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문학을 통해
삶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책,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철학과 문학의 데이트
철학과 문학의 데이트는 가슴 뛰는 일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낯선 이와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마음이 열려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위 ‘전문가’라는 어줍잖은 감투를 쓰고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다. 전문가의 시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환경이 빨리 변하기 때문이다. 경험과 전문성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사람들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 이제 철학 교양서들도 새로운 옷을 입고 있다. 철학의 영역과 무관한 듯 보이는 역사, 영화, 미술, 연극, 경영 등 다양한 분야와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 교양서들의 다양한 변주는 고상한 취미 정도로만 여겼던 문학과 예술을 인문교양의 영역으로, 경영의 영역으로, 자기계발의 영역으로 확대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상아탑에 갇힌 학문으로만 치부되던 철학이 대중과 소통의 창구를 만들어내려는 새로운 시도이다.
철학, 세기의 문학을 만나다
본서는 철학과 문학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을 철학하게 하는 독특한 철학 교양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문학 13편 속에서 주옥같은 철학적 담론을 꺼내 함께 소통하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시각과 폭넓은 삶의 이치를 제공해 준다. 저자는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음악이나 미술 이야기, 때론 커피숍 창가에서 바라보는 정경을 이야기하며 철학과 문학의 만남을 주선한다.
또한 문학에 철학자의 사유와 철학적 해석을 잘 버무려 내고 있다. 만남, 사랑, 성장, 자기실현과 같은 개인의 물음에서 시작하여 유토피아, 인간공학, 사회공학 등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다양한 문제들까지 아우른다. 문학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과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빌려, 실존 철학이나 낭만주의와 같은 조금은 낯선 철학의 흐름, 종교적 구원, 가정의 의미와 같은 삶의 문제에까지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는 간단히 말해 ‘고전에 철학을 접목하여 새롭게 해석한 책’이다. 고전만으로도 어려운데 거기다 철학이라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며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철학 입문서에 가깝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다. 저자의 말처럼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듯 편안하게 읽어나가면 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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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누구를 구원하는가? 괴테의 <파우스트>1부 : '자기 체념'에 대하여 악마마저 이겨낸 남자 괴테의 <파우스트>2부 : '자기 실현'에 대하여 |
질풍노도를 잠재우는 법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 '성장'에 관하여 |
관계의 미학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 '만남'의 의미 |
사랑과 질투의 함수관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 '질투'에 관하여 |
가족에 관한 냉혹한 진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 '가정'의 의미 |
참을 수 없는 일상과의 결별 사르트르의 <구토> : '일상'에 대하여 |
텅 빈 무대의 대본 없는 배우, 인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 '권태'의 의미 |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 '반항'의 의미 |
그 섬은 어디에 있을까? 최인훈의 <광장> : '유토피아'에 대하여 |
당신들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디스토피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 '디스토피아'에 대하여 |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인간공학'에 관하여 |
빅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 : '사회공학'에 관하여 |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회상'의 의미 |
철학카페답게 '카페라테? 혹은 에스프레소?'라는 프롤로그도 이색적이다.
잘 알려져 있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13편의 소설과 희곡들에 대해 독자들과 카페에서 가볍게 담소를 나누겠다는 저자의 의도가 이채롭다.
.... 갑자기 이야기가 음악이나 미술 또는 영화로 넘어가기도 하고 때때로 즐겨 암송하는 시나 노래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 책은 딱딱하거나 무겁지 않다.
저자의 말처럼 느슨하고 경계를 뛰어넘는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지나치게 '논문화된 책'에 길들여져 있는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책'은 주제를 벗어나서도 안되고 서론-본론-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그런.
따라서 책의 모습도 구성양식도 너무 천편일률적이다.
'책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 얽매여 있는 것 같다.
편집자들은 간혹 독서환경과 독자탓을 하는데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본서가 철학, 문학, 영화, 시 등의 경계를 허물었듯이 앞으로는 책의 모습도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
소위 '책 같지 않은 책'의 등장을 고대해본다.
"작가란 별을 찾아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바이런 경
독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별들을 보고 자신의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별을 보고 항로를 찾아냈던 옛 선원들의 지혜를 배우는 것뿐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1부에서 그레트헨이 갔던 무한한 자기체념을 통한 '종교적 구원의 길'과 2부에서 파우스트가 보여준 무차별한 자기실현을 통한 '인간적 구원의 길'이 그것이다.(52쪽)
그렇다면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것인가?
