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가 천대받는 시대,
다시 농(農)을 반추하며....
머리를 청소해 주고 마음을 세탁해 주는 책,
<소박한 미래>
이 책은 잊고 있었던 농사와 자연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간다'는 말, 고리타분하지만 진실이다.
한 마디로 농사는 우리의 미래이자 전부다.
경제도 산업도 경영도 결국은 자연에서 왔다.
식사법이 잘못되었다면 약이 소용없고, 식사법이 옳다면 약이 필요없다.
-고대 아유르베딕의 속담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
-히포크라테스
건강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원하지 않는 것을 먹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마시고,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
저자가 추구하는 자급자족 사회를 위한 농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목은 소박하지만 내용은 엄중하다.
거창하게 철학은 논외로 하더라고 농사에 대한 식견과 우리의 식습관을 되돌아보게 하는 마력이 있는 책이다.
천천히 읽다보면 몸도 정화되고 마음도 세탁이 된다.
귀농을 생각하는 사람들, 도시에서 텃밭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은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에 대한 명백한 답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바가 이 사회를 바꾸는 변혁이라는 사실,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과 가치가 이 사회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일지 못한다.
-저자의 말, ‘생태적 사유가 삶을 바꾼다’ 중에서,
각종 항생제와 화학 영양제, 호르몬제가 포함된 똥으로 퇴비를 만든다면 아무리 발효 과정을 거친다 해도 소용이 없다.
토양에 잔여분이 남아 오염을 촉진하고 그것은 곧 수질 오염으로, 더 나아가 식물로 전이되어 결국 그 피해가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버는 돈은 소비를 위한 대가이다.
욕망은 곧 소비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더욱 강력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일하는지도 모른다.
남들처럼 소비하지 않으면 존재의 이유가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파트에 늘어선 음식 쓰레기통을 열어 보라.
도저히 사료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뿐이다. 화학 세제로 설거지를 하고 난 뒤 걸러지는 음식물 쓰레기여서 그 안에는 화학 물질이 분해되지 않은 채 잔존한다 … ‘국민의 건강’은 언제나 핑계였을 뿐이다. 건강 구호가 2010년에는 ‘국민 건강을 위해 쌀 소비를 권장한다’로 바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문제는 ‘건강’이 아니라 소비 진작이었다. 정부 주도로 행해지는 일련의 식문화 정책 배후에는 반드시 기업의 이익이 도사리고 있다.
농부들의 판매권을 박탈하고 종자부터 생산 전 과정을 간섭함으로써 농부를 기업의 하청 노동자로 만들거나 대기업의 공장식 농사를 담당하는 농업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 가공 식품을 먹지 않으면 곡물가 급등에 대한 우려를 떨쳐도 된다. 사실 한국식 밥상에는 가공 식품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산업화와 기업화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다. 그리고 내 손으로 식의주를 해결하는 생활 구조로 돌아가야 한다 … 어쩌면 우리는 고기를 권하면서 폭력을 조장하는, 저급한 육류 문화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바빠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산다.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다른 데서 시간을 아낀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모두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시간이나 먹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들이다 …
전통 농법이 그리 거창한 이념이 아니다. 자신이 먹을 것, 안전한 먹을거리를 추구하는 소농이 바로 전통 농업이다.
내가 먹을 것이니 다양하게 짓고, 땅이 작으니 집약적으로 농사짓고, 자연히 섞어짓기와 돌려짓기를 한다.
경작지의 부족은 1) 도시화, 무분별한 개발에 따른 경작지 감소 2) 기후 온난화로 인한 사막화 3) 육류 소비 증가에 따른 사료용 곡물 수요 증가를 들 수 있다. 1kg의 육류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곡물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소고기는 11kg, 돼지는 7kg, 닭고기는 4kg, 달걀은 3kg이다. 예를 들자면 서울 인구의 하루 돼지 소비량은 2009년 기준 10,000마리다. 이들을 먹이려면 경작지가 500평 이상 소요된다. 경작지가 500평이면 1인이 1년 먹고 살 곡물을 생산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에 사용된 치명적인 다이옥신과 고엽제도 몬산토가 개발한 것들이다. 이들은 전쟁 후 화학 무기를 만드는 기술로 농약과 제초제를 개발했고, 1960년 이후에는 종자 회사를 합병하면서 화학 기업과 유전자 조작기술을 총합한 다국적 농업기업으로 성장한다. 농화학 기업은 종자 기업을 인수함으로써 수익의 극대화를 꾀한다. 라운드업 콩 종자는 항상 라운드업 농약과 제초제를 세트로 판다. 그 종자에는 딱 그 농약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먹는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옛날에는 먹을거리를 취하는 것 자체가 노동이자 생활이고 놀이였다.
