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과 일본의 부동산 시장 유사점과 차이점
전강수 교수는 <부동산공화국 경제사>라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한탄했다.“한때 자발적인 근로의욕과 창의력, 높은 저축률, 뜨거운 교육열과 학습열, 모험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땀 흘리고 절제하며 노동하고 기업을 일구고 자식을 공부시키며 공평한 경제성장을 이끌었는데, 이들은 다 어디가고 생산적 투자에는 관심 없이 비업무용 땅 사재기에 열을 올리는 기업, 대출받아서 갭 투자를 하는데 관심과 정력을 쏟는 회사원, 부동산특강 강사를 따라 아파트 사냥 투어에 나서는 주부, 건물주가 꿈인 중학생이 우리 사회의 상징처럼 떠올랐을까?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진보와 빈곤>의 저자 헨리 조지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답게 부동산문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경제사를 파헤친 책이다. 우리나라를 ?불로소득의 나라, 정직한 사람들이 실패한 역사?라고 일갈했지만, 부동산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부자로 가는 중요한 사다리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부동산만 한 것이 없다는 반증으로 들린다.
얼마 전, 청와대 사회수석이었던 <부동산은 끝났다>의 저자는 “부동산이 우리를 겁박하고 위협하던 시대는 끝났다. 부동산으로 국민을 현혹시키던 정치인, 돈 벌 기회를 보장하라는 말을 시장주의로 포장하던 언론, 믿고 싶은 것을 과학이라 얘기하는 전문가, 이들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올바른 부동산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일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잊고 지냈지만 진작부터 집은 인권이요, 삶의 자리였어야 했다. 인질의 공포감을 벗어던지고 깨어난 시민들이 이제 부동산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라고 했다. 자리가 자리인만큼 저자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과는 괴리가 있어 보인다.
속성산업화를 이루어낸 ‘한강의 기적’이면에는 부동산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집은 사는(live) 곳이지 사는(buy) 것이 아니다’라면서 부동산은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이다. 한국의 부동산 가격은 2001년 이후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주택담보대출이 증가하면서 상승세가 지속되었고 정부의 연이은 규제대책에도 불구하고 특히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급상승하였다. 우리나라 집값이 들썩일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는 바로 일본이다. 1990년대 초 일본에서 나타났던 일본형 부동산 버블붕괴가 한국에서도 현실화되는 것 아닌가 하고 우려하는 것이다.
일본의 부동산 버블을 간단하게 살펴보면,“땅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토지불패 신화를 바탕으로 1983년 도쿄 도심부터 급등하기 시작하여 1991년까지 9년여간 도쿄에서 대도시, 그리고 지방으로 시차를 두고 급등세를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은 그 전에 ‘토지본위제’로 불릴 만큼 토지에 대한 자산가치를 높게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일본의 부동산 버블을 이야기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85년 선진 5개국 재무장관회담이었던 "플라자 합의"이다. 이후 제조업의 수출경쟁력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경기가 둔화되고 투자의욕이 급격히 떨어져 본격화되었다.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은 너도나도 땅 사재기에 나섰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금융기관들의 대출 경쟁과 LTV의 120% 수준까지 마구잡이로 대출해 주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력과 대출을 바탕으로 당장 필요도 없는 공장부지를 미리 사두고 직원들의 복지후생을 위한 기숙사, 사택, 휴양소 등과 같이 기업활동과 관련 없는 것까지 사들이면서 투기에 동참했는데 결국 토지불패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특히 토지 관련 규제나 제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애매한 토지이용 규제에 매수특례제도(주택지 매도 자금으로 다른 주택지를 취득하여 매도이익이 남지 않으면 과세를 면제해주는 제도)까지 도입하자 기업들의 부동산 매입은 더욱 증가하게 되고 결국 도쿄 상업지의 버블이 주택지와 외곽으로 확산되어 전국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반면 한국은 버블의 대상이 주택이고 버블 형성의 주체도 기업이 아닌 개인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물론 저금리 기조에 풍부한 유동성과 같은 금융완화 정책, 은행들의 대출 경쟁심화와 같은 버블의 형성 배경은 유사하지만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1991년 붕괴된 이후 전체적으로 하락 추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버블 형성 중에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한국 부동산 시장도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고 수요가 뒷받침되지 못해 거래부진이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버블이 터질 가능성은 잠재한다. 그러나 어떠한 가정을 전제로 한 분석은 큰 의미도 없고 실효성도 없다.
버블은 터지기 전까지는 버블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돈의 감각>에서 저자는 “버블인지 아닌지는 버블이 터진 후에 안다”고 하면서 버블이 붕괴된 후에야 버블이었는지를 사후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버블은 결국 부채인데 일본은 주로 기업들이 부채를 일으켰고, 한국은 개인이 부채를 일으켰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부채를 누가 일으켰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그 부채를 떠안을 수 있는 세력이 없게 되면 폭탄은 터진다. 다만 한국은 일본처럼 급속한 버블 붕괴는 일어나지 않거나 늦추어질 수 있다. 바로 전세제도 때문이다. 10억 짜리 아파트를 살 경우 전세를 끼면 세입자와 소유자가 일정 부분 부채를 나누어 떠안게 되므로 버블 붕괴 가능성일 약화시키거나 없애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버블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주택시장의 수요가 감소하고 경제성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부동산 불패 신화도 붕괴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한국은 주택시장의 공급이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에서 공급량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 최초로 출생률 0명대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1인 가구의 증가, 1인 가구의 주거면적 증가, 노후 아파트의 증가 등으로 주택공급은 계속되어야 한다. 인구는 2029년을 정점으로 줄어들지만 생산가능인구는 베이비붐 세대들의 은퇴와 맞물려 2017년부터 줄어들고 있어 우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들은 주택을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매수세력으로 등장하고 있고 다주택자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어 버블 붕괴를 우려할 시점은 아니다.
<표 > 일본과 한국 부동산 시장의 차이점
구분 | 일본 | 한국 |
부동산 시장 상황 | 버블 현상, 동경 도심지가 위주 급등 | 서울 강남 아파트 가격 상승 주도 |
금융정책 | 저금리 기조 | 저금리 기조로 시중 유동성 풍부 |
사회적 인식 | 토지 불패 신화 | 아파트 불패 신화 |
물가 | 소비자물가 1% 이하로 하락 | 소비자 물가 3~4% 정도에서 안정 |
금융정책 | 부동산(토지) 관련 대출 급증 | 부동산(아파트)관련 가계대출 급증 |
버블주체 | 기업 | 개인 |
버블 대상 | 토지 | 아파트 |
버블 사이클 | 기업부채 증가-부동산가치 하락-기업부채 급증 | 가계부채 증가-부동산 가치 상승-가계부채 급증 |
주택보급률 | 100% 상회(1960년대) | 108%(2018년), 특정 지역(서울, 수도권(100% 이하, 공급부족 심화) |
담보대출 | 100% 이상 가능 | 60~80% 수준 |
전세시장 | x | o |
핵심투자 | 기업중심/토지 | 개인중심/주택 |
고령화 | 부동산매도 | 부동산매수(부동산을 대체할 재테크 수단이 없다) |
많은 사람들이 일본 부동산의 버블 붕괴를 보면서 한국도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물론 저금리 기조에 기업 및 가계대출이 급증하는 등 부동산에 대한 대출이 과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1985년 저금리가 지속되면서 최장의 호황기를 누렸다. 이에 기업들은 토지 사재기에 편승하여 과잉대출로 이어져 불패신화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유사한 측면도 있지만 차이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 현상’이 시작되었다. 환율하락에 대비하기 위해 수출증대를 위한 금리인하를 단행하자 기업들은 기업 본연의 생산활동 대신담보가치 보다 높은 은행 대출을 받아 부동산 재테크에 나섰다. 엔화강세와 맞물려 부동산 가격은 30배 이상 폭등하다 1990년 대 이후 버블에 진입하여 경기침체기를 맞았다. <표>에서 보듯이, 먼저 버블의 대상이 일본은 상업용 토지인 반면 한국은 아파트다. 당시 일본 부동산 버블은 도쿄의 상업용 토지에 대한 투기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강남을 중심으로 버블세븐지역 등의 아파트가 그 대상이다. 아파트의 경우 먹고 자고 쉴 수 있기 때문에 토지보다는 활용도가 높아 폭락의 피해를 최소화 할수 있다.
