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다시 읽고 깊이 읽기

1. 다시 읽고 깊이 읽기-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김부현(김중순) 2012. 3. 19. 16:06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다시 읽고, 깊이 읽기......................................

 

인문고전 독서는 두뇌에 특별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물론 처음에는 고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렵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 진도가 일주일 또는 한 달씩 늦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기면 고통은 기쁨으로 변한다.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천재들이 쓴 문장 뒤에 숨은 이치를 깨닫는 순간 두뇌는 지적쾌감의 정점을 경험하고,

그 맛에 중독된다.

그리고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뻔한 꿈밖에 꿀 줄 모르고 평범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던 두뇌가 인문고전의 저자들처럼 혁명적으로 꿈꾸고 천재적으로 사고하는 두뇌로 바뀌기 시작한다. (....) 

천재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접촉한다는 자체가 중요했다.

물과 식물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식물에 물을 주고 나중에 보면 물의 흔적조차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식물은 자란다.

인문고전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20-21쪽)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전자는 후자에게 많은 것을 금지시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문고전 독서였다.

조선시대 양반과 상놈의 기준은 독서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미국에서 백인 지배계급은 흑인 노예계급에게 독서는 물론 문자교육 자체를 금지시켰다. (27-28쪽) 


 

21세기 지구의 지배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선진국들은 인문고전 독서에 열심이다. 그런데 21세기 지구의 대표적인 피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후진국들은 인문고전 독서와는 거리가 멀다.

왜일까?

지배계급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것이다. 인문고전 독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보이지 않는 손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공공연한 비밀로 작동하고 있다. 국민들의 사법부 불신의 근원지도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토익공부를 해야지 인문고전을 읽어서 뭐하나'라고 생각하는 우리와는 달리 미국 명문 사립중고교 독서 열기는 놀랍다. 이런식이다.

 

1.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소화한다.

2. 도서관에서 플라톤의 <국가>를 주제로 쓰여진 책들을 찾아 읽는다.

3. 플라톤의 <국가>를 주제로 에세이를 쓰고 토론한다.

 

또한 미국 세인트존스대학은 4년 내내 인문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는 것이 교육과정의 전부다.

그리고 예전에는 없이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허드렛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인문학 독서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들은 정계, 재계, 관계를 막론하고 퇴근 후 위대한 책을 읽고 연구하는 '독서모임'에 주로 참여한다. 그 모임의 일원이 되지 못하면 앞길을 장담할 수 없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퇴근 후 '독서모임'에 참여한다고 하면 달나라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직장 상사는 '승진을 포기한 놈'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퇴근 후 그들이 가는 곳은 분명하다. 향후회와 동문회다.

향우회와 동문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또한 분명하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의 힘을 통해 보충하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을 인간관계라고 포장한다. 모임을 보면 토론은커녕 술이 주제가 되기 일쑤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선진국이다.

우리는 아니다.

그 차이는 퇴근 후 독서모임에 가느냐, 향우회모임에 가느냐의 차이다.

경제규모 세계 7위라는 말, 진부하다.

이젠 그만 써먹자.

 

미국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두 가문을 조사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의 영적, 지적 수준이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를 조사했는데 그 대상으로 조너선 애드워즈와 마커스 슐츠 가문을 선정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 사람이었고 같은 지역에 살았으며, 같은 경제력을 가졌고 같은 수의 가족이 있었다. 다만 영적으로 <성경>을 삶의 지표로 삼고, 지적으로 인문고전 독서에 힘쓰는 전통을 후손에 물려준 조너선 에드워즈와는 달리,

슐츠는 <성경>에 무관심하고 인문고전 독서에 문외한인 전통을 물려주었다.

 

위원회에서 5대에 걸친 그들의 가문을 추적 조사했다.

먼저 조너선 애드워즈 그의 후손은 896명이었다. 후손들을 보면 1명의 부통령, 4명의 상원의원, 12명의 대학총장, 65명의 대학교수, 60명의 의사, 100명의 목사, 75명의 군인, 85명의 저술가, 130명의 판검사 및 변호사, 80명의 공무원을 배출했다.

