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강 | 시작은 울림이다 |
2강 |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
3강 |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통찰 |
4강 | 고은의 낭만에 취하다 |
5강 |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
6강 |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7강 | 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주리니, 안나 카레니나 |
8강 |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
본서는 광고전문가 박웅현이 인문학 책읽기에 대한 그의 강의를 모아 놓은 인문학 강독서다. 빨강 파랑 검정 플러스펜과 노랑 파랑 형광펜에 연필까지 동원했다. 통독을 하고 1, 2, 4, 8의 네 강은 두 번 정독했다. 인문학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첫 페이지부터 색깔별로 밑줄을 긋고 색을 칠하기에 바빴다. 밑줄 긋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저자와의 교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라 생각한다. 마치 저자와 둘이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광고의 창의력에 쉬운 해설을 가미해 어렵지 않게 책장이 넘어갔다. 며칠 밤을 꼴딱 새워 눈은 충혈되었지만 마음은 초록색이다. 내가 밤을 새워 읽었던 많지 않은 책들 중 리스트에 오른 <책은 도끼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았고, 무겁지만 무겁지 않았다. 마음치유에 버금가는 언어치유의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저자의 일방적 주장보다는 찻집에서 함께 대화하고 이야기하는 부드러운 접근방식이 돋보였다.
인문학은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을 통칭한다. 따라서 좀 딱딱하고 지루한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사람을 향합니다> <생각이 에너지다>, 던킨도너츠 <커피 앤 도넛>, SK텔레콤 <생활의 중심>과 같은 친숙한 광고카피로 광고업계에서는 소위 꽤 잘 나가고 있다. 광고와 인문학을 적절히 결합한 소재의 참신성에 놀랐고, 도서관 책꽂이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인문학을 나 같은 속세의 대중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데 박수를 보낸다. 각 강의 모두 분량보다는 깊이가 있는 주제들이다. 여기서는 총 8강 중 1, 2, 4, 8강 네 강만을 선택했다. 나머지 네 강은 주제의 깊이와 울림이 크고 다양하여 생략했다.
내가 읽은 책들은 나의 도끼였다.
나의 얼어붙은 감성을 깨트리고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도끼, 도끼자국들은 내 머릿속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어찌 잊겠는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쩌렁쩌렁 울리던, 그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얼음이 깨진 곳에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신록에 몸을 떨었고, 빗방울의 연주에 흥이 났다.
남들의 행동에 좀 더 관대해졌고, 늘어나는 주름살이 편안해졌다.
머릿속 도끼질의 흔적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저자의 말, '울림의 공유' 중에서)
1강 |
시작은 울림이다 |
멋진 글이라 손으로 베껴 써봤다.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이십사 년간 만들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인문학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책이 있었다. 물론 그림, 음악, 영화 등에서도 분명 많은 영감을 얻고 영향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중에서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기에 책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13)
저자는 광고업계에서는 물론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란 책으로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광고에 인문학이 필수라고 생각하며, 최고의 소통 도구로 책을 꼽았다. 자기계발도 마찬가지다. 자기계발은 기법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지혜는 인문학에서 나온다. 자기계발의 시작과 끝은 인문학이다.
저는 여느 독서가들과 비교했을 때 독서량이 평균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매번 읽은 책들을 메모해놓는데, 통계를 내면 일 년에 읽는 책이 서른 권에서 마흔 권 사이다. 한 달에 세 권 읽는 건데 독서량이 많은 건 절대 아니다. 대신 저는 책을 깊이 읽는 편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 읽는다.... 우선 저는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들, 감동받은 부분들에 줄을 치고, 한 권의 책읽기가 끝나면 따로 옮겨 놓는 작업을 한다. (14)
놀랍다.
일 년에 겨우 마흔 권 정도의 독서량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수많은 광고카피를 창작해 낸다는 사실이 놀랍다. 창의력과 지혜는 다독이 아니라 정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독서량 부족을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는 정독을 통해 보완해 나가는 것이다. 넓이보다는 깊이에 치중하는 전략이다. 지혜의 창고 인문학의 경우엔 저자의 말처럼 한 문장 한 문장 꼭꼭 눌러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지혜보다는 지식 측면이 강한 경영, 경제와 같은 분야는 다독하는 것이 올바른 독서법이라 생각한다. 신윤복 교수는 "첫 번째는 내용(text)을 읽고, 두 번째는 저자를 읽고, 세 번째는 나를 읽는다."라는 '독서3讀'을 강조했다. 세 번째의 경지에 올라야 비로소 인문학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파도타기를 해보진 않았지만, 책 읽기는 파도타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책은 찍어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은 흘려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은 문맥으로 읽어야 하는데, 그게 안 잡히면 책이 재미없다. (14)
저자는 파도타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물만 먹게 되는 것처럼 책읽기도 잘못하면 헛수고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책읽기에 왕도는 없다.
그러나 정도는 있다.
무협소설과 자기계발서 그리고 철학책은 읽는 속도와 깊이가 달라야 한다.
나는 책읽기가 등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쉬면서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 가파른 산 능선을 오르면 땀을 흘리듯 몰입해서 읽어야 하는 책,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모양은 같지만 깊이나 속도는 책마다 다르다.