아니면 '무차별한 자기실현'을 할 것인가?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인문학 위기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경박하다 못해 날 것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이럴 때 낡고 오래된, 그러나 결코 무겁지 않은 ‘고전문학’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납덩이 같이 무겁게만 느껴지던 고전의 무게를 빼고, 그토록 지루하던 시간은 ‘옳거니 바로 이거야’ 하고 무릎을 탁 치는 그런 카페의 가볍고 즐거운 시간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전은 무거워서’라는 핑계는 힘을 잃게 되고, 어느새 ‘굵직한 인문학의 주제’는 나의 삶 속으로 들어와 ‘나’의 ‘존재 가능성’으로 살아날 테니 이 얼마나 기특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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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성이 창작한 ‘고전’은 인간정신의 산이요, 계곡이자 빛나는 역사가 아닌가. 그 인문학의 도도한 강물에 멋들어지게 지어놓은 선상카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김용규 글, 웅진지식하우스)는, 바이런 경이 말했다던가 ‘별을 찾아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모험이다.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저 ‘미지의 세계’에서 ‘언어를 싣고 돌아와 건네주는’ 그런 사람들의 세상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이야기를 철학으로 감당하고 있으니 하여간, 그는 고전의 문학 밭에서 아름다운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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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고전문학은 신과 왕으로 상징되는 근대 이성의 권위와 무게와 겉치레를 말끔하게 벗어 버리고, 마치 봄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찻잔에 어리는 그윽한 이야기로 한 올 한 올 풀어져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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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자는 아니 ‘철학’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자신’을 추구하고 창조해 나가는 ‘이해’와 ‘해석’의 주체로 도전해 보기를 요구한다. 한 번 도전해 보라. 〈심법섭/ 인(人)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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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을 겪는 시기에 누구나 한 두 번쯤은 접해본 <데미안>...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정현종
사람처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요?
사람 구경하는 것처럼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요?
나이가 든 탓인지 난데없이 사람이 그리워지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때는 커피숍에 나가지요. 카페라테를 한 잔 시켜 들고 반드시 창가에 앉습니다. 왜 하필 커피숍이냐고요? 커피숍은 대부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자리를 잡고 있지요. 그래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에 좋습니다.(53쪽)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정호승,<수선화에게>
머지않아 학교 시험에도 등장할법한 아름다운 시다.
아픈만큼 성숙해지는게 인생인가보다.
많이 아파보고 많이 깨져봐야 비로소 진짜 삶이 되는거다.
<데미안>을 읽지 않아도 기억하는 구절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 :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인 신
우리는 덧없고 형성 도중이며, 우리는 가능성이다.
우리는 완벽하거나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재 상태에서 행동으로, 가능성에서 실현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참 존재에 속하게 되며,
완전한 것, 신적인 것에 조금이나마 닮게 되는데, 이것을 자기실현이라고 한다.
-헤세,<신학단상>
■ 바람난 철학, 문학과 사랑에 빠지다
세상을 이해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철학만큼 좋은 안내자는 없다. 철학의 인류사의 근간이다. 인간을 알아가는 학문이다. 그래서 조금은 난해한 측면이 있다. 아무리 쉽게 풀어썼다 해도 우리 일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철학서를 읽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에 문학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난해하게만 느껴지던 철학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화제 같은 역할을 한다. 이성적인 철학과 감성적인 문학의 만남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문학을 통해 철학을 배워왔고 배워나가야 한다. 그간 우리는 청소년기에<데미안>을 읽으며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구토>를 읽으며 ‘삶의 무의미성’과 ‘아찔한 의식의 순간’을 경험했다. 따라서 이미 철학은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문학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과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빌려, 실존 철학이나 낭만주의와 같은 철학의 흐름이나, 종교적 구원이나 가정의 의미와 같은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 <어린 왕자>에서는 만남을 ‘길들이기’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저자는 이를 통해 만남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나-너 관계 맺기’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카뮈의 <페스트>를 이야기하면서는 카뮈의 <이방인>과 <시지프의 신화>를 거론하며, 그의 작품 속에는 ‘부조리’와 ‘삶의 무의미성’이라는 의식이 깊게 흐르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현대 철학의 첨예한 논쟁들도 이 책 속에 녹아 있다. <멋진 신세계>에서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인간 사육’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독일의 전 언론과 하버마스와 같은 대가들이 격렬하게 반대 의견을 냈던 이 논쟁의 핵심은, 오늘날 모든 휴머니즘 문화는 동물이었던 인간을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가축으로 ‘사육’하는 문화였으며, 그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그 다음 대목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길들이는 새로운 도구를 찾아야 하는데,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선별하고 사육할 수 있도록 ‘유전공학’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 문학에 대해 항상 궁금했지만, 감히 철학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는 문학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를 바꿔, 문학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 주목해보라고 제안한다. 단지 문학을 읽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찾는 ‘철학적 해석’을 시도해보라고 말이다. 문학 작품을 읽으며 항상 궁금했지만, 쉽게 해답을 찾기 어려웠던 질문들은 바로 우리들의 삶의 변화시키는 열쇠라는 의미이다.