 

반면 마커스 슐츠의 후손은 1,062명이었다. 전과자 96명, 알코올중독자 58명, 창녀 65명, 빈민 286명, 평생 막노동으로 연명한 사람 460명이 나왔고, 미국 정부에서 후손들에게 1억5천만 달러의 국고보조금을 지급했다.

(55-56쪽)


 

두 가문의 차이는 독서력의 차이에서 기인되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독서하는 사람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결국 책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독서는 나라와 가문과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니 나라와 가문과 개인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프러시아(프로이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프러시아는 유럽 열강의 반열에 오르고 싶었다. 그러려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전쟁터로 달려가는 군인들과 공장에서 쉴 새 없이 물건을 만들어내는 육체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그 두 가지는 강대국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인 군사력과 경제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직업 군인과 공장노동자를 엄청나게 많이 배출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프러시아 지배계층의 눈에 어느 날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계층의 자녀가 들어왔다. 그들은 농민의 자녀들에게 직업 군인과 공장 노동자가 되는 교육을 시키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학교를 세웠다. 후일 프러시아는 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 독일제국은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한층 더 발전시켜서 아예 군대식 학교를 세웠고 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일제는 프러시아 즉 독일에서 시작된,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제도를 그대로 수입해서 당시 식민통치하에 있던 우리나라에 이식했다. 당신이 받은 학교 교육과 지금 우리나라 10대들이 받고 있는 학교 교육은 직업 군인과 공장 노동자를 생산하는 게 목적이었던 교육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다. (....)

 

교사와 교육부는 프러시아에서 유래된 나쁜 공교육 시스템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64 -65쪽)


 

우리나라에는 초등학생 영재들은 넘쳐난다.

대부분의 영재들은 중고등학생이 되면 평범해진다. 따라서 영재에서 천재로 넘어가는 아이는 전혀없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다.

왜일까?

영재는 지식의 영역이지만 천재는 지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은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삶을 흔드는 변화는 지혜가 있을 때 가능하다.

경영학책은 지식의 영역이고 인문학은 지혜의 영역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교실에선 질문과 대답이 없기로 유명하다.

질문하는 학생도 없고 교사도 질문에 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서로의 생각이 꼭 들어맞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때 내가 가장 싫어했던 과목은 산수였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수학이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통계학과 경영수학이었다. 특히 수학시간만 되면 난 물음표가 사라졌다. 모르니까 궁금한 것도 없었고 선생님께 질문할 수도 없었다. 질문하지 않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또래들도 질문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었다. 학생이나 교사나 모두 지식을 쑤쎠넣기만 하는 교육제도 탓이 크다.

속된 말로 가방 끈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멍청해지는 것이다.

멍청하다는 기준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의미다.

토익 900점이나 학점 4.3은 지식차원이지 지혜의 차원이 아니다.

인문학적으로는 이들을 멍청하다고 해도 크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학교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고도 두뇌와 삶에 어떤 변화도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당신의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머리가 비상해지고 삶의 지혜가 쌓이는 게 아니라, 두 눈의 총기를 잃고 지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는 본질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66쪽)


 


 

역사책을 뒤져보면, 최초의 철학자는 최고의 경제인이었다.

우리는 철학이 경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철학 그 자체에만 매진하는 것은 경제와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철학으로 단련된 두뇌가 경제에 뛰어드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철학자의 두뇌를 가진 사람은 순식간에 경제를 지배해 버린다. 결제활동이 곧 두뇌활동이기 때문이다.(....)

 

철학고전은 사람의 두뇌를 차원이 다르게 바꾸어버린다. 사고의 수준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철학고전 독서로 다져진 두뇌의 시장의 본질을 본다. 평범한 책만 읽는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볼 수 없는 그 무엇을 본다.

서점에는 워렌 버핏, 조지 소로스, 피터 런치, 짐 로저스 등등 자본주의 세계의 최고 승자들의 투자 비법을 담은 책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의 책을 죽어라고 읽고 그들의 비법을 열심히 따라한 사람 중에 놀라운 이익을 실현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치열한 인문고전 독서로 두뇌의 수준을 한차원 높인 뒤에 터득한 투자의 비결을 담은 그들의 글을, 인문 고전을 전혀 읽지 않은 두뇌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투자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오토바이 운전 면허도 없는 사람이 세계 최고의 오토바이 곡예사가 쓴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과 같다. (112-113쪽)


 

얼 쇼리스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한 말이다.