그리고 버블의 주체를 보면, 일본은 기업 또는 법인인 반면 한국은 개인이다. 당시 일본은 저금리기조와 부동산 불패신화에 힘입어 기업들이 본연의 기업활동보다는 대출을 받아 부동산을 사재기하여 시세차익을 노리기에 급급했다. 이에 금융기관들도 동참했다. 담보가치 대비 100%를 초과할 정도로 과잉대출을 해 준 것이다. 반면우리나라는 기업이 아닌 개인이 아파트에 투자를 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기업들은 도산을 막기 위해 부동산을 바로 처분할 수밖에 없지만 개인들은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실제 거주하면서 처분시기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가격폭락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리고 부동산 담보대출 비율을 보면, 일본은 담보가치 대비 100~120%였지만, 한국은 대출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점점 강화되어 50~60%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출부실에 따른 후유증은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클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환경인 셈이다. 정리하면, 일본의 부동산 버블을 가져온 주요인은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 돈 번다’는 토지불패 신화, 1985년 5월, ‘경제여건이 너무 좋은데 도쿄에 오피스가 너무 부족하니까 상업용 부동산을 지어라!’고 부추겼던 국토청, ‘땅 사 세요! 돈은 왕창 빌려드립니다’라고 설레발 쳤던 금융기관, 그리고 담보가치보다 더 많은 돈을 대출(LTV 120%)해 준 담보대출 운용 부실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개미들도 부동산만 사면 돈을 벌 수 있다.”, “부동산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가장 안전한 투자처는 부동산이다.”, “이럴 때 집 안 사면 바보다.”라는 말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1990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의 상업지와 주택지의 지가하락률은 각각 –87.2%, -66.5%로 폭락했다. 일본의 경우에는 땅값이 떨어져 자산 디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 상업용지와 주택용지 등이 하락하게 되었다. 일본은 전후 부동산 불패신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폭락에 대한 경험이 전혀없었던 탓에 시장에서 충격을 완화할 방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라는 두 번의 외부 충격으로 폭락을 이미 경험한 바 있어 내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표> 한국과 일본의 부동산시장 버블 형성과정 비교
-자료 : 하나금융연구소
사실 세계 어느 나라든 부동산에 대한 약간의 거품은 끼어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중요한 것은 버블 그 자체가 아니라 버블에 대한 내성이다. 따라서 버블은 곧 붕괴된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설령 버블이 붕괴 된다 하더라도 일본처럼 큰 폭으로 하락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처럼 담보가치 대비 100% 넘게 대출을 받아 기업들이 상업용 토지에 투기를 해서 상대적으로 하락폭이 컸지만 우리나라는 개인이 주거를 할 수 있는 효용성 높은 아파트에 투자를 하고 담보대출 비율도 일본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일본처럼 버블이 붕괴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본에서 유행하면 4~5년 후 한국에서 유행을 한다. 사회전반적으로 일본과 유사성을 보이는 부분이 많지만 부동산시장은 어딘가 모르게 닮은 듯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한국과 일본의 부동산 버블은 그 뿌리부터 다르다
2000년대 중반 수도권 중대형평형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가격하락으로 우리나라도 일본 부동산 버블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그러나 양국의 부동산 버블은 그 대상과 형성의 주체가 다르고, LTV(주택담보대출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를 통해 부동산 대출을 규제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일본식 버블과정의 전철을 밟을 확률이 크지 않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다만, 한국이 고령화 시대로 들어서면서 생산연령층의 인구감소로 생긴 신도시의 베드타운화 현상과 일본의 베이비부머인 ‘단카이세대’의 부동산에 대한 인식변화는 향후 우리나라 부동산시장의 트렌드를 예측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 부동산시장의 버블의 원인은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동경 도심부터 시작한 부동산 가격상승은 1991년까지 9년 동안 동경 전역을 비롯한 대도시와 지방 등으로 확산되었다. ‘토지가격은 절대 하락하지 않는다’라는 토지 불패신화를 전제로 1980년대 후반 6대 도시 평균 가격이 3배 이상 급등하고 말았다. 일본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저임금을 기반으로 하는 수출주도형 경제를 가지고 있었다. 저임금에 따른 일본의 대미무역 흑자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통상마찰의 근거가 되었고, 결국 미국은 선진 5개국 정상회담(G5)에서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화 약세를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영향으로 엔고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수출기업들은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반면 수출가격 상승으로 일본 국내에는 엄청난 규모의 달러가 유입되었고 1985년 492억 달러였던 무역흑자 규모는 1986년에는 860억 달러로 오히려 크게 늘어났다.
이처럼 지나친 엔화 강세가 이어지자 일본은 이자율을 낮춰 엔화 강세의 속도를 낮춰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자율이 낮아지자 자금은 갈 곳을 잃고 부동산과 주식에 몰렸다. “재테크”라는 신조어가 만들어 지면서 닛케이지수는 1987년에서 1989년까지 2년 만에 2배가 상승하였다. 은행들이 고객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부동산에 투자하도록 권유하는 진풍경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급기야 일본 정부는 인플레를 막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땅을 사기위한 대출을 금지하였다. 그러자 부동산 가격은 주식과 1년 반 정도의 시차를 두고 1991년 가을부터 하락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의 폭락은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불황과 은행의 부실채권 증가로 이어졌다. 이러한 가속적인 가격하락은 자본이익(capital gain)의 소실과 자본손실(capital loss)의 발생을 가속화했다. 가계의 자본손실은 90년에 주식으로 76.8조엔(가처분소득 대비 27.4%), 91년에는 토지로 105조엔(가처분소득 대비 35.5%) 발생했다. 결국 일본은 금융불안과 실물경제 위축으로 복합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버블 붕괴 후 10년 이상의 자산 디플레이션을 경험한 일본은 부동산에 대한 인식 변화가 시작되었다. 첫째, 토지신화가 깨지자 지가하락으로 도심회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둘째, 주택을 소유 및 투자의 개념에서 사용의 개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주택분양시장이 축소되고 주택임대시장이 성장하게 되었다. 셋째, 기업의 부동산투자 전략이 수정되었다. 버블 붕괴 전 일본기업들은 부동산의 자산가치를 기업 경영에 활용하여 본사 빌딩은 물론 지점 및 영업소를 구입하는 등 부동산 시장에서 큰 투자자인 동시에 지주 였다. 그러나 버블 붕괴 이후 기업은 토지를 직접 매입 후 개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토지주와 차지권 계약을 맺고 부동산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사업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한국과 일본 부동산시장 '같다' vs '다르다'
일본 부동산시장의 버블형성 상황은 한국과 비슷한 측면도 있다. 우선 부동산 버블형성 배경이 경기 둔화기였다는 점이 같다. 한국과 일본 모두 경기 둔화기에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한 금융완화 정책을 강력하게 펼친 시기 동안 부동산버블이 형성됐다. 저금리 현상이 지속되면서 시장의 유동자금이 부동산으로 쏟아졌고 때마침 은행권이 경쟁적으로 부동산 관련 대출을 확대했다는 점도 닮았다. 다른 점도 있다.
큰 차이는 버블의 대상과 주체다. 일본은 오피스와 토지가 버블의 대상이었다. 일본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1983년 도쿄 도심 오피스와 상업용지에서 시작해 전국의 아파트까지 번졌다. 가격 급등은 1991년 3ㆍ4분기까지 9년간이나 이어졌다. 특히 1986년부터 1991년까지 5년간 6대 도시 평균지가는 3.07배나 뛰었다. 반면 한국 부동산 시장의 버블은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가 주도했다. 2002년 1월에서 2006년 4월까지 4년간 강남지역 아파트는 74.9% 상승했다. 그리고 버블 형성의 주체도 다르다. 일본은 기관투자자인 부동산업자가 부동산 버블을 이끌었고 한국은 개인투자자가 주도했다.
거품으로 꽉 채워졌던 버블이라는 풍선이 터진 후 일본 부동산시장의 투자 트렌드가 바뀌게 된다. 풍선이 터지자 시세차익을 통한 수익을 크게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매달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오피스나 원룸맨션 등 수익형 상품이 '부동산 투자의 대세'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스타필드와 유사한 롯폰기힐스와 같은 오피스ㆍ쇼핑ㆍ문화시설 등을 한곳에 모아둔 도심내 랜드마크 지역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19년간 노령화와 부동산 경기 급락을 겪으면서 교외나 신도시에서 도심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도심회귀현상'이 강해진 덕분이다. 우리가 일본과 같은 형태의 버블은 아니지만 이미 투자 트렌드는 일본과 크게 차이가 없다. 저금리에 풍부해진 유동성이 언제든지 부동산에 몰려들어 바람을 일으킬 여지는 있지만 이미 대출규제와 보유세 증가 등으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어 미풍에 그칠 수도 있다. 주택 임대시장에서도 전세에서 월세로의 비중이 가속화되고 있고 직접투자보다는 간접투자 방식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희소성 및 자산가치 측면에서 도심선호 현상과 똘똘한 한 채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질 것이다. 이는 결국 강남과 비강남, 도심과 위성도시 간의 양극화로 나타날 것이며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어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2. 일본의 부동산 버블과 한국은 다르다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엔 환율 추이
일본 주요 도시의 주택·상업용지 지가지수 추이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는 일본의‘잃어버린 20년’의 서막
일본의 버블 붕괴의 필요조건은 금리와 대출규모다
한국의 금리와 대출규모는 일본과 다르다
일본의 버블붕괴의 부수적 요인, 주택의 공급과잉
일본 버블붕괴의 복사판,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속 터지네, 그래서 한국 부동산 버블 터진다는 거야, 안 터진다는 거야!