부조리 연극의 대명사 <고도를 기다리며>는 변하지 않는 시공간과 성격 없는 인물을 내세워 ‘권태’라는 문제 제기를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궁금증을 자아내는 질문은 ‘도대체 고도는 누구이며, 왜 그를 기다리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권태’의 의미를 짚으며 ‘시간 죽이기’에 몰두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실존의 의미를 찾으라는 대답을 제시한다.
그리고 수많은 성장 소설의 토대가 되는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의 꿈에 나타난 양성적인 신 아프락사스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는 헤르만 헤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조로아스터교와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에서 해답을 찾는다. 진정한 성장의 의미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라는 극단에서 자신의 중심의 찾을 때 이뤄진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왜 이청준은 책 제목을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라 ‘당신들의 천국’이라고 했을까?” 와 같은 질문도 가능하다. 이에 대한 답은 계몽주의 시대에 내놓은 유토피아 공학의 한계와 제3의 길 모색이라는 답을 들을 수 있다. 이렇듯 본서는 문학의 매력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 또한 고전이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문학작품의 의미를 파악해가며 즐겁게 철학과 만날 수 있도록 한다.
"소중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경구는 <어린왕자>의 얼굴이다.
"이제 내 비밀을 가르쳐줄게.
매우 간단한 비밀이야.
뭐든지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밖에 없다는 이야기란다.
중요한 것은 절대 눈에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한 말,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
-부버,<나와 너>
질투와 사랑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다.(91쪽)
사랑이란 '하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나며, 그 대상은 '행위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112쪽)
고대에는 소유를 나타내는 '갖다(have)'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소유라는 단어가 급격히 늘어났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나는 이가 아프다'고 하지 않고, '나는 치통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프롬은 통증, 사랑, 소망, 증오처럼 소유할 수 없는 정신적인 대상까지 소유의 대상인 것처럼 하나의 물건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언어 습관에서 소유에 대한 현대인의 정신병적 집착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제는 젊은 남녀가 사랑하면 '넌 내거다'라고 말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113쪽)
가정이란 사람이 그의 '어떠어떠함', 곧 외모나 성격, 재능 또는 재산 등등 때문에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가 아니라 그의 존재 곧 자신의 '있음 그 자체'로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랑의 장소다.(117쪽)
-카프카,<변신>
<변신>의 절정은 가정도 존재 그 자체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장소로 바뀌었다는 대목이다.
가족간의 사랑이 넘쳐야 할 가정도 더 이상 자본주의의 유물을 떨쳐낼 수 없는 곳이 돼버렸다.
가족간에도 경제적 관계화 되었다는 의미다.
아무리 똑똑해도 경제적으로 무능하면 그는 곧 무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족간의 불화와 자식이 부모를 내다 버리는 것도 따지고보면 모든 가치를 오직 하나의 기준, 곧 경제력으로 바꾸어 계산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는 돈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다.
인간을 돈의 노예로 보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현실이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자본주의는 일찍이 거룩한 성인들과 위대한 철인들이 지하 감옥에 묶어놓았던 탐욕이라는 마성을 풀어놓았다.
