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인문학>-'5000년 역사를 만든 동서양 천재들의 사색공부법'
부제가 더 눈에 와 닿는 책이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와 더불어 인문학 입문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기본서라 할 수 있다.
시쳇말로 요즘 좀 뜨는 분야가 '인문학'이다. 그간 '인문학이 밥먹여 주냐!'며 내팽개쳤던 기업's, CEO's, 개인's 까지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때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쉽지 않은 게 인문학이다.
'성공 비법', '돈 버는 비법', '영어 잘하는 법'등과 같은 외형과 지식위주의 습득에 최적화 되어 온 머리가 소크라테스의 <변명>,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플라톤의 <대화록>등과 같은 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지식이 쌓인다고 지혜로 승화되지 않는다. 지식은 반복훈련으로 가능하지만 지혜는 생각의 문제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반복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철학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이와 같은 책들이 쉽게 읽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버거운 게 사실이다. 프랑스는 와인과 패션의 나라가 아니다. 철학의 종주국이 프랑스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프랑스는 전 국민이 철학을 하고 학교 교과과정 에서도 철학이 우리나라의 국영수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인간사의 기저에는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철학이 계산과 증명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수학이고,
관찰과 실험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과학이다.
철학이 물질적
생각을 생각조차 못하게 만든 인류 최악의 교육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교육은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었다. 아니다. 아예 '생각을 생각할 필요조차 못느끼게 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이었다. 인간사에 기록될 최악의 교육시스템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어 9월 8일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고, 나흘 뒤인 9월 12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떠났다. 마지막 총독이었던 노부유키가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패했다고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조선이 위대하고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앞으로 100년도 넘게 걸릴 것이다.
우리가 총,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조선 민족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보라.
조선은 진정 찬란하고 위대했다.
하지만 식민교육으로 인해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한국 교육을 설계했던 '조선교육위원회'의 가장 큰 목적은 우리나라에 미국식 교육을 이식하는 것이었다. 공장노동자와 직업 군인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러시아 교육 제도를 본뜬 교육, 즉 백인 하류층과 흑인, 히스패닉 이민자와 아시아 이민자들을 사회밑바닥에 영원히 묶어두고자 만들어진 공립학교 교육이었다. 결코 위대한 리더를 양성하는 인문학 위주의 교육이 아니었다. 목동론 교육이다. 목장은 상류층이 만들테니 니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목동이 되라는 것이다. 소를 키우라는 것이다.
교육을 받을수록 바보가 되는 교육
1. 일제의 식민교육
2. 공장노동자와 직업군인을 양성하는 프러시아식 미국 공립학교 교육
3. 친일파의 우민화교육
4. 군사정권의 독재교육
우리가 20년 동안 공부해 왔던 교육 프로세스다. 이런 쓰레기 교육에 찌든 머리가 플라톤의 <대화록>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이런 교육시스템은 아직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당장 유치원, 초중고, 대학에 가보라. 인류 문명을 진보시키고 역사를 바꾼 원동력인 인문학적 대화와 치열한 사색, 위대한 깨달음을 찾을 수 없다. 죽은 지식의 강제적 주입, 맹목적 암기, 기계적 문제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친구와의 무한경쟁 뿐이다. 학교에서 영혼이 병들고 마음이 파괴된 것을 성인이 되었다고 하루 아침에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공부하여 20대가 되어 사회에 나온다.
해방 이후 '조선교육위원회'는 왜 이런 바보와 목동을 만드는 교육을 우리에게 이식한 것일까?
먼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인문학 교육의 중심인 생각하는 역사교육은 흔히 상류 지배계층이 기록한 역사 뒤에 감춰진 '진짜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다. 만일 국민들이 친일역사학자들의 기록과 전혀 다른, 독립투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역사학자들이 기록한 진짜 역사를 만나면 친일파들은 어떻게 될까?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그들 후손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인문학적 지혜로 무장된 국민들이 자기들보다 유능해지면 후손들의 밥그릇을 보장받기 힘들다. 그래서 목동이 되라는 교육을 강요한 것이다. 죽기살기로 토익 점수와 성적 올려서 목동이 되려는 것이다. 그것도 큰 공장의 목동 말이다.
없는 집 아이들이 한국 학교에서 국영수 공부할 때, 있는 집 아니들은 외국 사립학교에서 원전으로 인문고전을 읽고 에세이를 쓰고 치열하게 토론한다. 없는 집 아이들이 살인적인 취업 경쟁에 내몰려 스펙에 목을 맬 때, 있는 집 아이들은 <논어>, <한비자>, <군주론> 같은 책을 공부한다. 없는 집 아이들이 학원에서 취업 잘 하는 법이나 면접 잘 보는 법을 공부할 때 있는 집 아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에서 시간당 수천만 원 하는 인문학 강의를 듣고, 목동들을 잘 다스리는 법에 대해 토론한다. 없는 집 아이들이 살인적인 취업경쟁에 몰려 스펙쌓기에 몰두할 때 있는 집 아이들은 <논어>, <군주론>, <손자병법>을 물려 받는다.