저금리 기조에서 가계부채 증가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금리는 시장참여자들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에 훈풍이 불기 시작하면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나라가 있다. 일본이다. 일본처럼 한국도 부동산 버블붕괴가 올 것이라는 메뉴다. 일본 부동산 버블의 스토리는 전 국민과 기업의 투자 열풍으로 주식과 부동산가격이 폭등하여 견디다 못한 버블이 붕괴되면서 주식과 부동산 시장이 폭락한 메뉴다. 그래서 한국 부동산가격의 상승세가 이어질 때마다 버블을 우려한 나머지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하지 못하고 머뭇렸다.‘이제는 버블이 터지겠지’, ‘내일은 터지겠지’하면서 10년 전부터 지켜봤지만 한국 부동산의 버블은 터지지 않았고 오히려 가격은 상승했다. 아니, 일본처럼 버블이 터질 결정타가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으로 대별되는 부동산 버블 붕괴가 한국에 온다, 안 온다 하면서 의견이 분분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지만 한국의 부동산 붐과 일본의 부동산 버블은 기본 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일본과 같은 버블 붕괴는 오지 않을 것이다.
1989년 말 39,000포인트였던 니케이 지수는 2003년 7,600까지 곤두박질쳤다. 일본 부동산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87년 2784만엔이었던 전국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1991년 4488만엔을 정점으로 찍은 후 내림세로 전환, 2005년 3492만엔까지 추락했다. 이후 오름세로 전환, 2008년 3901만엔까지 회복됐지만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재차 하락, 2009년 3802만엔으로 떨어졌다. 버블 정점 당시 분양가의 84.7% 수준이다. 땅값 역시 1991년을 정점으로 추락하고 있다. 특히 일본 국토교통성에 따르면 지방의 땅 값은 1992년부터 18년 연속 곤두박질쳤다. 2010년 공시지가 기준 상업용지 가격은 1991년의 버블 당시의 4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아시아경제>, 2010.6.16.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시장을 떠받치던 버블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부동산 열풍 속에서 돈놀이를 즐겼던 은행과 기업들은 돈줄이 막혀 줄줄이 도산하면서 실업자는 속출했고 일본이 자랑하던 종신고용제도 공중분해 되었다. 길거리에는 노숙자가 등장했고 내수까지 위축되면서 경제는 침체일로로 치달았다. 이에 화들짝 놀란 정부는 내수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을 풀고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었지만 한번 넘어졌던 부동산 경기는 일어서지 못했다. 이에 1990년대 들어 일본은 기나긴 불황의 터널로 진입했다.
도대체 무엇이 잘 나가던 일본 경제와 부동산을 무너뜨렸을까?
그렇다면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밀접한 우리나라도 일본을 그대로 답습할까?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고, 미래가 없는 현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현재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가 반반씩 합쳐져 있는 형태라 할 수 있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버블붕괴를 이해하려면 일본의 경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두 방을 맞은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졸지에 패전국이 된 일본, 어떻게 2차 세계전의 패전국인 전범국 일본이 세계 경제 2위 대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패전국 일본은 철저히 전략적,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군사적 이점을 살려 미국의 군사기지, 병참기지로서 사회주의 중국과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보루가 될 수 있었다. 거기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간 일어난 한국전쟁에 엄청난 군수물자를 팔아 전쟁특수를 누리게 된다. 군수물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끌고가 일본 기업들의 고도성장에 이용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연간 두 자리수 상승을 하며 고도성장을 하게 되고 근로자들의 월급은 매년 두 배 가까이 올랐다.
1950년대 들어, 1957년 소니가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세계시장에서 초대박을 터트렸고, 혼다는 엔진을 장착한 자전거로 시작해 오토바이로 발전시켜 히트를 쳤다. 마쓰시다 전기, 샤프 전기, 히타치, 도시바, 미츠비시 전기, 산요 전기 등 전자가전업체의 폭풍 성장도 이어졌다. 또한 후지제철, 일본강관 및 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도 번창했다. 10년 후 1964년에는 IMF 8조 국가들의 이른바 선진국 클럽인 OECD 회원국이 된다. 같은 해에 도쿄올림픽을 개최하고 내방한 외국인들을 나르기 위해 시속 200킬로미터의 신칸센 고속열차를 개통한다. 1968년 국민총생산은 서독을 제치고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에 올랐다. 일본인들의 자신감과 자부심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때마침 소득증가와 맞물려 1억 인구의 ‘마이카 붐’이 일어 내수시장에 열을 올렸던 자동차 회사들은 마침내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린다. 미국의 포드나 쉐보레 등 경쟁제품 대비 가격이 저렴하고 품질이 좋아 단숨에 미국 시장을 점령해 버렸다.
1980년대 들어서는 일본의 전자제품들이 미국으로 밀려들었다. 미국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더 싸고 질 좋은 일본 전자제품을 싹쓸이했다. 그런데 한쪽이 이익을 보면 한쪽은 손해를 보는 법, 일본은 미국 시장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일본에 수출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나라가 있었다. 미국이었다. 미국 제1의 수입국 일본에 대한 무역적자는 1965년부터 지속되었고, 전 세계에 걸친 무역적자는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요즘의 미국은 무역적자가 별일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이미 1960년대 말부터 미국과 일본의 무역 전쟁은 물밑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20년이 넘도록 미국과 일본의 무역마찰은 지속 되었다. 미국과 일본은 강력한 안보동맹이자 우방임은 분명했지만 경제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를 할 수 없었던 세계 1,2위의 관계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는 미·일간 섬유와 철강분쟁이 있었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는 컬러TV, 자동차, 공작기계 관련 분쟁이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반도체 분쟁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섬유, 철강, 자동차, 전자제품, 반도체를 앞세워 미국 시장에 무차별적으로 수출하는 반면 일본은 국내시장 개방을 계속 늦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무역적자는 커져만 갔다. 1981년에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무역적자는 461억 달러로 전체 무역적자 1,210억 달러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1980년대 일본 기업들은 한 마디로 기고만장했다. 세계 50대 기업 중 일본기업은 33개, 10대 기업으로 한정해 보면 엑슨과 IBM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기업이 차지했다. 전 세계인들이 일본을 부러워한 동시에 경악했을 정도로 세계시장을 좌지우지했던 일본이었다. 1989년 도쿄주식시장이 시가총액 기준 세계 1등 시장으로 자리 잡았고, 미쓰비시 부동산이 록펠러센터의 주식 80%를 인수하여 빌딩 꼭대기에 일본 국기를 내걸자 미국인들은 “일본이 미국을 사버렸다”라면서 한탄했다.
1980년대 세계 최고의 경제를 구가하며 전성기를 내닫던 일본, 도요타, 소니, 캐논, 파나소닉, 도시바와 같은 우량기업들은 세계시장을 쥐락펴락했다. 1970~1980년대는 “Made in Japan”만 붙이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제조 강국 일본을 상징하던 단어 그 자체였다. 일본의 기업들은 우수한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미국과 유럽의 경쟁사들을 압도하며 세계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당시 전자업계의 강자인 히타치나 소니가 인텔이나 IBM을 인수 한다는 전망이 나돌았을 정도였다. 전 세계를 통해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주체할 수 없었던 도쿄 거리는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엄청난 호황으로 면접만 보러 가도 면접비로 20~30만 원을 그냥 줄 정도였다. 회사 100군데 면접비를 모아 중고차를 샀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했다. 누구는 입사시험을 보다가 도중에 집에 돌아가도 합격했다고 하고 신입사원 평균연봉이 1,000만 엔에 달했다. 피곤하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굳이 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회사는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흑자도산을 할 정도였다. 국민들은 일을 하기보다는 돈놀이에 심취했고 기업들 역시 본연의 생산 활동보다는 재테크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일본 주식과 부동산은 상승만 있어 하락이라는 말 자체를 잊고 있었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안 사면 바보였고 사놓기만 하면 올랐다. 어떤 주식을 사던 어떤 부동산을 사던 무조건 올랐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모두 투자의 천재인 줄 착각하게 된다. 이웃집 철수 아줌마, 친구 영희, 일용직을 전전하던 길동이도 모두 재테크의 신이 되었다. 재테크에 한 번 맛을 들인 국민들은 일상을 제쳐두고 재테크에 올인하게 되었다.
