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지구상의 모든 도서관들이 불에 타고 있고, 거기서 단 한 권의 책을 가지고 나올 시간이 허용된다면 선택할 책이 <월든>이다."
"만약 이 나라의 대학들이 현명하다면 졸업하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졸업장과 더불어, 아니 졸업장 대신 <월든>을 한 권씩 주어 내보낼 것이다."
"<월든>을 읽었다면 결혼해도 좋은 사람이다."
<월든>에 쏟아진 독자들의 찬사다. 책에서 개인적으로 대표할 만한 문장을 꼽으라면 이 부분이다.
나는 내가 의도한 데로 살고 싶고,
인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고 싶어서 숲으로 들어갔다.
또한, 삶이 나에게 가르치는 바를 배울 수 있을지 시험하고 싶었고,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내가 헛되게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인생은 정말 소중한 것이기에, 진정한 삶이 아니라면 살기 싫었다.
<월든>은 저자가 직접 어떻게 문명사회의 온갖 편의를 훌훌 털어버리고 숲 속에 들어가 원시생활을 하면서 마치 개척자와도 같은 자연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미국뿐만 아니라 서양 문학을 통틀어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그래서 혹자는 소로우를 ‘서양의 노자’로 부르기도 한다.
4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서로서의 울림 역시 크다. 세속적인 성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자서전에 가깝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가족도 없었기 때문에 <월든>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에 나타난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 즉 ‘자유의 상징’이었다. 자유를 갈망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처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소로우는 아주 부자는 아니었지만 제법 부유한 환경에서 공부를 하고 하버드대학을 졸업했다. 2년 정도 월든 호숫가에서 자연인의 삶을 살다가 다시 사회로 나와 강연과 측량 그리고 글을 쓰며 살았다. 혹자는 ‘명문대 출신 부잣집 자식이 잠깐 자연인으로 살아본 게 뭐 그리 대단한가?’ ‘서민 코스프레 하는 것 아닌가?’라는 매몰찬 소감을 밝히기도 한다. 그렇다. 지금도 자의든 타의든 소로우보다 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들과 소로우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우선 기록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록이 곧 역사다. 역사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처음 건넜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넜다.
다음으로는 미래를 보는 안목이라 생각한다. 책이 세상에 나온 지 160년이 넘었다. 당시는 진정한 문명사회가 오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문명사회가 낳을 부작용을 미리 예상했다는 의미다. <월든>은 문명사회가 발전할수록 향후 더 빛을 발할 것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호수 근처에 몸을 피신할 만한 집과 먹을 만큼 수확하여 만족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주위와 항상 비교하며 더 큰 집, 더 큰 자동차, 더 비싼 음식, 더 비싼 옷 등에 구속되어 아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소로우처럼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과연 내리 쬐는 햇볕에 감사하며, 내리는 빗물에 감사하며, 과실을 주는 나무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정신수양이 되어 있는 걸까. 문명이 발전할수록 정신은 황폐해져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가난할수록 정신을 살찌우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삶의 가치를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지 않는 능력 말이다.
<월든>에서 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다.
오늘날 철학 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한 때 보람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그렇단 말인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그 일부분이나마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위대한 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성공은 군자답거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고 대개는 아첨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이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에 보다 고귀한 인간류의 원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주요 대상은 인생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로, 자신의 운명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은 보류한 채 타고난 신세와 때를 잘못 만난 것을 한탄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며 목청 높여 끈질기게 불만을 늘어놓는다. 나의 또 다른 대상은 겉으로는 부유하나 실은 가장 가난한 부류의 사람들, 즉 찌꺼기 같은 부를 축적했으나 그 부를 어떻게 써야 할지 또는 어떻게 버려야 할지를 몰라서 스스로 금과 은으로 된 족쇄를 만들어 찬 사람들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과 교제하다보면 금방 따분해지고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다.
고독만큼 사귀기 쉬운 친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보다 밖에서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 대부분 훨씬 고독하다.
무엇을 생각하거나 일을 할 때, 사람은 어디에 있든 항상 혼자인 것이다.
고독은 한 인간과 또 한 인간이 떨어진 거리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일만하는 인간에게는 하루하루를 진정 성실하게
살아갈 여유가 없으며,
사람답게 타인과 교제할 시간도 없다.
나는 인간이 가축을 기른다기 보다
가축이 인간을 기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가축이 인간보다 훨씬 자유롭다.
실제로 가구는 손에 넣으면 넣을수록
도리어 가난해지는 법이다.
