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서재>는 딱히 “이런 부류의 책이다”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자그마치 3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답게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처럼 문학의 여러 장르를 맨발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칭 문장노동자 장석주. 문장노동자란 말이 생소하다. 결국 글에 미친 사람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주구장창 읽고 쓰는... 저자가 보유한 3만 권은 서재가 아니라 도서관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시골생활의 일상을 아름다운 글로 표현한 에세이 같은 책, <마흔의 서재>, 읽기 쉽고 편하다. 시중에 넘쳐나는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와 같은 류의 책들과는 DNA가 다르다.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하루를, 일상을, 삶을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다.
마흔이여, 서재 앞에 서라!
아니다. 먼저 서재를 만들자.
이 책은 저자가 생에 몸살을 앓고 있는 마흔에게 피로한 몸을 누이고, 인생의 초안을 다시 생각하고, 소중한 이에게 편지를 쓰고 고독과 마주하며 자신을 비우고 채울 공간으로 자신만의 ‘서재’를 권한다.
그는 스무 살에 시인이 되었고 삼십대에 출판사를 차려 대박이 나 서울 청담동에 빌딩을 지으며 승승장구했지만, 어느 날 마흔이 ‘불쑥’ 질문처럼 찾아왔다고 한다. 그 ‘불쑥’에 마음을 홀랑 뺏겨 돌연 서울 살림을 접고 경기도 안성 시골로 내려가, 호수 옆에 집을 짓고 3만 여권의 책을 품은 서재를 만들어 다른 생을 열어간 저자의 경험과 지혜들을 고스란히 전한다. 3만 권은 엄청나다. 상상을 초월하는 서재다. 하지만 모두가 큰 서재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재는 크기가 아니라 열정이다. 서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 서재가 없다면 지금 당장 책꽂이라도 마련하자. 그리고 책장을. 그러다보면 서재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 책은 ‘마흔’과 ‘서재’로 이루어진 한 채의 소슬한 집이다.
먼저 ‘마흔’에 대해서.
나는 마흔의 방황과 미혹을 겪었다. 마흔에도 인생을 꾸리는 일은 여전히 버거웠다. 삶의 이정표에서 딱 중간쯤 되는 나이 마흔.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고 살아갈 날들을 내다봐도 삶은 오리무중이고 암중모색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했다는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연명할 뿐이다.”라는 말에 동감한다. 마흔에도 산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그 마흔의 시절을 넘기고 꿋꿋하게 살아남았기에 지금 마흔앓이를 하는 이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를 들려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물다섯 살 이후에는 그냥 유령처럼” 사는 누군가를 위하여. 혹은 가슴 뛰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인생의 후배들을 위하여.
다음 ‘서재’에 관해서.
나는 삼십 대 중반쯤에 서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대개는 사들이는 책들과 저자나 출판사에서 보내는 책들로 해마다 책이 늘어난다. 책은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통로이고 수단이다. 소장한 책이 3만여 권에 이른다. 와타나베 쇼이치는 “장서의 양이 지적 수준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인생 절반 즈음 서재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서재를 채운 장서(藏書)의 양과 질 또한 중요하다. (중략) 서재는 나의 창의력의 산실이고, 지력(知力)의 근거이며, 지적 생산의 현장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선생님의 말처럼 “인생은 뒤돌아볼 때 비로소 이해되지만, 우리는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서 나이가 들수록 서재는 인생에서 중요성이 더 커진다. 책은 인생을 돌아보고 곰곰이 씹어보는 데 유용하지만, 그보다 앞을 향해 살아가는 지침을 구하고 예지력을 키우는 데 더 쓸모가 있다.
-서문 <당신의 마흔은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중에서,
1장-마흔이라는 인생의 한 페이지
마흔은 인생의 오후, 빛은 따뜻하고 그림자 길어져
걸음을 느리게 잡아당기면 곧 펼쳐질 금빛 석양을 기대하며
잠시 쉬어가도 좋은
시간.
아침부터 수고한
마음을 도닥거리고 어루만지며
남은 시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평온하고 지혜롭게 사유하라.
그런 이에게 오후는
길고, 충만하다.
2장-삶의 갈림길마다 책이 있다
하루를 끝내고
수고로운 발을 씻은 후
낮은 책상머리에 앉은 저물녘,
시간의 갈림길에서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다른 무엇 아닌
책. 책이다.
책이 있어서
마흔의 긴 밤은 두렵지 않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하고
현재의 나를 단속하며
내일의 나를 앞당겨보게 하는, 책
책이 편안한 조언자이다.
3장-이전과는 다른 생이 기다린다
책을 덮고 자리에 누우니
오롯이 한 평, 고독하고도 행복하다.
제 아무리 욕심껏 산들 돌아갈 때는
넓어도 한 평이라 했던가.
이 한 평에서 매일 꾸는
꿈.
그것이 있어 매일을
다르게 살 수 있고
다른 내일을 상상할 수 있다.
마음 꾹 다지고 잠들어
한 번 뒤척이면, 내일 아침,
또 다른 생이 기다리리.