....어느 날 동료의 책상 위에 있는 이철수의 <산벚나무 꽃피었는데>의 책장을 무심히 넘겼는데 순간 몇몇 페이지에서는 눈, 아니 마음이 멎었다. 기막히게 청각을 시각화 해내는 표현들, 내가 그동안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세심한 시선들이 단박에 저를 사로잡았다.
처음 소개할 작품은 <마음, 쏟아지는구나!>라는 작품인데요. 화면 하단을 채운 대나무 숲에서 수많은 점들이 여백으로 날아올라간다. 여백은 하늘이고 점은 새들이다. 빈공간인데 하늘로 보이고, 그냥 찍어둔 듯한 점인데 새들로 보인다. (17)
어떻게 그림이 그려지는가?
상상이 되는가?
새들이 대나무 숲을 박차고 군무하는 모습이 느껴지는가?
실제 판화를 보여드릴 수 없어 안타깝지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면 마음을 모아 다시 한 번 읽어보았으면 한다. 생텍쥐베리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이는 법이다.
1년 전 고교 동창회 모임에서 증권사에 근무하는 친구가 '강력추천'해 준 사람이 판화가 이철수였다. 그날 이후 난 이철수의 인터넷 집인 '이철수의 집(www.mokpan.com)'을 뻔질나게 들락거리고 있다. '이철수의 집'에서는 지금까지 매일 저의 메일로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를 보내주고 있다. 두 손 모아 감사드리고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한다. 아무런 노력 없이 더러워진 마음을 정화하고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깊이 있는 지혜를 판화를 통해 만날 수 있어 참 좋다. 최근 메일로 받은 작품 중 두 가지를 소개한다.
1. 2012.03.29. 받는 작품 : <봄이 와서 기다리고 서있는>
"작업실 책상머리에 일도 바쁘지만 봄이 와서 기다리고 서있는 밭일도 못지 않습니다. 일이 바빠도 사람에게는 사정도 해보고 일을 미루기도 합니다......하지만 자연과 계절이야 어디 그런가요. 바깥에 있는 봄이 반가우면 서둘러 나가서 봄을 맞아야지요...."라는 말은 인간사 일보다 자연사 일이 먼저요 그것이 순리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연은 변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존재다. 계절의 변화는 있지만 이치의 변화는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에게 편법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연에게 지름길이란 말은 가당치 않다. 자연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꽃이 빨리 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자연을 하대하는 일이다. 자연은 자연이다. 인간은 인간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은 불합일이다. 인간들은 말한다. "자연과의 공존이 중요하다."고. 자연은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 공존은 대등하다는 말이다. 자연은 결코 인간보다 열위에 있지 않다. 자연은 지혜요 인간은 지식이다. 그래서 둘은 다르다. 같기 위해 발버둥을 칠 뿐.
2. 2012.01.19. 받은 작품 : <제 손을 물끄러미>
한 해 돌아보기도 참 힘들었습니다.
높은데 올라가 몸을 던지고 마는 사람들 소식도 적지 않았지만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사람들은 사회 도처에 있었습니다.
누가 떠밀었나요?
누가 떠밀었지요?
내 손도 의심해 봐야 하지 싶습니다.
그래서, 제 손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판화가 이철수처럼 나 역시 손톱 밑에 가시가 들어간 것 마냥 마음이 콕콕 아리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심리학자들의 말에 동의, 제청을 한다. 글을 쓰다 문득 내 손을 본다. 나도 혹시 이 손으로 누군가를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는지, 지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았는지,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아 반성한다. 전 세계 자살률 1위는 리투아니아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다. 2010년 기준 하루 평균 42.6명, 1년이면 15,000명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이다. 이 땅 그 누군들 한 순간 뛰어내리고 싶은 때가 없었겠는가?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자. 그게 삶에 대한 도리요, 예의다.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떨어진 놈! (22)
저자의 의견처럼 자연현상이 인간사로 넘어오게 하는 글이다. 글을 읽고 현기증이 나지 않는다면 참 곤란한 일이다. 마음이 덜 일어서.
덜 익은 년/놈일수록 속이 좁다. 계속해서 이철수의 작품을 더 보자. 판화 그림을 보여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22)
"우와!"하고 탄성을 질러도 좋다. 그럴만하니까. 그러나 탄성만 지르고 그냥 스쳐간다면 그것이야말로 탄성을 지를 일이다. 앞서 언급한 '독서3독' 중 첫 단계인 '텍스트'를 읽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글은 마음을 모아 모아서 꼭꼭 눌러 읽어야 하는 구절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만유인력이라고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는 것은 서양식 해석법이다. 그러나 때가 되어 사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자연을 아우르는 동양식 해석법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고 어려운 사실을 쉽게 쓰는 것이 곧 창의력이다. 모든 역사는 일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과가 뉴턴에게만 떨어진 것은 아니다.
