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

21. 부동산에 뛰어든 인문학-김승희의 시 <식탁이 밥을 차린다>

김부현(김중순) 2019. 3. 11. 09:07

식탁이 밥을 차린다/김승희


식탁이 밥을 차린다
밥이 나를 먹는다
칫솔이 나를 양치질한다
거울이 나를 잡는다
그 순간 나는 극장이 되고
세미나 룸이 되고
흡혈귀의 키스가 되고
극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거울이 된다

캘빈 클라인이 나를 입고
니나리치가 나를 뿌린다


CNN이 나를 시청한다
타임즈가 나를 구독한다
신발이 나를 신는다
길이 나를 걸어간다
신용카드가 나를 소비하고
신용카드가 나를 분실 신고한다

(중략)


보릿고개에서 속성산업화를 거치면서 '우리'는  각자 본래의 자리에서 쫓겨나 얼마나 많은 '타인'과 '물질'을 위해 살고 있는지. 시를 읽노라니 내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지 아파트가 나에게 살고 있는지 헷갈린다. 내가 밥을 먹는 건지 밥이 나를 먹는 건지, 내가 옷을 입는 건지 옷이 나를 입는 건지 의아해진다. 내가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떡하니 자리잡은 '물질'이 나의 욕망을 먹고, 입고, 신고, 읽고, 부린다.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그 어느 시대에도 경험하지 못한 결핍과 고독에 시달리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법과 정의를 떠나 그간 우리나라는 부동산이 재산축적의 일등공신 역할을 해 온 '부동산공화국'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투기적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인구가 감소한다고 부동산이 폭망할 것 같지는 않다. 신발장에 신발을 수백 켤레씩 보관하지는 않지만 부동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족이란 없고 욕망은 하늘을 뚫고 올라가기 때문이다. 물질이 결코 자유와 결핍을 대신할 수 없다는 철학자들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