.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이 다시 태초의 신선한 활기를 되찾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지겨운 일상사가 우리가 하느님의 손길을 떠나던 최초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었다. 물, 여자, 별, 빵이 신비스러운 원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태초의 회오리바람이 다시 한 번 대기를 휘젓는 것이었다.(77)

 

 

사면을 내려가면서 조르바가 돌멩이를 걷어차자 돌멩이는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조르바는 그런 놀라운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를 돌아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에서 가벼운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두목, 봤어요?”,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놀랍고도 기뻤다.(아무렴. 무른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태초에 이 땅에 나타났던 사람들의 경우처럼, 조르바에게 우주는 진하고 강력한 환상이었다. 별은 그의 머리 위를 미끄러져 갔고 바다는 그의 관자놀이에서 부서졌다. 그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198)

 

 

 

태초의 인간, 갓난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조르바'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우니 세상도 즐거울 수밖에요. 태초의 인간이 돌, 물, 불, 생물 따위의 것들을 보고 공포와 한편으론 호기심을 느꼈듯이,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도 의식적으로 놓치고 있던 것들에 관심을 가지려 노력한다면 보이지 않았던 의외의 것들이 조금씩 말을 걸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태초의 원시적인 감정을 그렇게 조금씩 회복해 나갈 것입니다. 세상은 즐겁고 보이는 것은 많으니 그런 최적의 조건 속에서 ‘창의력‘이란 식물은 무럭무럭 자라지 않겠습니까?

창의력. 몇 번을 포스팅 해봤지만 항상 답은 하나로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즐거움] 어쨌든 간에 내가 느끼는 세상이 즐거워야 하는 겁니다. 세상이 비누냄새 풀풀 나도록 싱그러워 보여야 되는 겁니다. [관찰] 그런 세상을 넋 놓고 바라볼 때 창의력은 제게 노크를 하고 들어올 테구요.

 

참 많은 인용이 들어갔고, 저 조차도 횡설수설한 포스팅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소개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할 말도 많은 포스팅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한번 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식도 나눠 먹으면 맛있다고 좋은 책도 같이 읽으면 좋잖아요. 하하.

 

-알라딘서재의 서평

 

제목은 익숙하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책들 중 상당수가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이다. 각종 단체에서 선정한 교양도서 목록이나 추천도서 목록에 꼭 실리는 책들이 있긴 한데 그런 책들을 일부러 찾아보긴 맘처럼 쉽지 않다.

이 책도 그런 책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는데 도대체 조르바가 누구길래 하는 호기심이 늘 있었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던 중 읽을 신간이 떨어지는 바람에 가까스로 나의 선택을 받았다.

조르바라는 인물은 한 마디로 자유의 화신이라 할 수 있었다. 책이나 영화 등에서 자유로운 영혼들을 많이 봐 왔지만 조르바는 거의 최상급이라 하겠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살기가 정말 어려운데 조르바는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산다. 물론 그런 모습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선 다른 생각들이 존재할 수 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만큼 지켜야 할 것들이 있고, 싫어도 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이니 관습이니 하는 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다면 세상의 비난 속에 매장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조르바는 세상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행보를 보인다. 특히 그의 자유분방한 여성편력은 부러울 지경이다. 흔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구속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르바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였다.

단 하룻밤의 관계로 끝날지라도 자신의 몸과 맘을 다해 사랑하는 그의 쿨한(?) 연애관은 카사노바도 울고 가겠지만 오히려 더 진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사랑하는 여자에게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어쩌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조르바를 고용하는 화자인 나는 조르바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이성적이고 항상 책을 중시하는 나의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은 누구를 모습을 보는 듯했다.ㅋ

자유분방한 조르바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조금씩 조르바를 닮아가는 나의 모습은 세상의 눈에만 신경 쓰고 자기 마음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책 속의 죽은(?) 지식만 열심히 찾으려하지만 조르바의 경험에서 우러난 삶의 지혜에는 결코 당할 수가 없다.

그게 바로 지식과 지혜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종교도 국가도 초월한 조르바의 모습은 존 레논이 'imagine'에서 노래한 바로 그 세상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책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사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사실 나도 내 맘에 충실하게 살지 못한 편인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매달리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며 시간을 낭비하다 보니 삶의 만족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다. 'Carpe diem'을 너무나 잘 실천하는 조르바의 모습을 보면서 나 스스로 만들어낸 여러 가지 구속과 굴레에서 벗어나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동안 완전무장 했던 마음의 갑옷을 무장해제 시키고 상처받고 상처 주는 걸 두려워하지 않도록 마음의 근력운동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조르바급의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http://blog.daum.net/hy2oxy/8690295의 서평

 

"그거 주인공이 완전 마초야!" 새해 들어 두 번째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친구 하나가 꺼낸 말이다. 물론 그 친구는 그렇게 애기한 후에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카잔차키스의 다른 책 몇 권까지 더 소개해 주었고...

 

 

이 책은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소개한 열 입곱번째 것이다. 법정스님이 추천도서 50권은 '닥치고' 읽기로 마음 억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을 뇌 한 구석에 담아두고 계속 읽었다.