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벼와 한 논에 살게 된 것을 이유로
'잡'이라 부르기 미안하다 (23)
이철수의 작품 <이쁘기만 한데...>의 전문이다. 무릎을 치고 콧노래가 나온다. 사소한 일상을 위대한 자연으로 바꾸어 놓았다. 경남 합천 가야산 자락에서 어린 시절을 난 나는 농사철이 되면 벼논에서 잡초를 뽑는 것이 학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그땐 잡초를 많이 때렸다. 욕도 했다. '뭐 이딴 놈이 논에 있냐!'고. 33년 전 여름 어느 날, 경남 합천군 가야면 535번지 논 오른쪽 끝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잡초야, 미안하다. 늦었지만 사과한다.
역지사지, 잡초 입장에서 보면 잡초는 잡초가 아니라 벼가 잡초다. 관점을 바꾸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나훈아는 <잡초>를 이렇게 노래했다.
"한 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 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잡초가 들으면 기분 엄청 나쁘겠다. 큰일 났다. 나훈아도 빨리 잡초한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꽃이 안 피어도 꽃은 꽃이다. 단지 향기가 없다고 잡초로 분류되는 것은 억울하다. 아무것도 없어서 잡초가 아니다. 이름이 없어 잡초라 불릴 뿐이다. 잡초야!
계속해서 다른 작품 <작은 선물>을 보자.
꽃 보내고 보니
놓고 가신
작은 선물
향기로운
열매 (24)
감탄사는 이럴 때 써먹어라고 있는거다.
촌놈인 나는 수십 년간 지천에 깔린 꽃과 열매를 보고 또 봐도 '꽃은 꽃이요 열매는 열매다.'라는 이분법적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캬~~'는 맥주마실 때만 하는 말이 아니다.
꽃의 선물이 열매라는 의미인데 참 옳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어떤 선물을 남기고 가실텐가.
이철수의 다음 작품은 <감은사지에서 듣는다>라는 삼층석탑이 그려져 있는 판화다.
어찌 오셨는가?
방금들 많이 다녀가셨지....
흔하게 많이 오는 그 사람이신가? (26)
탑은 묻는다.
당신의 정체를 말이다. 탑을 보러 가는 사람들은 초행이지만 천 년 넘게 그 자리에 역사의 흔적처럼 서 있는 감은사지 석탑 입장에서 보면 지겨울 만도 하겠다. 주구장창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말을 섞는 사람들이 탑 앞에 서서 사진 한 장 찍고 '나 왔다 가노라'를 외치고 사라진다. 사진 찍는 포즈도 비슷하다. 'V자 아니면 김~치'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말한다. "탑 앞에서 5분만 나를 봐 달라."고. 그것이 탑과의 교감이고 소통이다. 침묵이 바로 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탑과 대화하는 길이다. 조만간 내 탑보러 가리다. 사진 안찍고 바라만보고 오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갈 터이다.
성이 난 채 길을 가다가,
작은 풀잎들이 추위 속에서 기꺼이 바람맞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두고 마음 풀었습니다.
-<길에서> (28)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 수 있는데 불행히도 하루 종일 비가 올 때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비오는 날이 종종 있다. 볕이 쬐는 날을 위해 비오는 날에도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작은 풀잎들이 추위 속에서 얼마나 힘들겠는가. 작은 풀잎처럼 힘들 땐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참이다. 식물에게서, 동물에게서, 자연에게서 배우지 못한다면 그 삶의 호흡은 가빠진다.
"나의 불행이 남을 위로하는 일보다, 남의 불행이 나를 위로하는 일이 더 많았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속 좁은 자의 전형이다. 남의 불행으로 나의 불행을 위로받고 물타기 했다는 것이다.
이철수의 판화집 다음으로 펼쳤으면 하는 책이 있다면 최인훈의 <광장>이다. 이철수가 그림과 텍스트를 함께 두고 단 한 줄로 충격을 주었다면, 최인훈은 산문 곳곳에 운문처럼 배치한 문장들로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
삶은 실수할 적마다 패를 하나씩 빼앗기는 놀이다 (31)
저자는 여기서 "삶에서 실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줄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실수로 인해 하나의 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난 견해를 조금 달리한다. 물론 실수가 없으면 좋겠지만 실수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실수할 때마다 인생의 다른 패를 경험하는 긍정적인 도전의 결과라 생각한다. 이 경험들이 모여 삶이 되고 성공이 되고 피와 살이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지금 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라고 했다. 물론 이 말에 토를 달 순 없지만 지금의 불행이 과거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지혜로운 인격체로 만들기 위한 신의 시험지라 생각한다. 실수는 실패가 아니다. 도전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실수이자 실패다.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32)
최인훈의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언어의 마술에 빨려들었다. 사랑은 본디 무형으로 존재했던 것인데 그것을 유형화하여 보고 만지려는 인간의 욕심이 몸둥아리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 참 기발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입과 항문이다.
나머지는 다 부속기관이다 (32)
김훈의 이 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주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이라 생각한다. 몸이 먼저니 마음이 먼저니, 닭이 먼저니 계란이 먼저니 해도 결국 따지고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원초적인 것이 이긴다. 목숨에 관계된 것이라 그렇다. 이 말은 곧 마음이니, 정신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건전한 육신에서 나온다는 의미로 느꼈다. 같은 인간에 대한 표현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상반된 표현이다. 그래서 더 멋지다. 상극의 끝에 합이 있으니 말이다.