귀농해서 자급자족하겠다고 마음먹고도 먼저 돈이 될 것부터 챙긴다.
행여 아이들이 프라이드치킨을 사달라고 할 때 사주지 못 할까 봐, 학원에 못 보낼까 봐, 또다시 돈을 벌 궁리를 한다. 간이 좋지 않아 귀농했다가 지나치게 열심히 농사를 짓느라 결국 세상을 등진 친구가 있다. 그가 간암으로 죽은 이유는 간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질병 치유는 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생각의 전환은 생태적인 사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대개 고기에서 양질의 단백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서구인들이 건장하고 체력이 좋은 것도 유제품을 비롯한 육류를 충분히 섭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검정콩과 들깨에는 고기보다 많은 단백질이 들어 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많이 먹고, 다양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걸까?
새로 문을 연 음식점에 가거나 방송에 탄 음식점에 가 보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유행에 뒤처지는 것일까?
규칙적인 식사에 길들여진 사람이나 동물은 며칠만 굶어도 죽는 줄 안다.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사실 예전에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굶는 게 다반사였다.
비타민은 반드시 음식으로 섭취해야 한다.
약으로 섭취하면 간이 제 기능을 잃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작은 우주와 같다.
어느 하나가 제 기능을 상실하면 다른 기관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갑상선 환자들은 평생 호르몬제를 복용한다.
몸이 할 일을 약이 대신 해준다.
진정으로 몸을 치료하려면 먼저 약부터 끊을 일이다.
음식을 바꾸고 생활 방식을 바꾸는 길만이 건강으로 가는 진실한 방법이다.
24절기는 태양의 운동에 근거한 것으로 태양이 움직이는 길인 황도를 따라 동쪽으로 15도 간격으로 나누어 24점을 정하였을 때 태양이 각 점을 지나는 시기를 말한다. 4계절에 각각 여섯 개씩 자리 잡고 있다. 춘분은 천구 상에서 태양의 위치와 황도가 0도일 때, 15도일 때 청명, 300도일 때 대한이다. 음의 극치인 동지는 12월 22일, 양의 극치인 하지는 6월 21일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비옥한 땅을 구입하고 퇴비도 많이 넣으면 좋다. 그러려면 돈을 계속 들여야 한다. 하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황폐한 땅을 싼 값에 사서 퇴비를 넣을 필요가 없는 메밀 농사를 지으면 된다. 내가 먹는 건데 무슨 걱정인가?
농사에 대한 열정과 간절함은 어떤 방식으로든 생활 속에서 드러난다.
귀농 후 첫 해 망종 무렵이 되면 ‘내가 왜 농사지으려 하지?’라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온다. 간신히 고비를 넘긴다고 해도 3년차에 접어들면 병충해나 자연 재해에 막막해진다. 5년차가 되어 보라. 준비했던 자금은 떨어지고,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확립한 철학과 가치관, 신념이 없으면 방황하게 된다.
인내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인내심도 실제 자기 생활에 만족할 때 발휘할 수 있다. 방황하거나 갈등하지 않고 농사지으려면 관점을 정립해야 한다. 1년차일 때 다르고 2년차일 때 다르고, 농사에 대한 생각은 계속 바뀔 것이다. 이렇게 변하는 생각들, 농사지으려고 마음먹었을 때의 초심, 농사의 목적, 당면한 문제점, 끊임없는 자각, 더불어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으면 농사는 단지 업무 환경을 바꾼 도시생활의 또 다른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황폐한 땅에서는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않으므로 잡초를 키우는 게 좋다.
홍수와 가뭄이 오면 잡초가 제 역할을 다할 것이다.
농촌에서 혼자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공동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공동으로 살기, 노동을 조율하면서 함께 나누기 등을 연습해야 한다.
먹을 것만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자급자족이란 먹고 입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손수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농사기술, 방적기술, 집짓는 기술, 그리고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초들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도 습득해야 한다.
농사는 곧 생활이다.
그리고 문화다.
생활 문화는 의식이다.
우리는 시간에 사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지형 그리고 기후에 따라 산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방법이지 않겠는가?
도시에 살면서 삶이 고달픈 것은
우리가 너무 많은 규칙과 기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아직도 가난한 아이들에게 ‘거짓되고 불편한 환상’을 심어준다. 도시의 공산품을 가져다주면서 그들을 유혹한다.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가난하고 피폐했는지 깨달으라고 부추긴다. 어쩌면 그들은 타락한 도시 문명의 전도사인지 모른다.