4장-넓어지지 말고 깊어지는 삶을
매일 한 줌의 희망이
아침이라는 이름을 달고 온다.
소탈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라.
이 하루가 쌓여
마흔의 남은 인생 절반의
길,
길이 되기를.
오후부터 깊어진 사유와, 책의 말과,
꿈들이 모여 이 넉넉한 하루를 빚어낸다.
다시 몸이 풀린다.
다시 제대로 살 시간이다.
너무 이르면 알 수 없고, 알고 나면 너무 늦다.
-세익스피어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기 시작한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앞만 보며 달려온 삶에 몸살을 겪을 때, 책은 처방전이 되고, 이정표가 된다.
마흔의 삶, 무언지도 모를 것에 쫓겨 앞만 보며 달려온 삶. 뒤돌아볼 새도 없어 이렇게 살아도 되나 후회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삶. 어쩌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 따져 물으며 나아가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조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거대한 물음이 서늘하게 등줄기를 훑고 내려간다. “계속 이렇게 달려도 괜찮은 걸까?”
마흔, 당신을 잠시 쉬어가게 하는 인생의 책을 만나라.
이 한 권으로 생은 다른 방향으로 내달릴 수 있다.
불혹의 마흔이라고 했건만, 요즘의 마흔은 미혹이다. 인생 절반 즈음에 다다르면 깊은 한숨, 하얀 밤과 함께 생의 요동이 느껴진다. 누구나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게 마흔이다. 그럴 때 누군가는 요동치며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고 누군가는 잠시 멈추어 제 삶을 들여다본다. 마흔의 삶에 흔들리지 않고 삶을 흔든 사람, 장석주. 그는 스무 살에 시인이 되었고 삼십대에 청담동에 빌딩을 지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그에게 마흔이 불쑥 질문처럼 찾아왔다. “이렇게 달리기만 해도 되는 걸까?” 그는 현실의 삶에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되려 제가 먼저 삶을 쥐고 흔들었다. 마흔 즈음 돌연 서울 살림을 접고 시골로 내려간 것이다. 산속 호수 옆에 집을 짓고 3만여 권의 책을 품은 서재를 만들었다. 거기서 생은 다른 방향으로 시작되었다. 생이 짓궂은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는 책 속으로 달려간다. 거기에 모든 답이 있으므로.
마흔은 스승을 찾기 어렵다.
누구를 멘토로 삼고 답을 구하기도 어려운 나이가 마흔이다. 이런 마흔에게 함께 묻고 함께 답을 구할 친구이자 스승으로 책 말고 또 무어가 있을까. 홀로 고민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밤을 뒤척이면서도 인생의 질문들에 답을 구하기 힘든 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마흔이여, 서재 앞에 서라. 서재는 미래로 뻗어 있다. 마흔에 멈추어 깊이 책을 읽을 때, 책은 현실과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책의 가장자리는 우리 현실과 맞닿아 삶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곧 미래를 향한 길이 된다. 마흔의 서재에 꽂힌 책들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 나만의 고전이 되고 지고한 철학이 되고 후반생의 길이 되어줄 것이다. 남은 인생 절반을 위해 이제 마흔은 아침마다 서재 앞에 서야 한다.
마흔은 이제 막 오후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인생의 아침에 품었던 것들을 지우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마흔은 어느덧 인생의 오후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변변하게 해놓은 일도 없이 천둥벌거숭이로 살아왔는데, 돌아보니 벌써, 마흔이다. 그 누군들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게 인생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꽤나 책도 읽고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많은 척 했지만, 인생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느 날 돌아보니, 인생의 완성과 조화에 이르는 지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됨의 근본을 깨치지도 못한 채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마흔을 맞는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27쪽)
공자시대에 마흔은 어른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마흔에 이른 사람들은 철이 나지 않은 그저 늙은 소년이다.....
마흔이 불안한건 삶을 통찰하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혜 대신 실용을 따르고 있다. 한마디로 천박한 실용주의다.
돈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고 배워온 것이다.(29쪽)
피로사회에 정복되지 말고 쉼을 찾아야 한다.
쉼은 빈둥거림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바쁜 시간이다.(41쪽)
과다한 노동과 성과가 결국은 자기착취로 이어진다는 것,
이것들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성과주체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는 것이다.(43쪽)
<논어>에 "꽃 피지 못하는 싹이 있고,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이 있다."고 했다.
싹이 꽃을 피우고 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 수목등도화 사재능결과 강수유도사 강재능입해)라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창조한 인물 조르바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다.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조르바. 학교라곤 문 앞에도 가본 적이 없다. 부자도 아니다. 아는 것도 많지 않고 가진 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그의 행복을 가로막을 수 없다. 요컨대 행복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느낄 줄 아는 능력이다. (48쪽)'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영원한 자유인'이다. 조르바가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는 '자유'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비문
고대시대에는 '갖다, 소유하다'는 'have' 동사가 없었다.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인간은 모든 것을 '소유'의 개념으로 바꾸어 버렸다.