저자가 1강 마지막으로 소개한 책은 아동문학가인 고 이오덕의 <나도 쓸모 있을걸>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이오덕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읽은 아이들의 시를 모아놓은 것이다. 전부 초등학생들의 시다. 읽어보시면 정말 재미있다. 이 책 속의 아이들은 창의적인 일이나,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스승이다. 보시죠? 여기 나오는 아이들을 시를 읽고 침묵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 그냥 인간이다.
엄마, 엄마,
내가 파리를 잡을라 항깨
파리가 자꾸 빌고 있어
'오 마이 갓'의 연발이다. 상상이 상상을 초월한다.
사회화되고 철 든 어른들에게 이런 풋풋하고 말랑말랑한 머리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혹시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파리채로 잡아라."고. 그건 넘 잔인한 짓이다.
아이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시켜선 '아니, 아니, 아니되오.
' 말랑말랑한 머리가 딱딱해지는 지름길이다.
신은 장사다
사람을 든다 (36)
신은 하늘 신이 아니라 신발을 의미한다.
이 10 글자에 나의 몸과 마음은 10분간 차렷 자세를 했다. '이야, 그 놈 참'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다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멋진글이라고 소개하면서. 고맙다고 답장 온 친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부질없는 짓을 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역시나가 혹시나가 되는 것은 개가 고양이가 되는 것과 같다. 저녁 퇴근길에 전화 온 친구에게 메시지 봤냐고 했더니 친구 왈, "아주 지랄을 한다. 꿈 깨라...."
일년 열두 달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신고 다니는 신발... 고맙다 신발. 사람을 들고 다니려니 얼마나 힘들겠냐. 밥 많이 먹고 힘 내.
가다가 손님이 오면
고약한 직행은 그냥 가고요,
인정 많은 완행은 태워줘요. (37)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다.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건 힘들지 않았지만, 다시 어린 아이가 되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그나마 40년 동안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어린 아이가 되었으니 피카소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어린 아이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피카소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쳐 메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라면, 건빵이 15원 하던 시절, 차비 10원이 없어 버스가 정류장에 서는 순간 친구와 둘이서 버스 뒷 꽁무니 차량견인용 기구를 손잡이 삼아 잡고 10리 비포장길을 달리는 버스에 매달렸다. 30분을 달려 종점에 도착하면 온 몸은 하얗다.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먼지를 듬뿍 뒤집어 쓴 탓이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오싹하다. 손잡이를 놓치는 순간이 곧 죽음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위의 시처럼 당시 완행은 정류장이 별도로 있었지만 길가다 손님을 만나면 정이 많아 어디서든 태워준다. 하지만 직행은 지정된 정류장에만 섰다. 인정머리가 없는 거다. 이 시를 접하고 난 또다시 한없이 작아졌다. 그렇게 완행버스를 많이 타고 다녔어도 이런 생각은 먼 나라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이슬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눈망울
가지고 있다.
그 눈만 팔면
부자가 되는데
마음 착해서
안 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느낌이 있는 시다.
창의력이란 말은 아이들에게 더 어울리는 말 같다. 창의력 부재의 가장 큰 걸림돌은 지식과 경험인지도 모른다. 지식과 경험이 누적될수록 사고가 습관화되고 경직화된다.
우리나라 초등 영재는 부지기수다. 천재도 제법 있다. 그러나 중고교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둔재가 된다. 천재가 둔재화 되는 것이다. 사회화 탓이다.
오스트리아의 한 음악학교 이야기다. 이 학교는 음악학교인데도 어린아이들에게 악기연주를 시키지 않는 대신 얘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자연의 음들을 들려준다고 한다. 이를 테면 바닷가에 가서 자갈을 들고 큰 돌과 큰 돌이 부딪치는 소리,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들으며 얘기한다. 이렇게 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중요한데 우리는 기술만 가르치고 있으니까 요즘 교육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껌은 빳빳하지요
그러나 입속에 넣으면
사르르 녹지요
아무리 나쁜 사람도
껌과 같지요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팽개쳐버려도
누군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 주면
껌과 같이 사르르 녹겠지요
딱딱한 마음이 껌과 같이 되겠지요 (39-40)
-<책은 도끼다>, 38쪽.
終日尋春 不見春
芒鞋邊踏 壟頭雲
歸來笑撚 梅花臭
春在枝頭 己十分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으나 보지 못했네
짚신이 닿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헤맸네
지쳐 돌아오니 창 앞 매화향기 미소가 가득
봄은 이미 그 가지에 매달려 있었네. -작자미상, 중국의 옛 시 중에서,
봄이라는 단어를 행복, 사랑, 성공이라는 단어로 대체하여 읽어도 무방하다. 행복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인생은 순간의 합이다. 카르페 디엠!