식물을 사랑할 때는 식물의 입장에서, 동물을 사랑할 때는 동물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게 진짜 사랑이다. 자식을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고, 연인을 사랑한다면서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건 사랑이 아니다. 엇나간 사랑은 교육에서 폭발하다. 정작 아이들은 꼴등해도 상관 없어 하는데 부모가 외려 열을 받는다. 날마다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교육, 자살을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 1등만 대접받는 교육... 이 모든 결과가 사랑의 부산물이라니, 참 놀랍기만 하다.
농사는 원래 놀이하듯 ‘게으르게’ 즐겨야 한다.
자연의 흐름을 따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게 농사의 본질이다.
물론 처음부터 농사에 게으름을 피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지만 농사도 시작이 어렵다.
유기적 순환 체계에 익숙해지면 삶의 방식과 사고가 달라진다.
행복에 정답이 없다는 것, 길이 하나밖에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자기를 바라보고, 내 안에 숨겨진 이면들을 잘 읽어낼 필요가 있다. 농사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수양에 도움이 된다. 식물을 보면서,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지만 농사를 지을 때 화학비료를 쓰거나 농약 사용을 먼저 배운다면 절대 그 이치를 깨닫지 못 한다.
자연의 흐름과 일치하고 수양을 가능하게 하는 농사를 지으려면 첫째, 농가의 가난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계사용으로 오는 이익과 편리함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최소한의 도구만 사용하면 농사가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둘째, 안일함을 버리고 약간의 게으름을 부려야 한다. 급한 마음에 하루가 길세라 땅을 뒤집고 파는 것은 옳지 않다. 농부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셋째, 당장의 이익을 버려라.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비료를 남용하고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주택을 지을 때는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고 난 뒤 지어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없다. 지형이나 기후, 마을 구성원 등 여러 조건을 따져 자신의 상황이나 형편에 맞는 ‘내 몸에 맞는 집’을 지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기존에 있던 집을 개조하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하다.
늘어난 양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또 한편으로 ‘그 일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기준에 따른 ‘가치’가 적다는 뜻이기도 하다. 간절한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시간을 마련한다. 문제는 그 어떤 일이 우선적 가치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시간이 없어서 못 했어.’라는 말 속에는 ‘그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었어.’가 숨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이 일한 만큼 돈을 벌어서 자립하는 생활을 기본으로 한다.
돈을 벌면 자신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이른바 ‘소비사회’이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착각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고 기꺼이 시간을 저당 잡혀 일한다. 돈을 벌어 소비하고 싶은 물건을 소비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처럼 수직으로 파악하는 흐름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사람들은 왜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까? 실체를 알 수 없는 미래에 현재를 종속시키면서 어쩌면 우리는 미래가 최소한 현재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 같다.
소비자를 자극하는 것은 자동차 자체가 아니라 자동차가 상징하는 ‘부’이다.
부에 대한 욕망이 곧 새로 나온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으로 충족되는 것이다.
구매하는 순간 옆집과 동등해졌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새 차를 갖지 못한 다른 이들보다는 부자라고 생각한다.
산업사회에서의 근면함은 오직 돈을 더 많이 벌어 소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자신의 근면함이 기업의 이익과 맞아떨어져 기업은 소비자에게 부적절한 행위를 생산하는 권력자가 된다.
시장에서 질병덩어리 음식을 만들어내도 노동자는 묵인하고 넘어간다.
그들은 돈과 밀약하는 공모자로 전락한다.
심지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어내는 데 동참한다.
이제까지 노동자들이 기업에게 더 좋은 음식과 더 좋은 물건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파업을 본 적이 없다. 그들 역시 철저한 경제논리에 물들어 자신의 피해가 발생할 때에만 눈을 뜬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의 양심이 아니다. 노동은 화폐에 종속되고, 도덕의식과 기본권 역시 화폐에 종속된다.
이분법적 서구식 사고와 문명관에 젖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인간 본연의 가치 체계들, 즉 소박함과 정적, 그리고 차분한 삶과는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부풀려 강조하거나 문명의 발달이 인류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명은 인간의 욕망을 무제한 자극한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라고 유혹한다. 그래서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강조한다. 당연히 물질과 과학의 발달을 숭상한다. 하지만 인간이 그런 데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처음부터 자연의 일부였던 인간은 생태적인 삶을 살 때 비로소 행복하다. 생태적 삶의 시작은 ‘지금 여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무한도전과 무한경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가 양산한 경쟁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상태에서는 자연도 나도 바로 볼 수 없다.