"여러분은 이제껏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인문학은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외부의 어떤 '무력적인 힘'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칠 때 무조건 반응하기보다는

심사숙고해서 잘 대처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할 공부입니다."

 

최초의 철학자는 최고의 경제인이었고, 부를 다루는 학문을 창시한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경제학자는 철학과 교수이자 철학 고전 저자였다.

경제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철학고전에 정통해야 한다.

두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를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우리나라의 경제학이, 우리나라의 경제가 서구에 종속되어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두뇌가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117쪽)


 

2012년 3월 15일 몇 년간의 국론분열에 방점을 찍고 '한미 FTA'가 발효되었다.

우리나라는 0시를 기해 발효가 되었지만 미국은 첫날부터 전자통관 작업 시스템 미비로 발효 시점이 6일간 연기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이게 사실이라면 참 한심하다.

골프채 들고 멋부릴 것이 아니라 FTA 관계자들은 계약서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이 하나의 사례가 미국과 우리나라가 한미 FTA를 바라보는 단적인 견해차다. 누군가의 말장난에 농민들은 벼랑끝으로 내몰려 소를 굶겨 죽일 지경에 처했다. 미국과의 FTA가 마치 길가다 금덩어리를 주운 것처럼 황금빛 미래를 이야기하는 국회의원들의 진정성, 어디까지 진실인가?

내 의문점의 클라이막스는 FTA로 인해 농어업과 같은 피해 보는 분야에 대한 지원이 왜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피해보는 분야에 대한 지원은 FTA로 인해 상대적으로 반사이익을 보는 자동차, 전자와 같은 분야의 이익금에서 충당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만 그런가? 

 

우리나라의 경제학자들은 서구의 전설적인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급급해 왔다.

한국 경제학계의 거목이라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케인즈나 하이에크보다 더 위대해지거나 동등해지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서구의 경제학자들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섬기는 데 만족했던 듯하다.

나의 이런 발언은 경제학계의 현실을 모르는 무식한 소리일 수도 있고 한국 경제계 거목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무례한 소리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설령 욕을 얻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외치고 싶다.

한국의 경제학은 변해야 한다고. 목숨걸고 변해야 한다고.

서구의 경제학보다 우월한 아니 최소한 동등한, 한국만의 경제학을 만들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금융 종속인 상태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IMF는 또다른 형태로 반복될 것이다. (123쪽)


 

한국 경제학이 변화하려면 경제학자들이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

아담 스미스나 케인즈처럼 사고할 수 있는 두뇌를 갖춘 후에 경제학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건 비단 경제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경영학이나 무역학 등도 마찬가지다.

필자 역시 경영학을 공부했지만 미국 경영학자들이 쓴 번역서로 공부했다. 우리가 국민소득 2만불에서 오락가락하는 이유는 인문학을 무시한 경제위주의 성장정책 탓이 크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의 경영경제학은 미국식 모델을 그대로 수입한 것이다.

일부 우리식에 맞게 수정하려는 노력들도 있지만 들어치나 매치나 결국은 미국시스템의 변형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은 미국시스템의 우수성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만 맞는 말이다.

미국 경제경영 시스템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단적인 사례가 월가의 붕괴와 서브프라임 사태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투자자들의 삶을 조사해보면,

1) 독서광이다,

2) 최고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가다, 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에 왜 세계적인 투자자가 없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투자자들은 그들만큼 인문고전을 읽지 않는다. 물론 투자 기법이나 매매 기법을 다룬 책들은 다들 열심히 읽는다. 하지만 그것은 '독서'라기보다는 '재테크 공부'에 불과하다. 그러한 독서는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지 못한다. 세계적인 수준의 관점에서 보면 고작해야 푼돈을 버는 기술이나 가르쳐줄 뿐이다. (134쪽)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군중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그래서 군중은 철학자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누가 군중이 가지 않는 곳을 갈까? 당연히 군중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만이 부자가 될 수 있다.(.....)

경제시스템은 필연적으로 군중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만이 승자가 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134-135쪽)


 

눈앞의 이익이나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가 있어야 한다. 철학하는 세포는 오직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군중은 재테크 서적은 읽어도 철학고전은 읽지 않는다. 즉 군중의 두뇌에는 '철학하는 세포'가 없다.