민법의 처음에 나오는 법언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행복에도 법문이 있다면 이런 말이 가능할 법하다. "행복 위에 잠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권리나 행복은 주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데 단지 권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할 권리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훈련하고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마음공부 역시 누가 대신할 수 없다.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 위에 잠자는 꼴이 된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문화미와 예술미는 훈련한 만큼 보인다."고 했다. 행복도 성공도 훈련하고 공부한 만큼 보인다.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 제가 좋아하는 말이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은 깊이 보고 듣는 것이다.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그저 지겹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청을 하는 것이고, 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 건 견문이 되는 것이다. <모나리자> 앞에서 '얼른 사진 찍고 가자'는 시청이 된 것이고, 휘슬러 <화가의 어머니>에 얼어붙은 건 견문을 한 것이다. (49)
설악산을 그림으로 사진으로 보는 것은 시청하는 것이고, 배낭을 메고 땀흘려 산을 올랐다면 견문을 한 것이다. 지난여름, 방학을 맞이한 두 딸을 데리고 설악산 산행에 나섰다. 오색-대청봉-오색으로 이어지는 원점 회귀 당일 산행이었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산행 하루 전 오색에 도착했다. 아침이 되자 자욱한 안개 속으로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산행, 예서 그냥 돌아갈 순 없는 일... 우산을 펴고 두 발을 움직였다. 중간 중간 작은 딸이 투정을 부리기도 하 고 힘겨워하기도 했지만 헐렁하게 5시간을 걸어 대청봉에 도착했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고 안개 뿐, 옅은 해 사이로 대청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산은 4시간 걸렸다. 걱정은 소중한 경험으로 바뀌었다. 딸들은 처음 높은 산 정상을 오른 것이다. 그것도 설악산 대청봉을....그날 이후 아이들은 마음의 키가 훌쩍 커졌다. 시청은 차를 타고 사진을 찍고 '나 왔다 간다'의 흔적을 남기는 게임이라면 견문을 두 발로 꼬닥 꼬닥 걸어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의미는 비슷해도 그 근본도 태생도 감동도 모두 다르다.
눈을 감는다.
아니다. 눈을 감으면 글을 읽을 수가 없다.
눈을 뜨되 실눈을 하고 마음과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글의 주인공이 '나'라는 생각으로 찬찬히 씹으면서 읽어보라. 이 글을 읽고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대는 마음공부와 마음치유가 필요하다.
.....
한가로운 일요일 오전 11시에
고양이가 내 무릎에 앉아 잠자고 있고,
제이슨 므라즈의 음악이 들리고,
책 한 권 읽는,
그런 순간이...... (51)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순간이 몇 개가 각인되어 있느냐가 삶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행복 위에 잠자는 자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 행복 = 카르페디엠......
2강 |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중심으로 감동을 나누려고 한다.......김훈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였다. 그때부터 필명을 날리며 유명했다. 마흔일곱에 등단해 2001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타면서 대중들의 친근한 이름이 되었다.....그 전에 책 좀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알려진 것이 <자전거 여행>이었다. 이 책은 1999년부터 2년 간 전국 산천을 '풍륜'이라 이름 지은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쓴 에세이다. (56)
지금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절판이다. 인터넷에서는 중고책 값이 5만원 정도에 올라와 있는 데 실제 그 가격으로 팔리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지금은 이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김훈을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어설프게 습작을 하던 직장 동료가 여행을 좋아하는 내게 안성맞춤이라며 권했던 책이었다.
두 번 읽었고 한 번은 베껴 썼다. 두 번째 지금은 손 글씨로 베껴 쓰고 있다. 이 책은 글쓰기의 정석이자 롤 모델이다. 때로는 에세이처럼,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역사책처럼, 인문학 책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찾아가는 법, 맛 집, 산행 코스와 같은 것에 매몰된 기존 여행 서적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한다.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손 글씨로 직접 쓴 <자전거 여행2>의 프롤로그다. 본문도 압권이지만 프롤로그도 언어의 마술이 철철 넘친다.
다음 글은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서 아버지의 무덤에 다녀온 뒤 한 언론사와 인터뷰 한 글이다.
......( )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 )이 슬프지 않고 ( )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 )이 진실로 슬펐고, 먼 ( )이 다가와 가까운 ( )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 )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 )이 아니다...... (59)
( )속에 공통으로 들어갈 단어는?
'슬픔'이다.
김훈의 글은 구어체적이고 사실적이다. 말이 곧 글이다. 동시에 형용사나 부사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생동감이 대단하다.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표현, 특히 아름답다.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구절이다.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60)
지난주 토요일 서울 노원구에 있는 불암산에 갔다.
지난 겨울 눈에 덮힌 등산로에는 벌써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약 두 달 전, 같은 장소, 같은 길인데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극과 극을 오가는 자연의 섭리가 옳다. 겨울 해운대 해수욕장, 물에 들어가기는커녕 걷는 사람 몇 안 된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하루에 100만 명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다반사다. 계절과 계절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전거 여행>의 '꽃 피는 해안선'이라는 소제목에 담긴 글인데, 유독 꽃에 관한 표현이 많이 나온다. 너무 생생해서 직접 꽃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꼭꼭 씹어서 천천히 음미해보라.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동백은 떨어져 죽을 대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62-64)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64)
김훈은 꽃잎이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매화의 죽음을 풍장으로 비유한다. 바람 속에서 죽어간다는 말이다.