행복이 쾌락과 부, 안락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과 되도록 거리를 두라. 대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을 추구하라. 적극적으로, 가능한 한 빨리. 칭찬이 난무하면 교만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이기적이 된다.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뒤로 미루게 하고, 습관적으로 두려움을 피하게 만든다. 이렇게 자란 사람은 비판과 상처를 동일시하고 허약하고 의존적이 된다.
지역화는 세계화에 대항하는 개념이다. 현재의 체제는 물질과 에너지, 수송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요구한다. 필연적으로 파괴와 생명 단절을 낳는다. 물론 교환을 위한 얼마간의 잉여분은 필요하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자급자족체제부터 갖추어야 한다. 자급하는 공동체들은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교류가 일어나는 순간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게 되고, 다시금 문명의 시대로 돌아갈 테니까.
발 없는 구제역이 천 리를 가는 이유는 공장형 축산을 비롯한 현대식 농업은 지역과 국가의 경계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시장을 확대해 나가기 때문이다. 현대식 농업과 범세계적 거래 방식이 구제역을 발생시킨 구조적 원인에 해당한다면 우리의 식습관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요즘은 하루라도 고기를 안 먹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다.
식량문제 해결의 길은 ‘자급’뿐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가공식품을 먹지 않으면 곡물가 급등에 대한 우려를 떨쳐도 된다.
석유로 부흥된 석유문명은 분명 석유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
석유 문명이 끝나는 시점에서 세계화는 막을 내릴 것이다.
생활은 전보다 편리해졌지만 체감하는 삶의 질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외식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보기에 좋고 입에 달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허점투성이인 게 바로 외식이기 때문이다.
농사가 하늘을 보면서 땅을 경작하는 모든 활동이라고 한다면, 농부는 무엇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천지인의 이치를 잘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농사란 하늘을 알고(지천), 땅을 알고(지토), 사람을 아는(지인)것이다.
소비의 교류를 끊고. 마을 안에서 서로 나누며 일하는 자급 시스템이 이루어질 때 기업과 국가는 불필요하다. 돈을 추구하는 산업 노동자, 소비 노동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교류와 소비를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한다. 소비는 미덕이 아니다. 시간은 돈이 아이다.
선악? 착하다는 것은 ‘착하지 않음’의 반대 개념이다, 실제로 ‘착하다’는 개념은 반대 성질이 없다면 부각되지 않는다. 어렵다는 것과 쉽다는 것도 상대적이다. 길고 짧음도, 높고 낮음도, 앞과 뒤도 상대적이다.
생명과 자연의 신비는 모든 진화적 사실의 의미를 넘어선다. 인간이 제 아무리 투시력을 갖춘다 해도 자연의 상상력을 넘어설 수는 없다. 물 한 방울 속에 담긴 생명의 마법을 감지하는 것은 정글 같은 도시에서 생존경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상상력이다. 그런 능력은 자연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어디에서나 겨루라고 내몹니다. 서로 겨루어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지도록 내몹니다. 서로 돕는 길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성적 숫자에 따라 등수와 등급을 매기는 학교입니다. 함께 나누며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는 학교가 아니라, 더 이름난 대학교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아이들을 가르는 학교입니다. 도시에서는 ㅅㄱㅇ이라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 이름을 걸개천에 큼지막하게 써서 내겁니다. 시골에서는 아무 대학교라도 들어가면 아이들 이름을 걸개천에 큼지막하게 써서 내겁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학교란 자취를 감춥니다. 스스로 삶을 가꾸는 길을 보여주려는 학교란 태어나지 못합니다. 오직 도시로 가서 오직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고는 오직 돈만 벌라는 학교교육입니다.”(최종규)
인간의 모든 생각은 흙에서 태어난다. 모든 지혜는 풀과 나무에서 태어난다.
모든 사랑은 숲에서 태어난다.
흙과 풀과 나무와 숲이 아니라면, 생각과 지혜와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
그러면, 흙과 풀과 나무와 숲은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바로 우리 마음에서 태어난다.
도시 문명으로 인한 기후 온난화로 삶이 피폐해졌는데도 그것을 도시화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 한다.
오히려 자신의 터전에 들어와 교육을 빌미로 전통과 자연을 잠식하는 도시민들을 동경한다.
그들은 도시에서 사는 것을 ‘가난의 극복’이자 ‘자신들의 목표’로 설정하게끔 교육 받는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 화살을 돌리려면 먼저 자신의 임금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소비를 포기하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도시의 권력자가 된 일부 계층은 도시에서 살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멀리 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와 정치를 조작하기 시작한다.
선조들의 삶에서 농사는 노동이자 놀이였고, 자연이자 문화였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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