그 결과 투자시장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그동안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은 '시장과 다르게 사고하라'는 말을 순식간에 망각하고 자신의 재산을 '철학하는 세포'를 가진 세계적인 추자자들에게 고스란히 바치고 마는 것이다. (137쪽)


 

서양의 천재 경제학자들이 만든, 우리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아름답게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기만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지혜는 책 속에 있지 않다. 지혜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세상에는 소위 인문고전 마니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어떤 교수들은 평생 인문고전만 파고 든다. 하지만 그들의 독서는 세상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인문고전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인문고전을 통해 내면의 지혜를 일깨우는 대신 말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나 민턴 프리드먼 같은 교수들이나 존 템플턴, 피터 린치 같은 투자자들은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두뇌속에 '철학하는 세포'를 만든 뒤, 자본주의 경제시스템과 월스트리트 금융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은 사람들이다. (138쪽)


 

"貧者因書富 富者因書貴 가난한 사람은 독서로 부자가 되고, 부자는 독서로 귀하게 된다." (왕안석)

 

 회사를 세우는 이도, 회사를 이끄는 이도, 회사에서 일을 하는 이도, 회사의 고객이 되는 이도 인간이다.

즉 경영은 인간이다.

인문고전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특히 경영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인문고전이 길게는 수천 년, 잛게는 수백 년 동안 각 시대의 리더들에게 철저하게 검증받은, 인간에 관한 최고의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각 시대의 리더들은 문학고전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철학고전을 통해서 인간의 생각을, 역사고전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배웠다. (146쪽)


 

현대 경영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달리 말하면 고대 그리스 철학 즉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모르고서는 피터 드러커나 찰스 핸디로 대표되는 현대 경영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피터 드러커와 찰스 핸디만 파고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뿌리는 보지 못하고 잎사귀와 가지에 초점을 맞추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155쪽)


 

이계안은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구에서는 인문학과, 고고학과, 문화인류학과 등 소위 인문계열을 최고의 학과로 인정한다. 영국의 이튼스쿨을 나온 명문가 자제들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의 고고학과로 진학한다. 런던의 금융 시장에서 일을 하는 최고의 수재들은 경제학과나 경영학과 출신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이나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지금 스펙에 열중하고 있는 청춘들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의사, 법과, 경영학과의 시대는 가고 인문학 전공자가 대접받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제 인문학에 눈을 돌려야 할 시점이다. 모두가 스펙쌓기를 멈출 것을 경고하지마 여전히 도서관에선 스펙열풍으로 가득하다.

 

잠깐 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창피하지만 속된 말로 나는 인문고전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창을 열면 신발공장 너머로 낙동강 갈대숲이 햇살에 서걱거리던 대학시절 부산 엄궁동 산기슭의 2층 작은 방, 그 방 한쪽에 덩그러니 꽂혀있었던 인문고전 몇 권. 그 책들은 지금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불편하기 짝이없는 존재들이다. 기타를 배우던 동아리 선배가 추천해 준 플라톤의 <국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 캠퍼스 연못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작은 벤치에서 같은 과 친구가 읽던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같은 책들이다.

속성 성공비법이나 일을 잘하는 법과 같은 기법 위주의 책들은 교체가 활발했지만 인문고전들은 30년이 다 되도록 지하철 경로우대석마냥 떡하니 책꽂이를 차지하고 있다. 처음엔 대학생이니까 그냥 폼 잡을 요량으로 즉 책꽂이 비치용으로 몇 권 구입한 것들이다. 한마디로 책을 펼치기가 겁났다. TV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머리가 하얘진다'는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통독은 했지만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백색의 머리 상태.

인문고전만 펼치면 나는 희한하게도 난독증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심심찮게 이해력이 부족한 머리통에게 화풀이를 하고 몇 줄 읽다 내팽개치기가 일쑤였다. 오랫동안 정답과 해답풀이를 다 알려주는 교과서와 참고서에 길든 머리가 장자와 칸트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용맹무쌍하게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비범한 철학자들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6개월 동안 그렇게 철학책과 인문고전을 붙잡고 씨름했지만 재미라는 건 눈꼽만큼도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없는 책도 있구나'를 연발했다. 삼국지 시리즈 10권은 일주일이면 재밌게 읽을 수 있었지만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출처불명의 괴상한 책은 단 몇 줄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독서하는 법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난해한 글을 몇 줄 읽고 그 알량한 지식을 뽐내고 싶어던 탓이다.