여기서 김훈은 무엇을 보든 천천히 보라고 말한다. 속도의 문제를 걸고 넘어진다. 우리는 정말 빠른 속도로 살아간다. 일일생활권과 시속 300km를 넘나드는 초스피드 속에 살고 있다. 못보고 놓치는 것은 속도에 비례한다. (64)
미국 밴드인 핑크마티니의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이라는 팝을 저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새로 시작해야 할지
내가 헛된 꿈을 꾸는 건지도 모르지
혹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푸른 잔디가 자라는 곳으로 갈거야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난 늘 더 많은 것을 원해왔어
그런데 뭘 가져도 늘 똑같더라고
돈은 변덕스럽기만 하고
명예를 쫓아다니는 것도 이제 지겨워
바로 그때 네 눈을 봤더니
너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더라
더 큰 것만 원하던 우리의 일상이
어느새 죄악이 되어가고 있었던 거야
물론 재미도 있었지 하지만
세상이 너무 빨리 움직여
사는 속도를 좀 늦춰야 할 것 같아
우리 머리를 잔디 위에 쉬게 하면서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을래?
푸른 언덕이 있고
차는 저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곳
낮에는 찬란한 빛으로 넘쳐나고
밤에는 수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곳
세상이 너무 빨리 움직여
사는 속도를 좀 늦춰야 할 것 같아
우리 머리를 잔디 위에 쉬게 하면서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을래? (71-73)
참 아름다운 노랫말이다.
특히 "세상이 너무 빨리 움직여/사는 속도를 좀 늦춰야 할 것 같아/우리 머리를 잔디 위에 쉬게 하면서/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을래?"라는 노랫말이 단연 압권이다. 잔디가 자라는 소리를 어디서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막막하다. 어디 아시는 분 없나요. 대한민국에 잔디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다시 <자전거 여행>으로 돌아가 꽃, 풀, 나무, 과일 공부를 해보자.
거듭 부탁컨대 찬찬히 씹어서 음미해야 할 글이다. 앞서 말한 시청이 아니라 견문을 해야 한다. 속독이 아니라 정독이 필요하다. 미천한 나의 해설이 오히려 아름다운 문장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뭐라고 지껄이고 싶지만 이럴 땐 침묵이 약이다. 각자의 시각으로 해석해 보았으면 좋겠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75-77)
목련은 등불 켜듯이 피어난다.....
목련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서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77)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관계다.
이 삼각은 어느 한쪽이 다른 두 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냉이의 저항 흔적은 냉이 속에 깊이 숨어 있던 봄의 흙냄새, 황토 속으로 스미는 햇볕의 냄새, 싹터오르는 풋것의 비린내를 된장 국물 속으로 모두 풀어놓는 평화를 이루고 있다. (80)
참다못해 여기서 저자는 김훈을 '미친 사람'으로 표현했다. 적절한 표현이다. '불광불급' 하지 않으면 어찌 냉이된장국을 삼각 치정관계로 몰아갈 수 있겠는가. 치정이나 원한은 섬뜩한 단어인데 쓰는 용도에 따라 이렇게 예뻐 보인다. <자전거 여행>의 자전거는 참 호강한 놈이다 싶다. 이렇게 좋은 풍경, 아름다운 말과 글을 함께 했으니 여한이 없을게다. 안 그냐! 자전거야....
봄의 흙은 헐겁다.....
봄 서리는 초록의 땅 위로 돋아나는 물의 싹이다.
봄 풀들의 싹이 땅 위로 돋아나기 전에, 흙 속에서는 물의 싹이 먼저 돋아난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 속의 길을 예비한다. (81)
쑥은 그야말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여리고 애달프다.
이 여린 것들이 언 떵을 똟고 가장 먼저 이 세상에 엽록소를 내민다. (84)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성과 잘 어울린다.
봄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전혀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비되었음을 안다. (84)
겨울을 밭에서 나는 보리는 이 초봄 흙들의 난만한 들뜸이 질색이다.
한창 자라날 무렵에 헐거워진 흙들이 꽉 껴안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을 이해하는 농부는 봄볕이 두터워지면 식구들을 모두 보리밭으로 데리고 나와서 흙을 밟아준다. (83)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85)
상록수의 숲은 짙고 깊게 푸르러서, 그 푸르름은 봄빛에 들뜨지 않는다.
상록수의 숲의 푸르름은 겨울을 어려워하지 않는 엄정함으로 봄빛에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흰 눈에 덮힌 겨울 산에서 상록수 숲의 푸르름은 우뚝하지만 온 산이 화사한 활엽수들의 신록으로 피어날 때, 연두의 바닷속에 섬처럼 들어앉은 상록수의 숲은 더욱 우뚝하다. (85)
자두의 생김새는 천하의 모든 과일들 중에 으뜸으로 에로틱하다.
자두는 요물단지로 생겼다.
자두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적인 에로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박의 향기는 근본적으로 풀의 향기다. 풀의 향기가 수분에 풀려서 넓게 퍼진다. 그 향기는 퍼지기보다 찌른다. 자두를 손으로 만져보면, 그 감촉은 덜 자란 동물의 살과 같다.
자두는 껍질을 깎을 필요도 없이 통째로 먹는다. 입을 크게 벌려서, 이걸 깨물어 먹으려면 늘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 안쓰러움이 여름의 즐거움이다. (88)
수박은 천지개벽하듯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88)
그냥 둥근 수박은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데 김훈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나 보다. 여름이면 늘 먹는 수박이었지만 김훈처럼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고, 그 따위에 정신 쏟는 것이 어쩌면 시간낭비라 생각하도 했다.....