그러자 그 교활한 마성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이윤추구라는 미명 아래 모든 다양한 가치, 곧 사회적, 도덕적, 예술적, 종교적 가치까지도 오직 하나의 가치, 곧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게끔 했다.(127쪽)
자본주의의 본질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개인의 이기심과 체계적인 이윤추구의 정당화'다.
인류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 이전에는 개인의 이기심과 이윤추구가 정당화된 역사가 한 번도 없었다.
어느 종교든 이기심은 지탄의 대상이었고, 이윤추구는 악마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악마들에게 황금장갑을 끼워 준 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대해 구토가 난다. 사르트르의 <구토>...
단지 일상에 빠져, 하루하루를 그저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서 살고,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말하면서 무의미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없어도 그만인 남아도는 존재, 곧 여분의 존재다.
로캉탱은 자신에게 욕지기를 하며 일상의 무미건조함에 구토를 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문학평론>에서 대중의 삶의 특징을 '수평화'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람들은 모두가 동일하고 어느 누구도 자기보다 더 뛰어나지 않다는 생각에 평안을 느끼며, 다른 사람이 이 표준에서 벗어나 뛰어나게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수평화가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대중적 삶의 실체인데, 그 결과 대붕만이 살아 있고, 개인들은 모두 소멸되었다.
(147쪽)
개인적으로 '수평화'라는 말을 접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움츠려든다.
단일민족이라는 순수혈통을 자랑하며 산업화를 건너온 우리의 모습, 내 모습 같아서다.
가방끈을 메면서부터 친구들과 사이좋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구한다.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한 둘 낳고 30평 아파트에 소나타 승용차를 탄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후새대에게까지 대물림 된다는 데 있다.
남들과 다른 말을 하고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다.
100명이 있으면 100가지의 생각이 나와야 하는데 하나의 생각뿐이다.
대중들이 수평적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창조경영이니 창조경제니... 우스운 일이다.
창조는 함부로 쓰는 용어가 아니다.
키르케고르가 옛날옛적에 한 '수평적 삶'이라는 말이 지금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수평화가 가장 안전(?)하게 잘 정착한 곳이 우리나라는 아니어야 할 텐데.
돌아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로캉탱은 대중들이 이러한 무미건조한 수평적인 삶을 살게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도자 내지는 지배층에 의해 대중들이 그렇게 교육을 받기 때문이라고.
섬뜩하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도 이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도층에 의해 만들어진 교육시스템에 의해 마치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붕어빵 같은 사람들이 대거 학교문을 나서고 있다.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다.(160쪽)
아침에 기상,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져 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186쪽)
카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한 단락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유사하다.
끊임없이 바윗돌을 산 위로 밀어올리는 시지프의 형벌 같은 그런...
이 책을 덮으며,
<철학카페테서 문학 읽기>는 먼 나라 남의 나라 철학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들의 인생 이야기다. 철학은 세상의 반영이고, 세상은 모든 생명체의 반영이다. 문학도 경영도 예술도 철학의 자식들이다. 저자는 문학의 입을 빌어 철학을 설명해주고 철학의 입을 빌어 문학적 텍스트를 흥미롭게 풀이했다. 방대한 철학과 문학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이 책이 얼마나 쉽고 간명하며 적절한 발췌를 통해 쓰여졌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철저히 철학과 문학의 멀리하는 우리들을 겨냥한 책이고, 우리에게 아주 효과적이며 또 의미있게 다가오는 책이다. 자기계발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철학의 부재와 문학의 빈곤 시대, 특히 아이들이 힘들어한다. 아니 쓰러져 간다.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에 성적나쁘다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힘없는 아이를 때리고 괴롭히고 법정까지 가고.. 이 모든 것이 우리 사회 아이들의 자화상이다. 더 이상 소설 속,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이 영어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도서관에는 토익책 넘기는 소리만 요란하다. 영어 때문에 우리는 소질있는 많은 도예가, 화가, 철학자들을 잃고 있다. 어른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 경제적 가치, 하나에 의해 능력과 재능을 평가받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키프케고르가 말한 대중들의 천편일률적인 '수평적 삶'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수평적 삶에서 탈피하여 짱돌을 던질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잘 살고 있는 당신에게 "왜?"라는 말을 던져줄 것이다.
2015년 새해 벽두엔 삶에 '왜?'라는 화두를 던져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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