일본토지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1884년부터 1991년까지 일본의 주택용지와 상업용지의 지가지수 상승률을 보면, 상업용지가 주택용지에 비해 2배 이상 올랐다. 주택용지의 경우 1984년 78.8이었으나 1991년에는 223.4를 기록했다. 반면 상업용지는 1984년 113.9에서 1991년에는 무려 519.4를 기록했을 정도로 폭등했다. 이것이 가능한 배경 중 하나는 은행 대출이었다.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직전처럼 LTV의 100%까지 대출을 해 주었을 정도로 금융기관간 경쟁이 심했다. 담보가치를 상회하는 대출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 개인의 대출금이 수 조원이었다는 사례도 있었다. 기업들은 영업수익보다 영업외수익이 높아 기업활동은 엉망이었다. 거기다 집값이 폭락하는데도 계속 공급을 늘린데다 생산활동인구의 감소와 맞물려 일본의 버블이 붕괴되었던 것이다. 세계 어느 국가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일본의 사례를 연구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처음 발생한 일이다 보니 당시 일본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버블 붕괴 이후 세계는 일본의 사례를 학습하여 이제는 일본과 같은 버블붕괴에 대한 대비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플라자합의 이전만 해도 ‘일본 도쿄만 팔면 미국 땅 전부를 산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한 마디로 일본의 버블붕괴는 주식과 부동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미술품 등과 같은 전 자산에 대한 붕괴였다. 미국의 2008년 서브 프라임모기지 사태는 부동산에 한정된 버블붕괴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 ‘세계의 경찰’이라 자부했던 미국은 기고만장한 일본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미국입장에서는 꼴불견이자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미국, 일본에 대한 선택지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에 굴복한다.
-일본을 굴복시킨다.
결과는? ‘플라자 합의’를 통해 알 수 있다.
플라자합의(Plaza Accord)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서막
1985년 9월, 국제 금융재벌들이 마침내 손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영국,일본,독일,프랑스 5개국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플라자합의’를 체결했다. 목적은 다른 주요 화폐에 대한 달러의 환율을 통제하면서 평가절하하는 것이었다. 일본은행은 미국 재무장관 베이커의 압력으로 엔화의 평가절상에 동의했다. 플라자합의를 체결한 후 몇 개월 안에 엔화 대 달러의 비율은 250대1에서 149대1로 엔화가 크게 절상했다.
1987년 10월, 뉴욕 증시가 붕괴하자 미국 재무장관 베이커는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에게 압력을 행사해 일본은행이 금리를 계속 인하하도록했다. 그래서 미국 증시가 일본 증시보다 강해져 도쿄 증시로 들어간 자금이 미국으로 방향을 틀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베이커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미일 무역적자 문제를 들고 나와 일본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물론 당근 정책도 빠뜨리지 않았다. 즉 공화당이 계속 집권할 경우 부시가 미일 친선을 대대적으로 촉진할 것이라고 했다. 나카소네 수상은 베이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엔화의 금리를 2.5%까지 인하했다. 일본은행 시스템은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대규모 자본이 증시와 부동산으로 몰려들었다. 도쿄 증시의 성장율은 무려 40%나 되었으며, 부동산은 심지어 90%까지 성장함으로써 거대한 금융 거품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토록 짧은 시간 동안 발생한 통화 환율의 극단적 변화는 일본의 수출 생산업자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엔화의 평가절상으로 말미암은 수출 하락의 손해를 만회하고자 기업들은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을 받아 증시에 투자했다. 일본은행의 단기 대출시장은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가 되었다. 1988년이 되자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은행은 모두 일본이 독차지했다. 이때 도쿄 증권시장은 이미 3년간 300%나 올라 있었다. 부동산은 그보다 더 심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위태로운 상태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외부에서 그토록 파괴적인 공작을 하지 않았다면 일본 경제는 안정적인 긴축 작전으로 무사히 연착륙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가 국제 금융재벌들이 저지른 선전포고 없는 금융 교살 행위라는 사실을 일본은 꿈에도 몰랐다.‘플라자합의’는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시티 플라자호텔에서 G5 재무부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할 것을 결정한 회의 내용을 말한다.
당시 프랑스·독일·일본·미국·영국으로 이루어진 G5 재무부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를 평가절상하며, 이 조치가 통하지 않을 경우 각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서라도 미국의 무역수지를 개선시킨다는 내용의 합의였다. 플라자합의가 이루어진 배경에는 1980년대 초에 실시된 개인의 소득세 감세 조치와 재정지출 유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있었다.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로 불렸던 이 경제정책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대규모 재정적자를 기록하였고, 이와 함께 높아진 달러화의 가치 때문에 무역적자까지 심각해지자 플라자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플라자합의에 따라 독일의 마르크화는 1주일 만에 약 7%, 일본의 엔화는 약 8% 정도 평가절상되었고, 달러 가치는 계속 떨어져 2년 후에는 약 30% 이상 평가절하되었다. 플라자합의로 인해 미국의 무역적자와 경제 상황은 급속히 개선되었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독일과 일본은 오랫동안 경제불황을 겪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일본과 독일이었다. 말만 합의였지 속내를 들여다보면 미국의 일방적인 강요였다. 일본이 미치지 않고서는 제조업을 하는 나라에서 자국 화폐가 2배 이상 절상되는 합의에 동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환율을 적용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만약 원 달러 환율이 500원대면 한국 기업들의 제품이 해외시장에서 팔릴 수가 없다.
최근 미국은 1994년 이후 25년 만에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 것을 놓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제2의 플라자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음흉한 속내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이외 다른 나라들이 공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과거와 같은 플라자합의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따라서 1991년 시작된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시장의 붕괴는 우연히 온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플라자합의로 인한 엔화절상에서 시작되었다.
<그림>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엔 비교환율 추이
<그림>처럼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는 1주일 만에 달러화 대비 8.3%가 즉시 올랐으며, 2년간 달러 대비 65%가량 절상되었다. 당시만 해도 실시간으로 환율이 바뀌는 변동환율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정부의 정책은 금방 효과가 나타났다.
플라자 합의는 표면적으로는 달러화 절상에 따른 미국의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라는 이른바 쌍둥이 적자를 해소하기 위함이었으나 진짜 속내는 일본의 경제적 급부상을 경계하기 위한 미국의 직접적 견제였다는 분석도 있다.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달러 약세로 높아진 가격경쟁력으로 인해 1990년대 들어서 해외시장에서 좋은 실적을 거뒀고, 미국 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의 황금기, 즉 ‘골디락스’를 이어간 반면 일본은 엔화절상으로 인해 잃어버린 20년의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플라자합의의 시대적 배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1950년대 6.25전쟁 특수로 경제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베끼기의 제왕’답게 서양의 제품들을 빠르게 모방하여 일본의 디자인을 더하고 기능이 우수한 제품들이 생산되었고 원가절감을 통해 서양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나갔다. 한국이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1960년대 이미 자동차산업에 로봇을 도입하여 불과 20여년 만에 산업 전반에 걸쳐 자동화를 이루어냈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의 오일 쇼크의 잔재로 급기야 미국은 1980년대에 달러의 대외신인도를 높이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펼쳤으나 이를 계기로 오히려 미국 제조업은 급격히 하향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일본은 소니, 도시바, 히타치와 같은 전자산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미국 시장을 단숨에 점령해버렸다. 미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는 일본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미국 경제의 근간을 흔들 것을 우려한 나머지 그 해결책으로 1985년 9월 플라자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일제히 금리를 인하하여 2.5%까지 인하되었다. 수출 기업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기업들은 이를 만회하고자 경제활동보다는 주식시장과 부동산에 자금을 투입하였다.