신윤복 교수는 '독서3讀'(내용, 저자, 독자)을 강조한 바 있다. "독서란 먼저 책의 내용을 읽고, 책을 쓴 저자를 읽고, 그 책을 읽고 있는 자기를 읽어야 진정한 독서다.'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그 책을 통해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 책을 읽는 것은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글을 통해 자신의 언어와 사고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저저들의 사상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끌어앉고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나의 인문고전 독서에 대한 어슬픈 불장난 시계는 그후 10년간 고장나 있었다. 물론 그 후 지금까지는 잘 작동중이다.

 

(.....)

물론 그렇지 않은 모임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몇몇 토론모임은 일주일동안 집에서 인문고전 십 수 쪽 읽고 와서 커피 마시며 독서 감상 몇 분씩 말하고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어떤 뜨거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그들의 독서능력은 언제나 제자리였고, 깨달음이 없으니 치열한 토론이 성립될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다들 이런 식으로 읽나보다 하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고, 그 고정관념은 그들의 사고능력을 망가뜨렸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도리어 바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인문고전은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미친듯이 지독하게 읽어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이 온다.  (215쪽)


 

최악의 독서환경 아래서 힘들어하던 나에게 힘을 준 것은 천재들이었다.

정약용은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몰려 강진으로 유배됐다. 감옥과도 같은 그곳에서 그는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이나 날 정도로 치열하게 독서했다.

 

정조는 끝도 없이 밀려드는 정무와 당파싸움 그리고 암살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문고전 독서는 피난처이자 휴식처였다.

 

피렌체에서 화형선고를 받았던 단테는 추격자들을 피해 도망다니던 와중에 고전을 읽고 글을 썼다. 당시 그는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제공받지 못했다고 한다.

 

병약한 몸이었던 파스칼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치통, 머리가 빠개질 듯한 두통, 위와 기관지에 생긴 질병, 뇌의 심각한 장애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독서에 몰두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도 매일 인문고전을 읽고 연구했으며 후일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조차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몰래 반입해서 읽었다. (220쪽)


 

조선왕조 500년 동안 책을 읽지 않는 마당쇠가 책을 읽는 선비를 지배한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던가.

여기서 말하는 선비는 지배계급, 마당쇠는 피지배계급의 상징이다.(.....)

대중이 철학자들을 오해하게 한 또 다른 배경에는 인문고전 무독서증이 있다. 만일 대중이 철학고전을 단 몇 권이라도 읽었다면 당연히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들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철학고전의 저자들은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공자와 맹자의 주요고객은 각국의 왕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두 사람은 세계 각국 대통령들의 정치 고문이었다.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사이자 군사기술자였다. <정관정요>의 주인공 당 태종은 중국 황제였다.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은 명나라 최고의 행정가이자 대규모 반란 진압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최고의 장수였다. (223쪽)


 

나는 인문고전 독서 단계별 추천도서에 <성경>을 추가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사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자 인간인 예수그리스도가 주인공인 책이지만 인문고전은 인간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문고전의 저자가 <성경>에 가진 의견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인간이 쓴책에 대해서 돌고래나 판다가 어떤 의견을 표하든 그것이 인간이 쓴 책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쓴 <성경>에 대해서 인간이 어떤 의견을 표하든 그것이 하나님이 쓴 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쉽게 말해서 <성경>에 대한 인간의 의견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성경>은 철저하게 진리와 신앙의 영역이니까. (228쪽)  

 

 

본서에서 말하는 '세상을 지배하는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 7가지'이다.

이 방법들은 인문고전 독서뿐만 아니라 일반 독서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여 정리했다.

 

 

 1.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도대체 천재들은 어떤 마음으로 인문고전을 읽었던 것일까. 나는 책에 기록된 그들의 삶과 글과 말을 되씹고 되씹고 또 되씹었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천재들의 마음을 기억해 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세종대왕을 생각해 보자. 그의 인문고전 독서법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치열함으로 요약된다.