횡단보도 신호등 색에 먹물 갈겨놓은 듯한 검은 줄무늬가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칼을 댔더니 일본 지진나듯 순간 두 동강이 났다. 작은 섬들이 무수히 많았다. 점점이 밖힌 섬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일게다.
그런데 수박이 둥글다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네모난 수박이 개발되어 인기라고 한다. 보관이나 운송이 편하다고는 하지만 정해진 사각 틀 안에서 발버둥 쳤을 수박의 분노가 느껴진다. 제발 그냥 좀 두자. 인간이여...
이제 <자전거 여행>이 막바지로 치닫는다.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박의 위치 판단이다 (91)
우리는 속도에 매몰되어 나의 위치를 무시한 채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과정을 파악할 수 있고 목적지로 향하는 여행길도 즐겁다.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이야기다.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입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서술은 몽매해집니다. (93)
<칼의 노래>에 나오는 죽음에 대한 묘사이다.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96-97)
<화장>에 아무리 사랑을 해도 아픔은 전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픔도 개별적이다. 냉정하지만 사실이다.
아무리 자식이 아프다 해도, 아파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플 뿐이지 그 아픔을 진짜 느낄 수는 없다.
철저히 개별적인 객체다. (97)
<자전거 여행2>에 나오는 아름다운 글을 몇 구절 골라봤다.
4강 | 고은의 낭만에 취하다 |
고은의 글이다.
동해는 예술이고 서해는 인생이다. (143)
언어 밖을 떠돌다가 언어로 수습되는 게 시 아닐까요? (143)
고은의 <순간의 꽃>에 나오는 詩다.
엄마는 곤히 잠들고
아기 혼자서
밤기차 가는 소리 듣는다 (144-145)
봄바람에
이 골짝
저 골짝
난리 났네
제정신 못차리겠네
아유 꽃년 꽃놈들! (150)
뭐니 뭐니 해도
호수는 누구와 헤어진 뒤
거기 있더라 (151)
연인과 같이 가면 "와, 좋다. 예쁘다" 할 것이다. 그리고 금방 상대를 보느라 호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헤어지고 혼자 가서 보면 호수가 보일거고 또 얼마나 휑하겠는가. 평소엔 잘 안보이다가 헤어지고 가면 감정이입이 되면서 텅 빈 호수가 훨씬 더 잘 보이는 것이다. (151)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고은의 <낯선 곳>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말했다. 익숙한 것을 두려워하라고. 땅버들 씨앗 같은 삶의 태도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땅버들 씨앗들도 의도를 가지고, 이번 물살이 좀 안전하니까 이번에 타야지, 하고 가는게 아니다. 갑자기 급한 않다. 내 마음대로 직조할 수 없다. 시대라는 씨줄과 내 의지라는 날줄이 맞아야 한다......(154)
만물은 노래하고 말한다
새는 새소리로 노래하고
바위는 침묵으로 말한다
나는 무엇으로 노래하고 무엇으로 말하는가 (156)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나오는 글이다. 이 책은 18세기 대니얼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20세기 미셸 트루니에가 정반대의 관점에서 다시 쓴 작품이다.
야생의 상태로 되돌아간 염소들은 이제 인간들에게 강제로 사육되는 동안 강요받았던 무질서 속에 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가장 힘세고 똑똑한 숫염소들이 지배하는, 계통과 서열이 확실한 무리로 나누어졌다. (164)
8강 |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
저자는 마지막 8강에서 옛 선조들의 지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삶의 속도를 늦추라고 조언한다. 우리는 지금 미친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는 여태까지 우리가 사는 시대만큼 급변하는 시대를 경험한 적이 없다. 1350년에 살던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1850년으로 오면 그다지 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달라졌고, 500년의 시간차는 있지만 생활하는 규칙이나 한 사람이 태어나서 움직이는 물리적인 거리, 농경사회라는 기본은 달라진 게 없다.
그런데 1850년에 살던 사람이 1950년으로 가면 기절해서 정신을 못 차린다. 1950년에 살던 사람이 2010년으로 가면 또 정신을 잃을 겁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변화가 엄지손톱만 하다면 그 이후의 변화는 팔 하나만큼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것과 같다. 시간과 거리에 대한 것만 봐도 우리는 시속 300킬로미터로 오가는 사람들이다. 그만큼의 생활반경을 가지고 있었다. 백 년 전의 사람들만 해도 두 발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전부인 시절이었다. 시간과 거리에 대한 해석을 포함한 우리의 전반적인 상태가 그 시대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317-318)
내가 태어난 가야산 언저리, 해인사 깊은 산 중 백련암, 하루를 묵고 아침에 눈을 뜬다. 비가 내린다. 빗소리를 듣고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본다. 책을 읽는다. 그 정신 상태, 다시 어둠이 내린다. 텔레비전은 언감생심, 라디오도 인터넷도 없는 적막한 밤, 향을 사르고 등불을 켜고 앉아 시집을 읽는다. 아무것도 없이 고요한 밤, 풍경과 하나가 되어 솔바람 소리를 듣고 바람과 대화하는 풍경 소리를 듣고.....