도쿄 증권시장은 40%, 부동산은 90%까지 오르면서 버블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켜만 보고 있던 국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부동산과 증권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 당연히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이른바 ‘흑자부도’가 만연할 정도로 거품은 엄청났다. 급기야 1988년에 세계10위권에 이름을 올린 은행들은 모두 일본의 은행들이 차지했다. 주식시장은 3년 만에 300%가 올랐고, 부동산은 20배가 넘게 오르기도 했다. 이를 국제 금융기관들이 가만 둘 리가 없었다. 모건 스탠리, 리먼브라더스와 같은 대형 투자은행들을 이본에 진출시켜 묘수를 부렸다. 일본 기관투자자들을 상대로 ‘주가지수 풋옵션 계약’(주가지수가 떨어지면 돈을 벌고 오르면 돈을 잃는 계약)을 대규모로 체결했다. 당시 일본의 기관투자자들은 풋옵션 계약을 하는 투자은행들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주가지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1990년 1월 12일부터 일본 주가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얼이 빠진 상태가 되었다. 주가 폭락으로 손실이 엄청난데다 외국의 투자은행들과 계약했던 엄청난 풋옵션 때문에 주가가 떨어진만큼 투자은행들에게 보전해 줘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된 것이다. 풋옵션은 그야말로 일본 금융시장의 핵폭탄이었다. 주가가 폭락하자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도 헐값에 시장에 나와 부동산 시장도 초토화되었다. 실업자는 급증했고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했던 투자금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이에 미국은 거액의 쌍둥이 적자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다. 플라자합의와 그 후의 결과는 미국 제조업 회복의 전환점이자 세계 경제 전체의 주된 분수령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로 인해 달러화는 10여 년 동안 엔화와 마르크화에 대해 다소 지속적으로 또 대폭 평가절하 상태를 유지했다.
또 이는 10년 동안 실질임금 증가율을 제로 수준으로 유지시켰다. 그리하여 미국 제조업은 경쟁력을 회복하고 수출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독일 산업과 일본 산업은 장기적인 위기에 빠졌고, 동아시아 전체는 수출 기반 제조업의 폭발적 성장을 구가했다. 특히 동아시아 경제는 대부분 통화를 달러화와 연동시켰기 때문에 1985년에서 1995년 사이에 달러 가치가 떨어지는 동안 자국 제조업 수출기업들이 일본 경쟁자들과 비교하여 주요한 경쟁우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쟁력 추이의 역사적 전환과 그에 수반되는 제조업 이윤율의 상승은 국민경제 사이의 생산성 증가율 차이나 미국 제조업 생산성 증가율의 가속화(1994년 이전)에 조금도 기인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이 임금 상승률의 차이와 환율 차이의 결과였다.
일본의 버블붕괴, 금리와 대출규모다
1985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렸던 ‘플라자합의’로 일본의 기고만장했던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시장의 장밋빛 역사는 내리막 길을 걷게 된다. 미국에 대들었던 결과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플라자합의는 결국 환율 조정이었다. 즉 1달러 259엔이 하루아침에 149엔으로 절상된 것이다. 급격한 엔고 상황에서 1달러치 물건을 수출하면 100엔을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수출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수출길이 막히다 보니 경제불황으로 이어졌다. 수출하면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는 내수경기를 살리는 방법은 내수시장 부양이다.
국민들의 지갑을 열고 돈을 돌게하기 위해 연이어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금리가 낮아지자 실물자산이 안전하다는 이유로 투기세력이 부동산으로 몰려들어 거품을 만들었다. 그럼 일본의 버블붕괴의 결정타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결국 금리와 대출규모의 두 가지 때문이다. 먼저 금리를 보면, 1980년대 초에서 1987년 2월까지 기준금리를 2.5%까지 계속 인하했다. 금리가 낮아지면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2.5% 금리는 사상 최초였다. 1980년대 초 한국의 정기예금금리 19.5%였다.
다음은 대출의 규모를 보자. 당시 일본 은행들은 앞다투어 대출전쟁에 뛰어든다. 1억 원짜리 부동산 사면 대출을 1억 원까지 해주었다. LTV 비율이 100%라는 이야기다. 마음만 먹게 되면 신용과 관계없이 누구나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너도나도 대출받아 부동산 사재기에 나섰다. 국민들은 모였다 하면 주식과 부동산 이야기뿐이었고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투자에 참여했다. 경기 활황에 취해있던 일본 정부는 마침내 불붙은 부동산과열을 잠재우기 위해 1990년 3월 대장성에서 주택담보대출총량제를 실시하게 된다. 동시에 역사상 최저 였던 금리를 1989년 5월부터 1990년 8월까지 16개월 동안 자그마치 6%까지 2.4배 인상시켰다. 대출이 막히자 투기수요는 급격히 감소했고, 1990년부터 주식과 부동산이 폭락하여 10년간 3분의 1에서 10분의 1로 하락했다.
문제는 금리를 올려 대출을 막아 부동산 가격은 떨어졌지만 대출규모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높은 이자부담에 부동산을 처분해도 대출을 갚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부동산가격 하락액만 534조, 이 악성 채무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지금도 세계에서 국가채무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일본이다. 따라서 일본과 같은 버블붕괴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금리와 대출규모가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버블이 꺼지는 조건은 금리인상과 대출규제 즉 LTV를 제한할 때 가능하다.
한국의 금리와 대출규모는 일본과 다르다
그렇다면 한국의 금리와 대출규모를 일본과 비교해 보자. 먼저 금리는 2013년 5월 2.5%, 2014년 8월 2.25% 2014년 10월 2%, 그리고 2015년 3월 1.75%, 2015년 6월 1.5%, 2016.6월 1.25%, 2017년 11월 1.5%, 2019년 10월 1.25%... 많은 시장 전문가들은 2020년에는 기준금리 1%를 예상하고 있다. 기준금리 1%는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역대 최초의 초저금리다.
-자료 : 한국은행
한국의 기준금리는 2012년 7월 3%에서 계속 낮아지다 2016년 6월에는 1.25%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2017년 11월 1.5%로 인상되었고 2018년 11월에는 1.75%까지 올랐다가 2019년 7월부터 인하하여 2019년 현재 1.25%까지 내려왔다. 2020년에는 1%를 예상하고 있고 앞으로도 금리 인하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하다. 여기까지 보면 금리 측면에서는 역사상 최저금리이므로 일본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금리 외에 대출규모를 함께 봐야 한다. 일본이 LTV의 100%였던 것과는 달리 한국은 정부정책으로 LTV를 최고 70%에서 40~60%로 제한해 왔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LTV 외에도 DTI(일본은 DTI 규제 없음)를 규제하여 최저금리임에도 불구하고 2중으로 대출을 규제하고 있다. 즉 일본은 LTV 100%까지 대출이 가능했지만 한국은 40~60%까지만 가능하다. 게다가 투기지역, 투기과열지역, 조정지역으로 규제하여 대출을 더욱 조이고 있다.
거기다 대출 건수도 제한하기 때문에 한국은 이본과 같은 버블붕괴 여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원리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리는 것이다. 물론 일본과 유사한 측면도 있다. 우선 경기둔화로 인한 버블이라는 점이다. 버블이 형성된 배경이 결국 경기둔화기였다는 것이다. 두 나라 공히 경기둔화기에 경기를 회복시키고자 금융완화 정책을 펼친 시기 동안 버블이 형성됐다. 게다가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면서 풍부한 유동자금이 부동산으로 쏟아졌고 때마침 은행권이 경쟁적으로 부동산 관련 대출을 확대했다는 점도 닮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많다. 금리와 대출규모 외에도 버블의 대상과 주체다. 일본은 오피스와 토지가 버블의 대상이었다. 일본 부동산가격의 폭등은 1983년 도쿄 도심 오피스와 상업용지에서 시작해 전국의 주택시장으로 확대되었다. 가격 급등은 1991년까지 9년 동안 이어졌다. 특히 1986년부터 1991년까지 6년간 6대 도시 평균지가는 3배나 뛰었다. 반면 우리나라의 버블은 토지가 아닌 아파트가 주도했다. 그중에서도 서울 강남 아파트가 주도한 것이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강남의 아파트는 74.9% 상승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해 준다. 그리고 버블 형성의 주체도 다르다. 일본은 기업들이 부동산 버블을 이끌었고 한국은 개인들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버블 붕괴, 주택의 공급 과잉
일본은 부동산 버블붕괴 이전, 즉 부동산 가격이 치솟던 1988년 전국 주택보급률이 이미 111%였다. 한국은 2010년 100.5%로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섰다. 일본의 인구도 핵심 주택구매계층인 35~54세 인구가 1990년 3,680만 명으로 정점에 달한 후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 2005년에는 3,400만 명 이하로 줄어들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핵심 주택구매계층의 인구가 줄어들고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는 상황에서도 일본에서는 대규모 신규주택 공급이 계속됐다. 일본 정부의 건설경기 부양책으로 건설업체들이 너도나도 신규주택을 계속 공급한 때문이다. 일본의 연도별 신규주택착공 추이를 보면 부동산 버블이 발생하기 전인 1980년대 초에는 매년 120만~130만 호 전후 수준의 신규주택이 착공됐으나, 부동산 버블이 시작된 1986년을 거쳐 1987~1990년 동안에는 연간 170만 호 전후 수준의 신규주택이 착공됐다. 또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기 시작한 1991년 이후 1997년까지 연평균 150만 호 수준을 유지했다. 일본은 부동산 버블붕괴를 막기 위해 건설업체들의 아파트 건설을 강력히 지원했다. 빠른 속도로 금리를 내려 주택금융공고와 은행이 주택자금대출 세일을 벌이도록 하는 한편 거액의 주택 감세라는 미끼를 던져 싸늘하게 식어가는 주택수요를 불러일으키려 애썼다. 수요를 무시한 채 정부의 각종 지원책으로 주택공급을 계속 늘렸던 것이다.