 

그의 독서법은 '백독백습' 즉 100번 읽고 100번 필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왕자시절에 동양고전을 백독백습하다가 병에 걸리기까지 했다는 일화는 우리 모두가 잘알고 있다. 왕위에 오르고서도 그의 치열한 독서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왕이 심하들과 함께 인문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경연을 가장 많이 연 임금 중 한 명으로 기럭되고 있는데, 태조가 23회, 태종이 80회 열었던 경연을 1,898회나 열었다. 249권에 달하는 <자치통감>의 경우 경연에서 3년 동안 강독했을 정도다.

 

세종은 왜 그토록 힘들게 독서했던 걸까?

나는 그가 백성을 애타게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종이 인문고전 연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집현전 학사들을 모아놓고 한 다음 말에서 그 확신을 얻었다. "내 유일한 소망은 백성들이 원하는 일과 억울한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농사짓는 마을에서 근심하면서 탄식하는 일이 영원히 그치는 것이요, 그로 인해 백성들이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내 지극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세종은 여자 노비들을 위해 100일에 달하는 출산휴가제도를 만들었고, 같은 노비인 남편도 한 달 동안 아내를 돌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위대한 고전을 저술한 성인들의 마음을 알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직 책의 내용에만 해박하려 든 당시 사대부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오늘날 선비들은 말로만 경학(經學, 유교 경전의 내용을 연구하고 밝히는 학문)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치를 궁극하게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한 선비가 있다는 것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다. 너희 선비들은 매일 경학을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진짜 선비는 없는 것이냐!"

 

이 말을 562년 전에 죽은 세종이 지금 여의도에 나타난다면 이렇게 한탄하지 않았을까?

"오늘날 정치인들은 말로만 정치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법치를 세우고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정치인이 있다는 것을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다. 너희 정치인들은 매일 정치를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진짜 정치인은 없는 것이냐!"

 

약 550년 전에 노비에게 출산휴가 100일을 주고 심지어 노비의 남편에게도 한 달간의 출산휴가를 주었는데 5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가. 복지부와 노동부는 세종에게서 배워야 한다. 둘째를 낳으면 얼마를 지원해주고 대중교통을 공짜로 타게 한다는 식의 출산장려정책은 개그콘서트다. 넌센서다. 인간이 고작 돈 몇 푼에 아이를 낳고 안 낳고 하는 그런 존재인가. 그런 발상 자체가 기네스 감이다. 인간존중과 인간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2. 맹수처럼 덤벼들어라

서애 류성룡이 관악산에서 <맹자>를 읽을 때의 일이다.

그는 물 긷고 밥 짓는 시동 하나만 데리고 빈 암자로 들어가 전투적으로 독서했다. 어느 날 밤 방문 앞에 이상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림자는 맹수같기도 했고 도둑 같기도 했다. 그것은 꽤 오랜 시간 기괴한 분위기를 연풀하면서 서애의 독서를 방해했지만 그는 꿈쩌곧 하지 않았다.

 성호 이익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어머님과 오랫동안 이별했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독서하라. 아픈 자식의 치료법을 묻는 사람처럼 질문하고 토론하라." 성호에게 있어 책은 책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2012년은 다산 정약용의 탄생 250주년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다.

"유배지에 도착해서 방에 들어가 창문을 닫고 밤낮으로 혼자 외롭게 살았다.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 고마웠다. 그래서 '이제야 독서할 여유를 얻었구나' 하면서 기뻐했다."

다산에게 독서는 패가망신한 자신의 처지를 오히려 행운으로 여기게 할 정도로 소중한 것이었다.


 

 

 3.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라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일두 정여창은 <소학> 한 권을 30년 동안 읽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자질과 능력이 남들보다 못한 사람이다. 때문에 전심전력을 다해 독서하지 않으면 털끝만한 효과도 얻기 힘들다.

 

결국 천채들의 독서태도는 이렇게 정리된다.

'반복독서-필사-사색'


 

 

 4.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어라
반복독서는 천재들의 독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자 천재들이 가장 강조한 독서법이기도 하다.

세종은 <구소수간>을 1,100번 반복해서 읽었다.

영조는 이런 말을 남겼다. "독서는 다독이 최고다. 나는 일찍이 <소학>을 100번 넘게 읽었다. 하여 지금도 눈을 감고 암송할 수 있다."