스님은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이 책을 소개하면서 조르바의 말을 인용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 낸 게 도대체 무엇이오?" 조르바의 이 질문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질문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읽고 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 낸 게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낱 종이벌레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그리스의 역사와 저자의 삶에 대해 먼저 알아야했다. 작품 자체가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하여 구성된 것이고 작 중 주인공인 '조르바' 역시 실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르바'에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카잔차키스는 1883년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크레타는 터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크레타 사람들이 터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르는 중에 그가 성장한 것이다. 크레타의 신들을 길로 낸 그리스 신화의 보금자리가. 욕심 많고 거짓말 잘하고 난폭하고 거칠기로 소문 난 크fp타인들의 섬인 것이다. '평화시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광란의 불길에 쌓이게 한다'는 섬... 카잔차키스의 크레타섬은 "한 번 부르면 가슴이 뛰고 두 번 부르면 코끝이 뜨거워지는 이름... 기적이나. 내가 크레타 사람이라는 것은..."인 것이다. 그는 조국 그리스를 축으로 74년의 생애를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일본, 팔레스타인, 이집트 땅을 눕고 다녔다고 한다.

역자인 이윤기는 카잔차키스의 삶을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만을 읽어 본 나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카잔차키스는 1917년 그의 나이 34세 때 조르바를 만났다. 전쟁으로 석탄 연료가 부족해지자 조르바라는 일꾼을 고용하여 펠로폰네소스에서 갈탄을 캐려고 시도했다, 이 경험은 1915년 벌목 계획과 결합되어 뒷날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발전된 것이라 한다.

 

 

소설은 광산사업을 하러 크레섬으로 떠나는 배를 그리스 본토의 어떤 항구애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공부하고 글쓰며 영혼의 구원을 찾는 사람이다. 절찬한 친구가 카프카스에서 위험에 처한 그리스 동포들을 구하러 가자고 했을 때 그는 주저했다. 친구는 그에게 "안녕! 책벌레야!"하며 떠났다. 그는 원고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갈탄광으로 향한 것이다. 책벌레 족속과 거리를 두고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선착장 근처 술집에서 주인공은 조르바를 처음 만난다. 술집 안에서 조르바와 대화를 나누던 중 주인공은 산투르(그리스의 전통 악기)애 대한 조르바의 말을 듣고 조르바를 일꾼으로 고용하려고 마음먹는다.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을 보고 철자법 배우겠다는 생각은 당신도 안 하시겠지? 물래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인간의 이성이란 그거지 뭐.." "산투르를 다룰 줄 알개 되면서 나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르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되니까..." "산투르를 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해요.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거에요. 마누라가 한 마디로 될 것을 열마디 잔소리로 늘어놓는다면 무슨 기분으로 산투르를 치겠소?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끽끽거리는데 산투르를 어떻게 치겠소? 산투르를 치려면 온갖 정성을 산투르에만 쏟아야 해요. 알아듣겠어요?"

 

주인공은 조르바의 애기를 듣고 그를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라고 느꼈다. (이 부분도 공감하기 어렵다. 내가 좀체로 주인공의 입장과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소설은 주인공과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 들어가 여관에 자리를 잡고 인부들을 불러 갈탄광애서 석탄을 캐는 과정을 기본 구조로 서술된다. 주인공이 조르바와 함께 지내면서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면서 조르바의 말과 행동에서 조금씩 영향을 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르바는 낮에는 일꾼들을 데리고 탄광에서 죽으라고 일하면서 주인공은 여관에 머물게 한다. 조르바는 여관 도착 첫날부터 여관의 주인 여자와 눈이 맞아 사귀게(?) 되고 주인공은 과부를 두고 마음 속으로 갈등을 거듭한다. 과부를 짝사랑 하던 마을 지주의 아들이 자살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성을 잃고 과부를 때려죽인다. 조르바는 석탄을 캐고 이동시키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철탑과 캐이블을 구사,설치하였으나 처음 시범운영하는 날 실패하고 만다. 두 사람은 탄광사업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날 밤 함깨 해방의 춤을 춘다. 실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와 헤어진 후 그리스의 장관을 역임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을 진행했다.

 

 

주인공은 조르바와 함께한 몇 개월 동안 조르바를 통해 것들을 느끼고 배우고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조르바는 본능에 충실하고 말보다는 몸짓에 익숙한 사람이다. 질그릇을 만들려고 물레를 돌리는데, 새끼손가락이 거슬린다고 도끼로 잘라 버렸다. 주인공은 조르바에게서 열정과 자유를 발견하였다. 조르바가 내뱉는 말은 조르바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주인공의 이제까지의 인생을 깡그리 씻어 내고 조르바에게서 배운 것들로 다시 채우기를 소망한다.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 땐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요? 허리띠를 플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물애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니다. 보고는 못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일러 드릴리다."

"....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씌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역자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과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노른자위 개념이자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성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매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이는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라고 한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게 물리적 변화이고 포도즙애 포도주가 되는 게 화학적 변화라면,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성체)'가 되는 것, 그것이 '매토이소노'라고... 역자는 조르바가 사업채 하나를 '춤‘으로 변화시킨 것도 '매토이소노'라고 설명한다.

 

 

 

친구가 애기한 '마초'의 전형 같은 조르바, 그리고 법정스님의 화두... 어쩌면 20세기 초의 그리스에서는 마초처럼 '책벌레'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책을 덮고 나니 나 역시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지금 종이벌레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몇 년 전부터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에게 가장 친숙하고 가까운 것은 책... 나는 이들 책 속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 혹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결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혹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은 아닐지...

 

 

친구가 애기한 '마초'의 전형 같은 조르바, 그리고 법정스님의 화두... 어쩌면 20세기 초의 그리스에서는 마초처럼 '책벌레'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카잔차키스에게 쏟아지는 찬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