일본 버블붕괴의 복사판,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하지만 일본과 비슷한 버블붕괴를 겪은 나라가 있다. 미국이다. 바로 2007년 8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이다. 이 역시 금리와 대출규모에서 일본과 유사한 현상을 보였다. 일본이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수출길이 막히자 내수시장을 회복하기 위해 경제회복을 위해 급격한 금리 인하를 단행하자 유동성이 풍부해져 부동산으로 몰렸던 것이다. 미국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먼저 금리를 보자. 미국은 2000년 IT 버블이 터지면서 내수경기부양을 위해 2001년 6%였던 금리를 2003년 1%까지 급격하게 인하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낮은 금리였다. 그러면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금리를 5.5%까지 올려 최고점을 찍었다.
이번에는 대출규모를 보자.
2002년 6월, 백악관은 보도자료를 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소수민족 등의 주택소유비율 격차를 시장하기 위해 주택 구입 촉진을 의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해 부동산과 주택담보대출업계에 협력을 요청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부시 대통령은 ‘을 밝혔다. 이것은 약 4만 명의 저소득자에 대해 주택을 취득할 때의 계약금을 정부가 보조한다는 정책이었다. 이 구상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의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라고 미국인들이 깨닫기 전에 실시되었다. <서브프라임 크라이시스Sub-prime Crisis>,2008, 랜덤하우스 출판, 52쪽
‘아메리칸드림을 위한 계약금 구상’이라는 이 조치로 이제껏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없었던 미국의 저소득층들도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었다. 갑자기 대출문턱이 낮아지자 저소득층들도 너도나도 집을 사기 시작했다. 저금리에다 놀랍게도 대출규모 면에서도 일본과 흡사했다. 금융기관들은 앞다투어 저소득층들에게 “주택 렌트비보다 주택을 구입하여 대출이자만 갚는 것이 훨씬 저렴하다”고 홍보하면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LTV 100%까지 대출을 해주었다. 그 결과 집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역시 보다 못한 정부는 부동산 열기를 식히기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한다. 2004년 1월부터 1%에 불과했던 금리를 2007년 5월까지 5.5%인상했다. 단기간에 4.5배의 금리를 인상하자 이자를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금융기관들은 담보를 처분해도 대출금 회수가 되지 않아 파산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부동산 버블이 만들어져 붕괴되기까지 5년 2개월, 일본은 5년이 걸렸다. 따라서 버블붕괴는 금리와 대출규모라는 두 박자가 들어맞아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의 사례를 학습한 덕분에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일본과는 달리 기업들은 부동산 사재기에 동참하지 않았고 부채비율 역시 안정적이었다.
정말 속터지네.
그래서 한국은 부동산 버블이 터져요, 안 터져요?
문재인 정부 들어 23번째 8.4부동산 대책까지 발표되었지만 서울 아파트값은 잠깐 눈치보다 이내 슬금슬금 계속 오르고 있다. 서울 집값이 상승함에 따라 소득 1분위 즉, 저소득층이 서울 아파트를 구매하는 데 걸리는 시간(PIR, Price Income Ratio, 소득대비 주택가격 비율)은 33.1년에서 48.7년으로 늘어났다. 문재인 정부 들어 15.6년이 더 늘어났다.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그 어떤 누르기 정책도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특히 신축 강세로 최근 신축 아파트가 2~3억 원가량 오르는 등 부동산 상승장이 2015년부터 무려 5년째 지속되고 있다. 집값이 오르기만 하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한국도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어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것이 소설의 핵심이다. 꼭대기 아닌가 하고 잔뜩 움츠린 개미들은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박근혜-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서울의 아파트값은 올랐다. 특히 ‘부자 도시’ 강남3구를 보면, 강남구 84.8%, 서초구 88.6%, 송파구 77.3% 올랐다. 상승 폭도 중요하지만 더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저금리 기조에 따른 가계 부채다. 가계 부채 규모도 상당한 수준이다. 2018년 이미 1,600조를 돌파함으로써 2008년 금융위기 당시 900조의 2배를 넘어섰다. 특히 은행권 가계 대출은 2008년 500조에서 2018년 1,000조를 넘겨 10년 만에 2배로 증가했다. 여기에 신용카드 금액, 보험업 등을 포함해 신용 규모 전체로 본다면 1,500조에 육박한다. 그럼 부채가 이렇게 많이 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부동산가격 상승은 모두 부채로 인한 것이고, 그로 인해 버블이 붕괴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재 저금리 기조 등으로 국내 가계 부채의 규모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부채를 판단할 때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부채의 증가 속도이다. 마라톤을 100미터 달리기처럼 뛰면 호흡이 가빠 쓰러지기 마련이다. 급격한 부채 증가는 부동산 시장의 불안 요인이다. 특히 GDP 대비 부채의 비율이 증가하는 정도가 중요한데, 최근 5년간 상승장에서 GDP 대비 부채 상승률은 9% 수준이다.
<그림> GDP 대비 부채상승률
-자료 : 한국은행, 직방
<그림>을 보면, GDP 대비 부채 상승률은 2005년부터 2008년 부동산가격이 하락할 때까지 4년간 25% 올랐지만, 상승장이 시작된 2015년부터 2018년까지는 9%가 오른 상태이다. 외국의 경우 통상 약 4~5년 동안 +40% 정도의 속도로 부채비율이 증가하면 버블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10년 전 한국은 이 비율이 25% 상승하자 작은 버블이 터졌던 경험을 이미 경험했다.
한국의 시장참여자들은 IMF, 미국발 금융위기와 같은 외부의 큰 충격을 경험한 경험이 있어 버블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두려워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반증이다. 물론 앞으로도 이와 같은 외부 충격의 변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아직은 9%가 상승한 상태기 때문에 버블을 논하기에는 이른 단계라 할 수 있다. 또한 2018년 9.13부동산 대책으로 가계 대출규제가 본격화되면서 2019년에는 대출액 상승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버블붕괴를 이야기할 시점이 아니다.
저금리 기조에서 가계부채 증가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주택도 구매력이 뒷받침되어야 살 수 있다. 따라서, 고정적 지출 비용인 가구의 신용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는 것은 주택 가격이 버블인지 아닌지 판단하는데 중요한 하나의 변수로 작용한다.
<그림> 가계 현금성통화 대비 부채비율
-자료 : 한국은행, 직방
<그림>는 한국의 M2(가계 현금성 통화)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나타낸 것이다, 앞서 가계부채가 9% 증가했다는 것은 예금은행의 부채비율이고, 가계 측면에서 부채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대출에 준하는 일체의 가구 소비 규모를 가구의 현금성 자산인 M2와 비교해 비율을 나타낸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현금 자산 대비 대출비율은 85%였는데, 2015년부터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2018년에는 103%까지 증가한다. 즉, 우리나라 가구가 예금 등 현금성 자산보다 지출하는 비용이 더 많다는 의미다. 앞서 언급했듯이 어쩌면 저금리 기조 속에서는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직방 전문가 칼럼리스트, 부동산 스나이퍼는 이처럼 현금성 통화는 줄고 가계부채가 증가하면 머지않아 가격이 하락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우려할만한 단계는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바로 저금리와 양적 완화라는 두 가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금리는 시장참여자들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난 2005~2008년 사이에는 가계 대출 금리가 5~7%로 높은 편이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 때문에 주택 수요자들은 가급적 대출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대출이 증가하여 가계의 소비력이 줄어드는 상황이 되면 심리적, 경제적 압박으로 작용해 주택을 매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2019년 현재 대출금리는 3%대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그림> 한국의 가계 대출금리 추이
-자료 : 한국은행, 직방
<그림>에서 보듯이 대출금리는 2004년 5.86%에서 2008년에는 7%로 최고점을 찍었다. 그리고 계속 하락하여 2016년 2.91%까지 떨어지다가 점차 상승하여 2018년 3.39%를 기록했으나 2019년에는 3% 수준으로 떨어졌다.