문제는 없는 집 아이들이 있는 집 아이들보다 더 인문학을 접할 기회도 적고 등한시한다는 데 있다. '먹고 살기 바빠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취업하기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 핑계라면 핑계가 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인문교육은 가르치는 학원이나 학교가 딱히 없다. 오롯이 개인의 몫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교육받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북한 사람들이 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삼부자를 신처럼 모시는가?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박정희,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나치게 우상시하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교육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토론하고 대화하기보다 논쟁하고 싸우는 것에 익숙한 것은 왜일까? 토론하는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는 교육받은 대로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인류 최악의 교육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우리늬 뇌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고의 혁명이 일너나지 않는 한. 조선시대에 데카르트를 뛰어 넘는 철학자가 있었다면, 해방 이후 돌턴을 뛰어 넘는 철학자나 화학자가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먹고 사는 것이 지상 과제였던 당시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자기보다 재산이 열 배 많은 자를 만나면 욕을 하고, 백 배 많은 자를 만나면 두려워하고, 천 배 많은 자를 만나면 고용당하고, 만 배 많은 자를 만나면 노예가 된다. 그게 사물의 이치다."
다음은 무슨 숫자를 의미하는 걸까?.
1. 330
2. 120
3. 90
4. 0
1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1년간 마시는 커피
2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1년간 마시는 맥주
3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1년간 마시는 소주
4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1년간 읽는 인문학 책
4번이 눈에 띈다. 책을 적게 읽는 것이 아니고 거의 읽지 않는다.
저자는 반문한다. "과연 이런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 "과연 이런 나라에 희망이 있을까?"
그럼 우리가 왜 책을 읽지 않게 된 것일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인문학 강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왜 인문학을 등한시하게 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제의 식민교육 탓이 크다. <한국교육사>라는 책에 나오는 글이다. "일제는 경제적 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일환으로 식민지 교육 정책상 인문교육보다는 실업교육을 강조함으로써 한민족의 우민화를 괴하고, 저급한 노동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는 일제가 표방한 실용주의 교육이념속에서 구체화 되어 나타났다. 즉 공리공론의 허명을 떠난 실질적인 것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 요컨대 한국 교육은 되도록 허를 버리고 실을 취한다. 이치를 캐는 자를 적게 하고 농공상 등 실업에 종사하는 자를 많이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인문학 따위를 할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를 더 외우고 수학공식 하나 더 암기하라. 그런 사람만이 훌륭한 목동이 될 수 있고 큰 목장에 취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우리에게 철학을 금지시켰다. 생각하는 국민은 총칼을 든 국민보다 더 무섭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사회지도층 소수만이 철학을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철학을 자유의사에 따라 할 수 있다. 또한 철학은 선진국의 전유물이 아니다. 선진국이 되어서 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했기 때문에 선진국이 된 것이다. 철학없이 수학, 과학, 영어만 한다는 것은 핵전쟁에 소총을 들고 나가는 것과 같다.
'Think'의 원조는 데카르트였다
스무 살의 데카르트는 시와 음악, 무예를 사랑했다. 그는 자신이 학문적으로는 인문학의 모든 것에 통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부하는 인문학'을 집어치우기로 했다. 대신 '새로운 인문학'을 하기로 했다. 그것은 내면에서 끌어오르는 진실한 인문학이었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 속으로 뛰어드는 살아있는 인문학이었다. 후일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나는 20대를 여행하면서 보내기로 했다. 나는 되도록 많은 곳을 방문하고, 궁전들과 군대를 둘러보고, 기질과 신분이 각양각색인 사람들을 만나고, 운명이 나를 위해 마련한 온갖 시련들을 경험하면서 나 자신을 마음껏 시험해보기로 했다."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소렌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의 야생 오리”라는 우화를 남겼다.
한 야생 오리가 친구들과 함께 봄에 유럽을 건너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그는 덴마크의 농가 마당에 우연히 내렸다. 거기에서 그 야생 오리는 길들여진 집오리와 재빨리 친구가 되었다. 그 야생 오리는 옥수수와 신선한 물을 즐겼다. 그는 한 시간만 있기로 결심했다. 그러다가 하루가 되었고, 일주일이 되었고, 결국은 한 달이 되었다. 그 한 달이 끝날 무렵, 그는 아주 넓은 북쪽에 있는 친구들과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울타리 안의 안전한 삶을 즐기기 시작했고, 길들여진 집오리들이 그를 너무나 편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가을이 되었다. 어느 날 그의 야생 오리 친구들이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때, 그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듣자 그는 너무 기뻤다. 그는 너무 좋아서 그들과 함께 하려고 날개를 파닥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울타리 위를 날아오를 수 없었다. 그가 농가 마당으로 뒤뚱거리며 다시 돌아왔을 때, 혼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난 여기가 좋아. 풍부한 음식도 있고, 장소도 좋잖아. 왜 내가 떠나야 해?” 그래서 그는 겨울도 농가에서 보냈다. 그 다음해 봄에 야생 오리들이 다시 그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그는 그의 가슴에서 이상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날려고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을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다시 그를 그들의 무리에 합류하도록 초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는 그 친구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는 이제 날려는 욕구조차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겨우 그를 배부르게 해 주는 옥수수만 계속 먹어 대고 있었다.
