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경영/꿈과 비전

속도중독자

김부현(김중순) 2009. 4. 13. 15:40

혹시,

그렇게 급하지 않은데도 괜히 발걸음이 빨라지고,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끼어들고,

기다림이 금새 짜증으로 이어지고,

일과표의 비어 있는 시간이 의미없게 느껴질 정도로 바빴던 적이 없었는가?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속도의 중독에 빠져 있다.

예전에는 중독 하면 담배나 술, 마약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요즘은 성형중독이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는데다, 여기에 더하여 이제는 바야흐로 '속도중독의 시대'에 살고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를 '강자와 약자' 대신 '빠른자와 느린자'로 구분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래충격 Future Shock>이라는 책에서 너무나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변화가 일어나서 생기는 정신의 분열과 방향성 상실을 예고했다. 일종의 속도경쟁에 대한 경고였다.

그가 말하는 정신적 혼란은 '변화의 충격' 때문이 아니라 '변화의 속도'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속도의 건너편에는 항상 게으름과 미룸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윌리엄 너스가 그의 저서 <미룸의 심리학>에서 한 말이다.

"모든 형태의 미룸은 기본적으로 '내일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 미룸이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지금 미룬 것은 나중에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으로 현실을 오도한다. 그러나 미루는 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그런 미래는 일어나지 않는다."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원의 심리학과 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그의 저서 <몰입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일은 필요악으로 여겨진 반면, 쉴 수 있는 것,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로 받아들여졌다. 여가를 즐기는 데는 특별한 재주가 필요 없고 아무나 즐길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여기는 일보다 더 즐기기가 어렵다. 그것은 저절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자인 산드로 페렌치는 환자들이 일요일에 유달리 히스테리와 우울증 증세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간파하고 '일요신경증'이라고 불렀다.

휴일과 휴가기간에 심리상태가 악화되는 보고가 잇따르고 퇴직 후, 만성우울증을 앓는 경우도 많다.

연구조사에서 사람이 어떤 목표에 집중할 때 심지어 몸까지 더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주말에 일 없이 집에 혼자 있는 사람들은 몹시 아프다고 호소할 때가 많다. 이 모든 증거들은 게으름이 천성이 아님을 시사한다. 목표가 없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이 없을 때 사람들은 차츰 의욕과 집중력을 잃기 시작한다."

 

그는 게으름은 천성이 아니라 '목표와 관계를 잃을 때 나타나는 상태'라고 보았다.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목표와의 관계를 회복하면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게으름이나 나태함은 포기와 좌절에 직면했을 때 더욱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즉 도전을 포기하면 바쁠 이유도 없고 방향성도 없어져 나태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극복할 수 있는 조그마한 좌절에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는 '지키는 삶'에 치중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지키겠다는 이른바 '지키는 삶'은 너무 안이한 선택이다. '지키는 삶'보다는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에서 꿈이 없다면 우리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기 시작한다.

쓰레기 같은 게으름은 삶의 희망을 무섭게 옭아맨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나태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이 들면서부터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하면서 찾아온 친구들이다.

 

밥 세끼 때우기에도 벅차기만 했던 나의 어린 시절,

그래도 당시에는 산과 들, 온 세상은 나의 놀이터였다. 해지는 줄도 모르고 동네 어귀에서 자치기, 땅따먹기 그리고 논두렁뛰기 같은 놀이를 즐겼다. 이 놀이들은 때론 위험한 놀이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놀이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100원짜리 고무공으로 빈 논에서 공을 찰 때는 칠흑 같은 어둠도, 배고픔도, 엄마의 꾸중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우리에게 전쟁터로 변해갔다. 늘 실체도 불분명한 가상의 적과 싸워야 했고,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안전한 진지'를 구축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애초부터 게을러터진 존재였다면 오늘과 같은 문명세계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특성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난 후에야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누군가는 미리 길을 개척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들에 의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들의 꿈으로 세상은 발전되어 가고 있다.

꿈이란 자신의 강점을 바탕으로 원하는 곳으로 에너지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꿈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꿈을 빼앗아야 하는 제로섬게임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할 때 더 큰 결과가 나오는 시너지효과를 내는 게임이다.

 

하지만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이른바 '바닥체험'도 변화의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바닥에서 자포자기 해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바닥의 반동을 이용하여 용수철처럼 튕겨오르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바닥은 절망과 꿈이 함께 존재하는 변곡점이다. 바닥에서 튀어오르게 하는 용수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책이다.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는 말처럼 말이다.

 

지금도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하면 밥은 빌어먹지 않는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백번 맞는 말씀이다. 물론 부지런하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변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는 더 이상 먹고 사는 것만을 위해 살지는 않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윌리엄 포겔의 말이다.

"무엇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는 해결됐지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는 해결되지 못했다. 삶의 수단은 있으나 삶의 목적은 없다. 물질적 풍요는 극소수 사람들이 자기실현을 추구하던 상황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추구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변화시켰다. 정신적 불평등은 이제 물질적 불평등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는 더 이상 '근면과 성실'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보다는 '창의적' 정신과 상상력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측정하려 한다. 따라서 '획일적인 조직인간'에서 벗어나 '창의적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욕구가 커지고 있다.

지금은 과거처럼 먹는 것이 부족해서 영양실조에 걸리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정신의 영양실조는 정신병이나 정신적 고통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정신적 고통이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허황된 성공과 부와 같은 외적인 결과만이 강조되는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내면의 소리를 놓치기 쉽다. 자신의 꿈을 잃어버린 채 남의 꿈만 쫓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강점을 외면한 채 멋진 결과만을 추구하다보니 결국 남의 꿈을 흉내 내기에 급급하다.

남을 흉내 내는 삶은 결코 만족스럽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재미도 없고 나아가 즐기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다보니 흥미도 떨어지고 나태해 지게 된다.

 

사람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뻗어나가려는 힘이 강한 곳을 잘 자라게 해 줄 때 열정이 생긴다.

잘 할 수 있는 일에 미쳐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하기 싫은 일이나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즐겨보라. 즐거움은 스스로 찾는 것이다.

즐겁지도 않는데 어떻게 즐길 수 있는가 하는 말은 하지 말자.

즐거울 때 웃고, 화날 때 웃는 것은 동물원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더 이상 남의 꿈을 흉내 내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강점을 찾아보자.

현재의 삶이 자꾸 덜커덩 거린다면, 남의 꿈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그리고,

일상이 지나치게 바쁘다면 이 역시 남의 꿈을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느라 바쁜 것은 아닌지를 따져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