현재의 대출금리는 2018년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금리 수준이다. 이러한 저금리는 가계의 이자 부담이 줄어 대출이 다소 늘더라도 주택을 매도하는데 동참하지 않게 된다. 게다가 그간의 부동산 시장에 대한 경험효과로 인해 서울 지역의 아파트 소유자들의 경우 ‘돌똘한 한 채’에 집중한 나머지 매도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하다. 오랫동안 대출 레버리지를 활용해 주택을 사면 그 집값이 이자보다 훨씬 큰 폭으로 오르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 집값을 잡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금리를 대폭 올려야 한다. 정부가 2008년 5~6%대 금리수준으로 올릴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불가능에 가깝다.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양적 완화의 기조 때문에 독불장군식으로 금리를 올릴 수가 없는 상황이다. EU는 마이너스 금리에 이르렀고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또한 FED(연방준비제도)에 계속해서 금리 인하를 요구하며 돈을 풀라고 압박 중이다. 그 압박의 강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급기야 연준은 추가 금리 인하에 나섰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적 여파에 대응한다는 핑계로 2020년 3월 15일 자로 기준금리를 '제로금리(0%)' 수준으로 인하한 것이다. 지난 3일 기준금리를 0.5% 인하한 데 이어 또다시 1% 추가 인하해 0.00%~0.25%가 됐다. 동시에 FED는 또 7천억 달러(852조) 규모의 '양적 완화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FED의 기준금리 인하에 곧바로 홍콩도 기준금리를 1.50%에서 0.86%로 대폭 인하했다. 이에 뒤질세라 한국도 기준금리를 1.25%에서 한꺼번에 0.5%를 인하하여 0.74%로 대폭 인하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부채 천국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 한국만 동참하지 않고 돈을 풀지 않으면 결국 원화 가치가 올라 환율이 떨어지고 수출로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한국 경제에 치명타를 주게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결국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낮춰 양적 완화를 하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예금 금리가 떨어져 저축을 통한 재테크가 의미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부동산 투자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각국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일제히 양적 완화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양적 완화에 부동산 버블은 언제 터질것인가 하는 것은 미래의 이야기다. 버블이 터질려면 불쏘시개가 필요한데 항간에는 중국이 가장 먼저 터질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미국이라고도 하지만 솔직히 그것은 아무도 알 수도 없고 예측하기도 힘들다. 버블은 터지기 전까지는 버블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태생부터 다르다
중앙대학교 김누리 교수는 jtbc의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의 강연에서 “오늘의 독일을 만든 것은 라인강의 기적이 아니라 아우슈비츠의 비극이다.”라고 했다. 아데나워 수상이 이룩한 경제발전이 독일(서독)의 급속한 성장에 토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이 오늘날 유럽연합의 주도국으로서 경제적인 위상뿐만 아니라 정치적, 도덕적 권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나치 과거에 대한 철저한 청산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저명한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Matthias Horx)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한국식 교육으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최고가 아니면 낙오되는 건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4.0시대, 즉 미래 사회에서는 지식을 아는 것보다 지식과 정보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진학이라는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교육모델에 머물러 있어 공부 잘하는 학생은 복종을 잘하는 사람, 제도에 순응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개성과 다름이 가볍게 무시되는 획일적이고 단세포적인 교육시스템의 결과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습성에 물들게 된 것이다.
부동산도 예외가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언론들은 집값이 조금만 상승하거나 하락하면 이때다 싶어 일본을 끌어들여 비교하기에 바쁘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것은 4~5년 후에 한국에서 유행한다’는 말이 사회 전반을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들먹이며 한국의 부동산도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태생부터 다르다. 일본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1950년 <공영주택법> 시행으로 정부주도의 주택공급 정책을 펼쳐왔다. 1962년 대한주택공사나 1967년 주택은행 설립 등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유목민의 전통을 계승한 기마민족의 특성으로 바닥난방식 주거형태를 선호하는 반면 일본은 바닥 난방이 되지 않는 다다미방의 가옥을 선호한다. 우리나라는 난방시스템을 도입하여 주택의 장점을 업그레이드한 아파트를 선호하는 반면 일본은 지진 등의 지리적 특성상 단층 주택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중반에 신도시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30년 빠른 1960년대 후반부터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중 오히려 우리나라의 신도시 모델을 벤치마킹하여 1965년 건설한 것이 도쿄 서쪽에서 30km 떨어져 있는 다마신도시였다. 그러나 다마신도시는 최근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 도쿄로 출퇴근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다 보니 직장인들이 출퇴근이 편리한 도쿄 시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인구가 줄어드는 시기에 도쿄 시내의 도심재개발이 활성화되어 공급이 늘어나자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신도시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졌다.
다마신도시는 고밀도 개발을 하는 우리와는 달리 저밀도로 조성된 쾌적한 신도시였다. 아파트 층수를 최대한 낮추고 동간 거리를 넓혀서 녹지공간을 충분히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노인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저밀도 개발은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젊은 층들은 선호하지만 먼 거리를 다니기 힘든 노인들에게는 살기가 불편한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단지 인근에 쇼핑센터나 병원 등이 있어야 하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각종 편의시설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노인들에게는 각종 편의시설이 아파트 근처에 모여 있는 한국의 고밀도 개발시스템이 더 적합한 것이다.
일본의 빈집 증가에 대한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은 현재 빈집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혹자는 일본의 빈집 증가를 보면서 역시 한국의 빈집을 우려한다. 빈집은 인류가 집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존재했다. 조선 시대에도 빈집은 있었고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빈집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빈집은 ‘자발적 빈집’인지 ‘비자발적 빈집’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발적 빈집이란 여러 채의 주택이 있어 빈집이 생겨도 경제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반면, 비자발적 빈집은 가계에서 빈집이 차지하는 자산가치가 높아 빈집이 될 경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단순히 빈집 증가 그 자체만 볼 것이 아니라 자발적 빈집인지, 비자발적 빈집인지가 더 중요하다. 자발적 빈집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과거와 달리 집은 자산가치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내구성 강한 소모품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빈집은 계속 증가하겠지만 과거와 같은 자산가치로서의 집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일본의 빈집은 2013년 820만 가구를 차지하는 데 이는 일본 전체 주택의 13.5%에 달한다. 자산가치로는 500조 원에 달한다. 2023년이 되면 전체의 21%에 달하는 1,397만 가구가 빈집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표> 일본의 주택 수 대비 빈집 비율
문제는 일본의 빈집 증가는 단순히 고령화 때문만이 아니라 공급과잉 등과 같은 전반적인 주택 제도 탓이 크다. 한국은 어느 정부 할 것 없이 주택 공급량을 간접적으로 제한해 왔지만 일본은 공급이 자유로웠다. 게다가 주택거래량도 한국처럼 활발하지 못하다. 인구 1억 2,000만 명에 연간 거래되는 주택 건수는 100만 가구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한국은 5,000만 명 인구에 연간 100만 건(2015년 ~ 2017년)이 거래되었다.
새집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일본은 기존 주택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지만, 한국은 자산증식 차원에서라도 재개발, 재건축대상 아파트 등과 같은 기존 주택을 적극적으로 매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구절벽으로 부동산 시장이 혼란에 빠져 장기적으로 일본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일부 학자들이나 언론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한국의 빈집현황
-자료 : 국토교통위원회, 황희 의원실, 단위 : 호
<인구와 부동산의 미래>에서 저자는 “일본 부동산에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본 도심의 빈집이 늘고 아파트 가격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에서 한국이 얻을 교훈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다만 한국 부동산 시장과 정책입안자들이 일본에서 얻을 것은 부동산 트랜드와 재개발, 재건축 관련 정책이다. <도시정비사업>과 도시재생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부동산 시장이 일시적으로 침체에 빠지면 언론에서는 집값이 너무 올라 ‘부동산은 끝났다’면서 호들갑을 떤다. “기존 집이 팔리지 않아 새집으로 이사를 가지 못할 정도로 거래절벽이 심각하다 보니 집값이 대출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른바 ‘깡통주택’이 등장했다, 하우스푸어가 양산됐다.”하면서 대못을 박는다. 물론 정치, 경제 및 사회구조가 비슷한 일본 부동산 시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버블 형성 원인과 확산 및 붕괴과정, 정부의 버블 억제책, 주택수요에 대한 구조 측면 등에서 일견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버블의 수준, 주택 소유에 대한 인식, 주택담보대출의 건전성 등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주택담보대출 관련하여 일본에 비해 LTV(담보인정비율), DTI(총부채상환비율) 등 대출규제 강도가 강하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블 속에 있을 때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모두가 이득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버블이 한 번 발생하게 되면 경제적으로 커다란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일본의 경제백서의 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일본의 장기불황에 대해‘저출산-고령화’를 꼽는다. 특히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한때 일본인의 자랑이었던 장수가 지금은 경제 전반에 암적인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고령층은 젊은 층보다 상대적으로 부자이다. 즉 노인들은 버블붕괴 이전에 일본 경제의 전성기 시절, 버블로 인한 혜택을 받아 부를 어느 정도 쌓은 사람들이고 젊은이들은 버블붕괴 이후 일본 경제 침체기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상대적으로 부자인 노인들이 소비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장기불황의 큰 원인으로 꼽힌다.