집, 자동차, 가구와 같은 물건은 그렇다 치고 사랑, 가치, 자아와 같은 정신적 영역끼지도 소유하려 든다.
그래서 천민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인간이 병에 걸리게 된 것은 사과껍질을 깎아 먹으면서부터였지만 마음의 병은 모든 것을 소유하려 들면서 부터가 아닐까.
침묵할 줄 모르는 자는 끝내 존재의 의미에 가닿지 못한다.(75쪽)
마흔에게는 자발적 고독이 필요하다.
자발적 고독은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바꾼다.(81쪽)
고독은 그 본질에서 혼자 있는 능력이다. 혼자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혼자 있는 능력은 귀중한 자원이다.
혼자 있을 때 사람들은 내면 가장 깊은 곳의 느낌과 접촉하고, 상실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바꾼다.
-<고독의 위로> 중에서,
창의성은 아무 때나 번뜩이지 않는다.
그것의 전제조건은 양이다.
양적 조건의 충족 다음에야 질적 전환이 일어난다.(102쪽)
우리가 맹신하는 '1만시간의 법칙'도 결국 양이다.
진정한 지적생활의 시작은 서재다.
가을의 예감 속에 책이 줄 지고한 쾌락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뛴다.
이 가을, 나는 한 권의 책으로 나의 지평을 넘어설 것이다.
어떤 책을 읽었을 경우,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존재의 생물학적·인지적 형질이 미묘하게 바뀌어버려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뇌의 역량이 커지고 생각과 감정은 성장한다. 존재의 내적 형질이 바뀔 뿐만 아니라 내적 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책 읽기는 치유와 정화의 힘을 준다. “오랜 기간의 혹독한 참회, 삶의 과오에 대한 각성, 그리고 오류의 끝없는 반복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우울한가? 따분한가? 자기가 무력하다고 느껴지는가? 그때마다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기 위해 책으로 달려간다. 책 읽기는 인생의 슬픈 터널을 지나서 의식의 고양이라는 신세계로 가는 길이다. 이 가을 아침에 가슴이 뛰는 것은 내가 책 속에서 사는 까닭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읽은 모든 책들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123쪽)
나는 한 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꽂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다
-앙드레 지드-
희망없는 나날엔 책을 읽으며 고통을 견뎌냈다.
책 속에는 멘토가 있었다.(125쪽)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부터 치유받아야 하는데 쉽지 않은 현실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 책으로 치유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금 나는 경기도 안성의 금광호수 주변에 작은 집을 짓고 노모와 함께 산다. 뭐, 크게 자랑할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는 조촐한 삶이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세 끼 따뜻한 밥을 먹고, 삽살개와 함께 약수터까지 산책을 한다. 좋은 음악을 듣고 숲길을 거닐고 집을 찾아오는 벗들을 만난다. 나날의 삶은 단조롭다. 원고를 쓰고 책을 내면 돈이 들어온다. 이 돈으로 국민연금과 의료보험료를 내고 쌀을 사고 생필품을 산다. 이 삶이 기꺼운 것은 날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131쪽)
인생에는 빵을 좇는 길과 꿈을 좇는 길 두 가지가 있다.(136쪽)
꿈이란 눈앞에 없는 것을 제 앞에 당겨보는 것이다.(138쪽)
많이 소유할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진리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수록 그것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돈이 들어가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 또 다시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 악순환이다.
(167쪽)
사색이란 마음, 의식, 생각의 작동이다.(177쪽)
책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무수한 방식으로 풍요롭게 한다.
안락의자에 편히 않은 채 세상을 거닐고,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과거로 날아갈 수도 있다.
독서란 자아발견과 세계탐험을 위한 나침반과도 같다.
-알베르토 망구엘
당신이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 사람들이 길이라고 부르겠지.
-판화가 이철수
당신이 그렇게 읽고 또 읽으면 언젠가 사람들이 책이라 부르겠지.
책을 덮으며,
쉰을 넘긴 나이에 집어든 <마흔의 서재>는 내 나이를 10년전 쯤으로 되돌려본 기분이다. 마흔은 어떻게 찾아올까? 아니 마흔은 어떻게 자나간 걸까? 가물가물하고 흐리멍텅해진다. 마흔은 삶의 중심이다.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지만 마흔은 오고간다. 마흔에게는 사느냐 죽느냐 같은 서슬 퍼런 질문은 없다. 대신 머뭇거리는 진득한 회의감이 밀려온다.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먼 훗날 마흔이라는 생의 한 페이지를 펼쳤을 때 무엇이 새겨져 있을지.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다면, 그래서 남은 지혜도 철학도 없다면 그 같은 생은 좀 허무하지 않을까. 치열하게 깨져보고 피터지게 부딪쳐라도 봐야 죽음의 문턱에서 후회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마흔이 되면 그 무엇보다 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비까번쩍한 자동차 대신 자신만의 서재를 꾸며보라고 한다. 자신만의 지적 공간에서 오롯이 쉬고, 사유하고, 거기서부터 남은 생의 후반부를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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