나이 많음이 젊음보다도 더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어쩌면 그보다 못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나이 먹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줄 만한 중요한 충고의 말을 갖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가끔 다음과 같은 테스트로 사람들을 시험해본다. 즉 당신들 중의 누가 무릎 위를 깊거나 또는 두어 번 박음질을 한 옷을 입어볼 용기를 가졌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옷을 입으면 자신의 앞날이 망쳐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떨어진 바지를 입기보다는 차라리 다리가 부러져 거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것을 택할 것이다. 그는 무엇이 진실로 존경할 만한 것인가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둔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너무 빈번하게 만나서 상대에게 새로운 가치를 얻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이런 빈번한 만남을 견디기 위해서, 또 터 놓고 싸울 수는 없기 때문에 예의와 범절로 불리는 일정한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
나는 오늘 밤에도 내가 지난 20여 년동안 거의 매일같이 이 호수를 보아오지 않은 것처럼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 아, 여기 월든 호수가 있구나! 내가 그 옛날 발견했던 것과 똑같은 숲 속의 호수가. 지난 겨울에 숲의 일부가 잘려나간 물가에는 새로운 어린 숲이 기운차게 자라고 있다. 그때와 똑같은 사념이 호수 표면에 샘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이 호수는 그 자신이나 그 창조자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행복의 샘물이다. 그것은 확실히 마음에 아무런 흉계를 품지 않은 용감한 사람의 작품이다.
현재 유원지로 이용되고 있는 월든 호수 전경이다. 경제논리로 인해 소로우가 말하는 문명인들의 놀이터로 이용되고 있다는데, 무덤에 있는 소로우는 어떻게 생각할까.
세 번째 집어 든 <월든>, 대학원 재학 때와 직장인 10년차 무렵 쯤 읽었던 <월든>은 쏟아진 찬사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고작 2년 정도의 자연체험기로 다가왔다. 특히 시골에서 자란 나는 생활 그 자체가 자연학습장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시콜콜한 이야기, 현란한 문장력만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 명품 고전들은 한 두 번 읽어서는 그 의미에 제대로 다가서기 어렵다. 읽으면 읽을수록 문장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 그것이 고전의 위대함이다. 조선시대 김득신은 책 한 권을 무려 10,000번을 읽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아무튼 직장생활을 끝내고 나이 50이 넘어 다시 만난 <월든>은 온통 ‘나의 이야기’를 대변해 주는 듯한 느낌이다. 부지런히 쳇바퀴를 돌렸지만 늘 제자리였고, 고지의 깃발을 뽑기 위해 산을 올랐지만 늘 2등이었다. 1로 만족해야지 하다가 1이 이루어지면 2, 3, 4를 향해 달렸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삶의 질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달렸을까? 좋은 말로 하면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퇴근 후엔 동창회, 향후회, 총무회, 동기회, 산악회 등등 참석해야 할 모임도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 혹자는 "그게 사람 사는 것이다.'라고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서로의 필요와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관계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6개월만 지나면 명함으로 이어진 인간관계의 허상이 드러난다.
W.볼튼은 "살면서 미쳤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면 너는 단 한 번도 목숨 걸고 도전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소로우는 당시 이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하버드라는 명문대 출신에 부잣집 자식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철학 교수는 있지만 철학자가 없다"는 소로우의 외침이 다시금 생각나는 시점이다.
삶의 가치에 대해 고민한 철학자적 통찰력은 계속 빛을 발할 것이다. 사회가 문명화 되면 될수록 경제논리만 앞서고 정신논리는 대우받지 못할 것이다. 돈의 논리를 앞세우는 속성 자본주의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OECD 가입 이후 부동의 자살율 1위라는 불명예를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타살'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다.
속성 자본주의의 교과서다.
남들은 200~300년에 걸쳐 이루어내는 걸 우리는 몇 십년만에 뚝딱 해치웠으니 '한강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하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는 데 이처럼 빨랐던 나라가 있었던가.
그러나 최근 들어 혹자는 '한강의 기적'을 버려야 우리나라가 올바로 간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첨단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건국 세대와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 세대가 뒤섞여 있다 보니 세대간 이념간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과거의 산업화식 성공 논리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전진하기 어렵다.
이미 사회 곳곳에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땜질이 아닌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지만 공염불이다.
여전히 '한강의 기적'이라는 논리가 사회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
경제학자는 넘치는데 인문학자, 철학자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소로우 같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과연 이런 풍토에서 진정한 성인, 철학자, 인문학자가 발을 붙일 수는 있을까?
산 속에 있는 절과 교회가 국민들의 구멍난 마음을 모두 치유해 줄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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