한국은 국토의 면적이 좁고 인구가 대도시로 몰리다 보니 유독 부동산에 대한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부동산 ‘쏠림 현상’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의 부동산 자산(2018년)은 GDP 대비 7배 수준이다. 우리나라가 생산활동으로 얻은 부를 한 푼도 쓰지 않고 7년을 모아야 한국의 국토 전부를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세계 주요 국가·자산별 GDP 배율을 보면, GDP 대비 부동산 배율은 일본 4.8배, 미국 2.4배, 캐나다 3.9배, 영국 4.4배, 프랑스 5.5배 그리고 호주는 5.8배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돈이 부동산에 묶여 있는 것이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지부진했던 미국의 부동산 시장은 다시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2017년 들어 다시 대출이 증가하면서 금융위기 직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뉴욕연방은행은 미국 가계부채(2017년 1분기)가 총 12조 7,300억 달러로 2008년 3분기의 12조 6,800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연방주택금융청의 발표에 따르면 주택가격지수(2017년 6월)는 사상 최고치를 보이고 있고, 주거비 상승률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상회한 기간이 62개월이나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소비자물가 통계가 작성된 1953년 이후 최장 기록이다.
문제는 미국 부동산 시장이 호황을 보이는 것은 외국인, 특히 중국인들의 주택 매입이 그 주요 원인이다. 미국 NAR(전국부동산협회)에 따르면, 2016년 4월부터 1년간 미국 주거용 부동산에 대한 외국인 투자 규모가 1,530억 달러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역대 최고액에 달한다. 외국인 중 중국인이 주택을 많이 매입했는데 4만 572가구에 317억 달러어치를 사들여 상승세를 뒷받침했다.
결국 한국의 부동산 쏠림 현상이 다른 주요 국가들보다 심하다는 것은 성실히 땀흘리는 경제활동을 하기보다는 건물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역설적이지만 부동산에 대한 쏠림 현상이 심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동산에 투자할 기회가 더 많아지고 결과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정부의 주택 정책이 ‘소유’에서 ‘거주’개념으로 바뀌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정책이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유럽 부동산 시장도 2014년부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EU(유럽연합, 2015년 4분기) 28개국 주택가격지수는 전년동기 대비 4.8% 상승한 103.8을 기록했다. 이 중 호주 부동산 시장도 정점으로 치닫기는 매한가지다. 시드니와 맬버른의 주택 가격(인구와 부동산의 미래, p.162)이 2009년 이후 두 배로 올랐다. 최대도시 시드니의 주택 가격(2009년 1월~2017년 6월)은 110.9%나 상승했다. 집값이 계속 오르자 시드니가 속한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는 외국인 주택구매자에게 부과하는 특별세율(2017년 7월)을 4%에서 8%로 대폭 올려 진화에 나섰다.
일본이 망했으면 좋겠다?
"일본이 망했으면 좋겠다" "일본 부동산 시장이 폭망했으면 좋겠다"
이것은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감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민 정서를 바탕으로 한 분석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어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마저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다. 그렇다고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20년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일본은 우리의 가까운 미래’라고들 한다. 일본에서 유행한 것은 3~4년 후에 한국에서 유행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만큼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아 왔고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란 말이 한국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일본은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 버블이 형성되면서 비정상적으로 자산 가치가 상승했다. 이에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정부의 미약한 대처와 금융시장 부실화 등이 겹치면서 장기 불황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담보가치보다 더 많은 대출을 마구잡이로 해주다 보니 금융권의 부실 채권이 문제가 된 것이다. 버블이 붕괴하자 무리한 대출로 사들인 주식과 부동산은 끝모를 추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기업 및 개인이 가지고 있던 부동산 가격이 낮아지면서 그 돈을 갚을 능력이 없어지자 은행들은 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의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고 출생률 저하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한때 인구가 너무 많아서 섬이 바다에 가라앉을까봐 걱정했던 일본은 인구감소와 급격한 고령화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자본주의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경제적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국 빈집 쇼크 덮치나?
2050년 우리나라에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방치되는 빈집이 모두 302만 가구로 전국 가구수의 10%가 넘을 것으로 전망됐다. 2017년 한국국토정보공사(LX)가 통계청의 인구 자료 등을 토대로 2050년 우리나라의 주거문화를 예측한 ‘대한민국 2050 미래 항해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택 수는 2010년 1762만 가구에서 2030년 2496만 가구, 2050년에는 2998만 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이에 따라 주택보급률은 2010년 101%에서 2050년 140%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2050년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147%, 경기도는 141%로 예측됐다.<서울신문>, 2017.01.09.
한국의 빈집 수는 2010년 73만 가구(빈집 비율 4.1%)에서 2016년 84만 가구(4.3%), 2030년 128만 가구(5.1%), 2050년에는 302만 가구(10.1%)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됐다. 보고서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지 않은 폐가를 포함하면 실질적인 빈집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2050년 수도권에서만 100만 가구가 빈집이 될 것으로 봤다. 경기도는 55만 가구, 서울 31만 가구, 인천도 14만 가구가 빈집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LX는 빈집 증가가 집값 하락 등 지역경기 침체로 이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보고서는 “저출산·고령화로 인구가 줄면서 입지가 좋지 않고 노후된 주택들은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결국 범죄나 방화, 청소년 탈선 등 사고가 잦은 우범 지대로 전락하거나 부동산 가격을 하락시켜 지역 경제를 어렵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주택금융공사 측은 “주택의 소비 단위는 인구가 아닌 가구인데, 가구 증가는 2035년까지 지속될 것”이라면서 “1인 가구 등 가구 분화가 가속화되면서 적정 수준의 주택 수요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1인 가구의 확산으로 빈집이 예상보다 빨리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흔히 일본 경제를 보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예측한다고 할 만큼 그동안 옆 나라 일본과 경제적으로 비슷한 상황이 많았다. 저성장, 저물가, 과도한 경상수지 등 지표로 나타나는 증상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 침체의 선행 조건들이 비슷하다. 그래서 일본의 경제 상황을 먼 나라 남의 일로만 치부하긴 힘든 상황이다. 부동산 시장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 부동산 시장은 경제 만큼 닮은 점이 많다. 우선, 두 나라 모두 상당기간 이어진 저금리를 기반으로 한 부채형 부동산이 많았고 또 경제를 보더라도 수출 주도형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특히 일본은 현재 생산활동인구는 점점 줄어드는데 그들이 부양해야 할 인구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라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한국의 모습과 비슷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13.8%로 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데, 전 세계에서 제일 빠른 수준이다. 일본은 집값이 하락하기 시작한 1992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었다. 한국의 경우 2017년을 정점으로 2018년부터 줄기 시작했다.
세계는 과거 일본의 버블붕괴를 통해 학습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책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버블이 어느 나라에서 터지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버블이 터지면 해당 국가는 물론 전 세계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세계의 경제구조가 과거 일본처럼 일본 혼자 독박을 뒤집어쓰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 입장에서는 버블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핵심지역에 계란을 많이 담는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의 부동산시장이 침체되면 우리나라에도 일본의 부동산 버블붕괴가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그러나 양국의 부동산 버블은 그 대상과 형성의 주체가 달라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 확률은 크지 않다. 다만 한국이 고령화 시대로 들어서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일본 단카이세대의 부동산에 대한 인식변화 트렌드를 파악하고 부동산 자산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다시금 재정비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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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감소해도 집값이 하락하지 않는 이유
우리나라의 인구수 정점은 2020년이었다. 향후 인구가 줄어들 것으로 보기 때문에 2020년 인구가 최고치로 봐도 무방하다. 2020년 5,180만명이었다가 2021년 19만명, 2022년 20만명이 감소해 5,140만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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