이런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예전에는 이런 풍경이 일상이었지만 이젠 무슨 이벤트행사 하듯 벼르고 별러 템플스테이라도 참석해야 가능하다.
"처마 끝의 빗소리는 번뇌를 멈추게 하고, 산자락의 폭포는 속기를 씻어준다." (318)
"처‧마‧ 끝‧의 빗‧소‧리‧는 번‧뇌‧를 멈‧추‧게 하‧고, 산‧자‧락‧의 폭‧포‧는 속‧기‧를 씻‧어‧준‧다." 라고 손철주는 <인생이 그림 같다>에서 읊었다. 차분하다. 하나 더 감상해보자.
뼈빠지는 수고를 감당하는 나의 삶도 남이 보면 풍경이다 (322)
인상적인 문구다. 그 어떤 삶도 그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지만 멀리서 제3자가 보면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도 한 마디 거들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이런 말도 가능하겠다. 근경은 전쟁이고 원경은 풍경화다. 지게를 지고 가는 아저씨를 멀리서보면 낭만적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뼈가 빠진다. 이런 글도 있네요.
말짱한 영혼은 가짜다 (326)
오주석의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2>에 나오는 구절이다.
담백하다.
칼칼하다.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해질녘 서편 하늘을 물들이는 장엄한 노을 앞에 섰거나, 한밤중 아득한 천공에서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무리의 합창을 들을 때, 혹은 동틀녘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는 황금빛 햇살의 광희를 온몸에 맞으면서, 어느 누가 감히 예술을 논하겠는가.
봄날 작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햇가지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길고 짧고 굵고 가는, 물기 오른 여린 가지들이 이루는 조화와 오만 가지 빛깔, 그것은 기적이다. 가을 새벽 거미줄에 붙들린 조그만 이슬 알갱이에 다가서 보자. 그 깜찍한 비례며 앙증맞은 짜임새도 경이롭지만 알알이 비치는 방울 속마다 제각기 살뜰한 우주가 숨어 있다. (327)
그렇다. 기적이다. 언어의 기적이다.
기적은 자연과 친숙한 단어인지 모른다. 자연의 기적과는 달리 인위적이고 현실적인 기적을 가져와 본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를 보면, 항상 불만에 차있는 짐 캐리에게 모건 프리먼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네 기적을 보고 싶나?" You want to see a miracle, son?
"스스로 기적이 되게나!" Be the miracle!
다른 사람의 기적에 부러워하지 말고 스스로 기적이 되자. 내가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되자. ‘삶이 기적이고 당신이 기적’이다. 일상의 반복이 힘든 통에 지레 기적을 포기해 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잊지 말자. 울퉁불퉁하긴 해도 우리 삶의 안팎으로 아래위로 그리고 좌우로 도처에 기적이 있다는 것을.... 어제와 다른 오늘, 그것은 기적이다. 오늘과 다른 내일, 그것 또한 기적이다. 하루하루가 곧 기적이다.
앞의 책에서 오주석은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라는 그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글을 깊이 모르는 내가 봐도 너무 아름답고 섬세한 글이다.
그럴 것이다.
인생의 저녁, 저물어가는 노을빛 속에서 작품 제작의 연월일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화폭에 가득 번진 환한 봄빛이 있고, 내 가슴도 훈훈한 봄빛을 머금고 있는데, 더구나 이 늙은 가슴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따뜻한 가슴이 곁에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림을 그렸을 때 김홍도는 노인이었다. 화폭에 떠도는 해맑은 동심이 그것을 반증한다. 노인은 젊은이보다 봄을 더 많이 생각한다. 그리고 더 소중히 여긴다. 아마 가을이 되자 봄이 더욱 그리워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마상청앵도>가 어느 계절에 그려졌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봄이, 영원한 봄이 그 안에 있다. (330-332)
호학심사 심지기의(好學深思 心知其意),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안다는 말이다. 비단 책뿐 아니라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촉수를 모두 열어놓으면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다. 비가 오는 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짜증을 낼 것이냐, 또 다른 하나는 비를 맞고 싱그럽게 올라오는 은행나무 잎을 보면서 삶의 환희를 느낄 것이냐이다.
행복은 선택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잔디이론으로 본다. 저쪽 잔디가 더 푸르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이십 대라 좋겠다, 영어도 잘하고 부럽다, 잘 생겨서 좋겠다, 돈 많아서 좋겠다, 모두 좋겠다 천지다. 그런데 어쩌겠다는 것인가. 나를 바꿀 순 없다. 행복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책의 첫 구절로 돌아가면서 글을 닫는다. (346)
니체는 그의 에세이집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아침에는 희망을 갖고 밤에는 체념하는가?
그렇다. 삶이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나의 눈에는, 나비와 비눗방울, 그리고 이런 것들을 닮은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우리에게 이 무명의 시 한 편을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봄은 우리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네.
행복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행복은 내 눈앞에 있었네.
이런 말로 가능하겠다.
"성공이 어디 있는지 구두가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성공은 내 마음에 있었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유일한 복수는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무라카미 류, <69>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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