외국의 유명 프렌차이저로 우리나라 부동산시장을 뒤흔들어 왔던 맥도날드, 2018년 약 20여개 점포가 문을 닫을 예정이라고 한다. 영업부진 때문이라기보다는 임대료 상승 때문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우스개 소리가 아닌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이 건물주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겠는가. 야생 오리 대신 집오리가 되겠다는 것이다. 복잡하고 힘든 일은 자꾸 멀리하려 하고 현실에 적당히 안주하려는 이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그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어서 세계적으로도 근세기에 세상을 바꿀만한 발견이나 발명이 없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누구나가 세상을 바꿀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가 천재같은 사고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 안주병’은 너무 지나치다.
하지만 IBM의 토마스 J.왓슨은 이 우화를 접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가 부족한 것이 없었음에도 깨달음이 있었던 것은 태생적인 도전의식이 있기도 했겠지만 뭔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인문학>에서 왓슨은 키르케고르 전문 철학자들을 만나 그의 철학에 대해 듣고 인문, 경영학 멘토들을 만나 ‘야생 오리’ 우화를 IBM에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했다.
그리고 자신이 읽고 듣고 토론한 것을 토대로 세상의 흐름을 관찰했다. 세상은 이미 크게 변해있었다. 특히 컴퓨터 개발에 미쳐있는 20대들은 아버지 세대와 전혀 문화가 달랐다. 집단중심적이고 권위적이며 규칙을 중시하는 아버지 세대와 달리 그들은 개인 중심이며 자유롭고 창의적인데다 규칙을 신경쓰지도 않았다. 조직문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단아, 반항아, 부적용자로 몰려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퇴출되기 일쑤였다. 왓슨은 그들을 진지하게 관찰한 끝에 그들이야말로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순수한 열정을 따라 끊임없이 모험의 길을 떠나는 ‘야생 오리’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들을 IBM의 핵심인재로 받아들이기 위해, 사규를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IBM 펠로’를 만들었다.
IBM이 PC를 만든 것처럼 우리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몇 년 내에 그 결과가 드러날 것이다. 후발 주자들의 거센 추격에도 이처럼 버틸 수 있는 저력은 바로 2세 경영인이었던 왓슨의 ‘야생 오리’ 이론으로 무장된 임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꿈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것, 시간이 흐르면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영어 책이 아닌 인문학 책을 선물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인류 역사를 100으로 보면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고작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세상의 모든 전략이 전쟁에서 나왔다는 것이 허황된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휴전상태다. 인문학의 최고봉인 공자는 500면 넘게 계속되었던 춘추전국시대에 태어났다. 공자 외에도 마키아벨리, 레오나르도다빈치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도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전쟁통에서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한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베게티우스의 가르침이 결코 가볍지 않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평화로운 시기에는 안주하기 마련이다. 큰 변화는 전쟁이나 위급한 상황이 닥쳐야 나오는 법이다.
데카르트는 <성찰>과 <방법서설>에서 이런 말도 했다.
"일생에 한 번은 기존에 내가 참된 것으로 인식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뒤집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새롭게 토대를 쌓아야 한다. 그래야 확고부동한 새로운 인문학을 세울 수 있다." 사람은 기존에 성공한 방법을 좀처럼 버리지 않는다. 망할 때까지 밀고 나가려는 것이다.
IBM의 왓슨은 Think로 컴퓨터를 만들었고, 빌 게이츠는 Think Week로 IBM을 뛰어넘는 컴퓨터 문화를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가 IT 강국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IBM,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에 매년 IT 관련 수익의 80% 정도를 저작권료로 지불하는 컴퓨터 소작농에 불과하다.
우리는 Think를 Think로만 생각했지 그 뒤에 숨은 뜻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뒷받침 되지 않는 IT는 하청공장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만일 인문학이 없었다면 컴퓨터도 없었을 것이고 마이크로소프트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던 빌 게이츠의 말이나,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서 탄생했다."는 말은 그저 나온게 아니다. 수천 권의 인문학 독서의 토대 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논어>를 읽고 변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논어>를 읽지 않는 것이다. 인문학은 읽는 것보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데카르트가 말한 '공부하는 인문학'으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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