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읽다/다시 읽고 깊이 읽기

37. 다시 읽고 깊이 읽기-김훈의 <연필로 쓰기>

김부현(김중순) 2022. 9. 25. 10:53

달력을 한장한장 찢어낼수록 몸 여기저기서 시위를 한다. 멀쩡하던 몸속 세포들이 참을만큼 참았다는 것이다. 뜬금없이 병원 입원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입원할 땐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늘 그랬듯이 책도 몇 권 챙긴다. 하지만 몸이 성치 않은 마당에 평온한 마음으로 책을 읽겠다는 건 첨부터 사치에 가깝다. 그럼에도 입원할 때마다 챙기는 책이 있다. 김훈의 산문집, <풍경과 상처>, <자전거여행>, <라면을 끓이며>에 이어 이번에는 <연필로 쓰기>를 챙겼다.

 

 

김훈의 글은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친다.

일상적인 신변잡기지만 사물에 대한 세심함과 간단한 문장 때문이다. 그의 글은 사실적이고 직선적이다. 결코 구불구불 돌아가지 않는다. 요란한 부사와 형용사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소위 글을 끼적이는 사람들 세계에서는 김훈의 글은 '필사의 교과서'라 불린다. 여행기 입문서라 불리는 <자전거여행>, 산문집 <풍경과 상처>,  <연필로 쓰기> 등은 필사의 모범으로 통한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목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대개의 책들은 들어가는 말, 또는 서문으로 시작하는데 김훈은 이러한 정형의 틀을 깨고 특이하게도 "알림"을 통해 서문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 첫 문장이다.

"나는 여론을 일으키거나 거기에 붙어서 편을 끌어 모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목차도 자꾸 눈길이 간다.

1부 : 연필은 나의 삽이다.

2부 : 지우개는 나의 망설임이다.

3부 : 연필은 짧아지고 가루는 쌓인다.

 

 

 

 

책 속으로.....

 

 

여름에 빛나던 꽃일수록, 가을에는 더 참혹하게 무너진다. 16쪽

 

억새는 바람풀이다. 억새가 가진 것은 저 자신 하나와 바람뿐이다. 그래서 억새꽃은 꽃이 아니라 꽃의 혼백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이 혼백 안에 가을빛이 모여서 반짝거린다.17쪽

 

모든 똥 중에서 최상위 포식자의 똥이 가장 더럽고 구리다. 37쪽

 

밥에서 똥에 이르는 길은 어둡고 험하다. 45쪽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가 없다.(.....)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제가 죽었는지를 모르고, 제가 모른다는 것도 모르고 산 자는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모른다. 살아서도 모르고 죽어서도 모르니 사람은 대체 무엇을 아는가.71~72쪽

 

너무 늙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다. 74쪽

 

 

인간의 정서는 먹는 것에 크게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인스턴트 식품을 너무 자주 먹으면 삶을 가볍게 여기는 일회용 마음이 형성되기 쉽다. 79쪽

 

삶이 요구하는 형식을 존중하라. 삶의 내용은 형식에 담긴다. 형식이 소멸하고 나서도 존재할 수 있는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 좋은 형식은 인간을 편안하게 해 준다. 81쪽

 

현세적 가치를 함부로 폄훼하지 마라. 결혼은 사랑을 생활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결혼은 놀이가 아니다..... 불같은 사랑, 마그마 같은 열정은 오래 못 간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대개 이기심이 섞이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은 그 안에 지겨움이 들어 있어서 쉽게 물린다....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은 이른바 사랑이 사그라진 자리에 연민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이다. 빚쟁이처럼 사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마라. 82~84쪽

 

그 음식은 공업적 과정이나 상업적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노동으로 자연과 직접 교감함으로써 빚어지는 맛과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맛은 영혼의 심층부에 각인된다. 90쪽

 

역사가 기록이 아니라 풍경과 표정으로 남아 있는데, 남해 이락사와 남한산성 서문이 그곳이다. 98쪽

 

 

가난했던 시절에 한국 사람들은 나라가 잘 살게 되고 국민소득이 늘어나면 빈곤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소득이 늘어나자 빈곤은 구조화되었고 구조적 빈곤은 토착화되고 세습되어 간다. 가난은 다만 물질적 결핍이 아니다. 빈곤은 그 결핍을 포함한 소외, 차별, 박탈, 멸시이다. 이 구조는 이제 일상화되어서 아무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장의 원리이며 시장의 자율적 기능이 작동한 결과라고 설명하는 말들은 힘이 세다. 170쪽

 

음식을 먹으면 그 재료는 똥이 되어 몸을 빠져나가지만, 맛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의 지층 맨 밑바닥에 숨어 있다가 불현듯 솟아오른다. 지나간 맛을 지나갔다고 해서 부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나간 맛이 살아나서, 먹고 싶은 미래의 맛을 감질나게 하고, 지금 이 순간의 맛이 지나간 맛을 일깨워서, 나는 지나간 맛과 지금 이 순간의 맛과 다가오는 맛을 구분하지 못한다. 지나간 맛은 결핍이고, 지금 이 순간의 맛은 충만이다. 181쪽

 

이 할매들은 어렸을 때부터 극한의 가난을 감당해왔다. 모두  가난했지만 그 가난은 연대될 수 없었고, 정치화 될 수 없었다. 그 가난은 보편적 가난이었고, 소외된 가난이었으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가난이었고, 누구나의 가난이었고 각자의 가난이었다. 269쪽