우암 송시열은 <맹자>를 1,000번 넘게 읽었는데, 앞부분은 수천 번 읽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의 선비 김득신(金得臣)은 <사기>의 "백이전"을 무려 1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 상하 수 천년의 시간과 종횡으로 3만리 넓은 지구상에 독서에 열심이고 굉장한 분 가운데 백곡 김득신을 으뜸으로 쳐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그를 칭찬하기도 했다.

 

100번, 1,000번은 아니더라도 나는 <정상에서 만납시다>란 책을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었다.

24번 읽었다.

하지만 인문고전 책은 2번 읽은 적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 천재가 아닌거다.


 

 

  5. 연애편지를 쓰듯 필사하라

천재들이 가장 선호한 피사방식은 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남김없이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삼국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갈량, 서양 천재의 대명사격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아시아 최고의 우학자인 퇴계 이황 등이 이 방법을 따랐다. 방법은 간단하다. 원전을 매일 적게는 몇 줄 혹은 몇 쪽, 많게는 십수 쪽 혹은 수십 쪽씩 베껴 쓴다. 이게 전부다. 무슨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 않다.

지금 나는 김훈의 <자전거여행>을 손글씨로 필사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으로 천재들은 자신이 읽은 부분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필사하는 방식도 선호했다. 뉴턴, 존 스튜어트 밀, 마리 퀴리, 처칠 등이 이 필사법을 따랐으며,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필사법이기도 하다.

 

때로는 책을 한 권 다 읽고 밑줄이나 메모한 부분을 주제별로 옮겨 적기도 하고 때로는 중요한 부분을 발견하는 즉시 필사하기도 한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리딩으로 리더하라>가 바로 이런 필사법에 해당된다.


 

 

  6. 통할 때까지 사색하라

낮은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법은 '반복독서'와 '필사'까지는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와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인 '사색'부터 달리진다. 낮은 수준의 독서는 사색이 없다. 내 스스로도 이런 우를 범해왔다. 그간 내 독서능력이 배양되지 않는 이유는 책 내용 탓이라 생각하기도 했는데 결국은 책이 아니라 책을 통한 사색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나 자신의 문제였다.

 

서애 류성룡은 <서애선생문집>에서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다섯 수레의 책을 술술 암송하면서도 그 의미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사색(思索,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헤아려 생각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했다.

성호 이익도 사색 없는 독서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단지 과거를 치르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입술이 썩고 이가 문드러지도록 책을 읊어도 희고 검은 것에 대해 말은 할 줄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장님처럼 되고 만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법고시, 행정고시, 고등고시와 같은 시험들이 단지 시험을 위한 시험, 합격을 위한 시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사법시험의 목적은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럴려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학문은 철학이나 인문학이다. 사법시험에 인문고전과목이 없다는 것은 넌센스다. 오늘날 사법부의 불신의 시작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라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의 핵심은 '반복독서-필사-사색'은 '깨달음'을 향해 있다. 이는 곧 '깨달음'이 있는 독서를 해야 천재가 될 수 있다믄 의미다. 나는 반복독서와 필사 수준에 그치고 있다. 즉 반쪽짜리 독서를 해왔던 것이다. 깨달음이 있는 독서란 책을 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요,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문고전의 저자와 동일한 수준의 사고능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반계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자신의 평소 독서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밝은 창가 조용한 책상 앞에서 가지런히 두 손 모으고 단정하게 앉아서 종일 독서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읽다가 고요히 사색에 잠긴다. 책에 적힌 성인의 말씀과 내 사샛기 절묘하게 들어맞는 순간이 온다. 붓을 들어 그것을 기록한다. 이해가 안되는 구절을 만나면 밥과 잠을 잊고서 매달린다. 그러면 언젠가 마음에 깨달음이 온다. 그때 나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치고 내 입술에선 흥겨운 노래가 나오고 내 손과 발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상상이 된다.

가슴이 뛴다.

나는 언제 책을 통해 무아지경의 저런 경험을 해 볼 수 있을까.

가능하다는 확신으로 오늘도 책을 읽고 자판을 두드린다.


 

"읽고, 필사하고, 사색하라"

이것이 인문고전을 대하는 우리들에게 저자가 던지는 외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